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99
〈 99화 〉 라크 반 그레이스
* * *
북방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서늘함을 간직한 바람은 사나웠다. 북방의 바람은 가혹함의 상징이었다.
가혹한 환경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다. 북방에서 살아가고자 결심한 인간들은 굳세어야 했다.
사나운 바람에 할퀴어지지 않도록.
가혹한 환경에 견딜 수 있도록.
그들은 스스로를 단련했다. 인간의 몸으로 견디기 힘든 북방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살아남는 방법을 갈구했다.
『북방의 역사는 생존의 역사다.』
북방의 전사는 강하다. 강하기에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기에 강한 것이다.
그 문장을 라크는 떠올렸다.
“······.”
라크는 어둠에 잠긴 숲을 바라본다.
수풀 사이에서, 나무의 너머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인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은 제 몸을 숨기되, 마냥 숨기지만은 않았다.
‘다가오고 있다.’
인기척은 가까워진다.
그 수를 라크는 눈대중으로 짐작했다. 수는 많았지만 그들의 상태가 좋지는 않다.
녹이 슨 병장기.
갑옷이라 부르기도 힘든 허름한 장비.
그들의 몸에는 그을음과 때가 묻어있다.
마치, 패배하고 후퇴하는듯한 병사들의 모습이다. 그 경로에 견습 기사들의 주둔지가 있었던 걸까.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상태가 좋지는 않은 병사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병사들이다.’
전장을 경험한 병사(兵?)들이다.
그들의 눈빛에서 라크는 흉흉한 살기를 읽는다. 만만하게 볼 상대는 못 된다.
“···후우.”
라크는 숨을 가다듬고 상황을 판단했다.
드맥이 교관을 호출하러 갔다. 지원이 아무리 빨라도 10분은 걸릴 것이다.
10분.
그것이 라크가 버텨야 하는 시간이다.
“그런가.”
라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이로군.”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은 하나다.
‘할 수 있나, 없나.’
만용인가 아닌가.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에 라크는 답한다.
“할 수 있다.”
그거면 됐다.
도망쳐야 하는가.
지원을 기다리는 동안 버텨야 하는가.
숨는 게 옳은가.
그런 잡생각들을 라크는 전부 쳐냈다. 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생각들이다. 결단을 내린 지금, 라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사냥할 것인가.’
라크는 도끼를 고쳐 쥐었다.
눈앞에 사냥감들이 있다. 사냥감을 앞에 두고 사냥꾼은 도망치지 않는다.
뿌득.
라크의 손가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낏자루에 새겨진 회로에 파고들었다. 손에 들린 도낏자루가 파르르 떨렸다.
가속(Accel).
근력 향상(Muscular).
그가 스톡(Stock)된 주문을 풀어 헤친다.
인기척이 조금 더 가까워진다. 코앞까지 다가온 인기척들이 어둠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횃불이 그들의 얼굴을 밝힌다.
살기를 머금은 붉은 눈동자가 밤중에 흉흉히 빛난다. 그들의 시선이 라크에게 꽂힌다.
라크의 붉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중요한 건, 흐름이다.’
흐름을 놓치면 휩쓸린다.
흐름을 잡기 위해서는 가열을 써야만 한다. 쓰긴 하되, 본능에 지배당해선 안 된다. 그때, 실습 시험에서 잠깐이나마 경험했던 기이한 감각을 깨워야만 했다.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한번은 해본 일이다.’
라크가 도끼를 쥔 팔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신호로 여긴 듯 마계의 병사들이 라크에게 달려들기 시작한다. 화살이 날아온다.
그워어어어!
그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울린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사이로 라크의 도낏자루가 툭,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낸다.
도낏자루가 건드린 것은 라크의 심장이다.
가열(Heating).
쿠웅, 하고 라크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2.
“라크 그 아이가 아무리 뛰어나다곤 하나, 전장을 체험하고 오라는 건 조금 너무한 처사가 아닐까 싶구나, 라니엘.”
“네?”
로셀의 물음에 소파에 늘어져 소설책을 탐닉하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들어 올렸다.
부스스한 잿빛 머리칼이 흔들렸다.
잠옷 차림의 라니엘은 눈을 깜빡이며 로셀을 바라봤다. 잠들기 전에 소설책이라도 읽고 있던 모양이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더냐.”
로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아이가 뛰어나다는 건 인정한다. 그래도, 아직은 어리지 않더냐. 아무리 전투 마학과가 실전을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에이, 저도 저 나이쯤이었는걸요.”
라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스무 살이었나? 열아홉이었나? 제가 전장에 처음 갔던 게 그때쯤이었을걸요?”
“너는 경우가 좀 다르지 않을까 싶구나···.”
로셀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 못난 제자 놈은, 자신의 특별함을 이렇게 남들에게 자주 투영하곤 한다.
‘아무리 아플리아가 명문인 데다가, 전투 마학과가 유능한 병사들을 만들어냈다곤 하지만···.’
그것도 다 졸업하고 나서의 이야기다.
아직 그들은 배울 게 많았다. 최소한, 벌써부터 이렇게 전장을 체험하고 오라는 건 로셀이 보기에는 무리한 요구였다.
“아무리 그래도 전장은 조금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전장에서 눈먼 화살에 맞고 다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다치지 말라고, 조치를 해두긴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쓸 일이 없을 것 같긴 해요.”
“조치해놨다니, 별말 하지는 않겠다마는···용사처럼 특별한 경우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요구하지 말란 이야기다, 라니엘.”
“네?”
그 물음에 라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셀이 한숨을 내쉬며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려던 찰나다. 라니엘이 눈을 깜박이며 툭, 내뱉었다.
“그렇게 안 다른데요?”
“뭐라?”
“저도 저희가 특별한 것쯤은 알죠. 다른 학생들이었음 그렇게 시키지도 않았어요. 해봐야 벨노아? 아니 걔는 그런 부류가 아니던가.”
중얼거리던 라니엘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꼬리를 툭툭 두들겼다.
“보면 보이거든요.”
“···무엇이 말이냐?”
“그쪽에 속한 인물인지 아닌지.”
“그쪽?”
“이게 설명하긴 좀 어려운데, 아무튼 그런 게 좀 있어요. 그냥 보면 알거든요.”
소드 마스터, 쿤텔.
망국(?國)의 마지막 마법사, 켈르할름.
최전선의 귀신, 검귀(??) 드라카
전장에 전설을 새긴 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읊으며, 라니엘이 말했다.
“용사는 아니지만,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
별에게 선택받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단련한 끝에 초인과 같은 강함을 얻은 이들.
“쿤텔 아저씨가 말하길, 그런 애들한테서는 조짐이 보인다는데···.”
라니엘이 미소 지었다.
“제가 보기엔 라크도 그쪽이에요.”
그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감만 잡으면 졸업 전에는 따라잡을걸요.”
누구를, 이라고 로셀은 질문했다.
그 질문에 라니엘은 답하지 않았다. 엷은 미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3.
쿵, 쿠웅.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피가 빠르게 몸을 순환했다. 내뱉은 입김은 증기와도 같다. 핏줄이 도드라진 팔뚝이 붉다.
몸이 뜨거웠다.
시야는 좁아졌다.
가열(Heating) 상태에 접어든 라크가 보는 풍경은 다른 이들이 보는것 과는 다르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비추는 것은 단적인 것들뿐이다.
‘적.’
내가 사냥해야 할 것들.
머리에 열이 오른 라크는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단어만이 맴돈다.
‘죽인다.’
라크의 도끼가 살의에 따라 움직였다.
땅을 박차며 라크가 도끼를 휘둘렀다. 화살을 메기고 있던 좀비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후두둑.
핏물과 함께 목이 떨어졌다. 라크는 멈추지 않았다. 몸을 빙글 돌리며 좀비의 곁을 지키던 사냥개의 등허리를 내려찍었다.
으득!
뼈를 으깨고 생명을 끊어내는 감촉을 느낀다. 라크의 속도에 마왕군들 또한 당황했으나, 그도 잠시다. 그들은 라크를 향해 달려든다.
창날이 여러 방향에서 다가온다.
라크가 도끼를 휘둘러 창날을 쳐냈다. 전부 쳐내진 못했다. 라크가 뒤로 물러섰다. 뒤에서도 병사들이 다가왔다.
수가많았다.
혼자인 라크와 달리 상대는 여럿이다. 그리고, 그들은 병사다. 병사들은 혼자서 이길 수 없는 강적을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쉭!
그들의 창을 내질러 집요하게 라크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라크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멀리서 화살을 쏘아댔다.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라크는 자세를 낮췄다. 바닥을 기듯이 창대를 피하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도끼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노린다.
서걱.
발목이 잘린 병사가 뒤로 넘어진다. 포위망이 무너졌다. 라크는 넘어진 병사의 가슴팍에 도끼를 찍으며, 방향을 틀었다.
미끄러지듯이 방향을 튼 라크가 다시금 달려든다. 살점이 묻은 도끼날이 둔해졌다. 묻은 살점을 털어낼 시간은 없다.
콰직.
도끼날을 찍듯이 휘둘렀다.
무게를 이용해 찍어 누른다. 두개골을 박살 냈다. 발목을 아작내 넘어트려 마무리했다.
우드드득!
도끼날을 물어뜯으려는 사냥개의 아가리에 도낏자루를 물린 채 그대로 빙글 돌려 목을 꺾었다. 라크는 본능에 충실히 움직였다.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좁아진 시야로 라크는 최선의 판단을 했다.
그러나, 전투가 이어질수록 라크는 직감한다. 이대로 해서는 끝이 없음을. 다른 방법이 필요함을.
‘수가 많다.’
하나를 죽인다 해서 끝나지 않는다.
적은 많았다. 라크는 혼자였다. 계속해서 그들은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대로 가다간 궁지로 몰린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라크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떠올리질 못했다.
이성이 마비되어있다.
이렇게 해선 안 된다는 막연한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도나, 몸은 본능에 충실히 움직였다.
쉭.
화살이 라크를 견제한다.
계속해서 뻗어오는 창날은 라크를 뒷걸음치게 만든다. 어느새 라크는 궁지에 몰려있었다.
턱, 하고 발뒤꿈치에 무언가 닿았다.
나무였다. 라크는 몸을 비틀며 도끼를 휘둘렀다. 어떻게든 활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악수(?手)다.
라크가 그렇게 나올 것을 예상한 병사들은 하나를 희생해 라크를 잡으려 든다. 라크는 도끼를 휘두름과 동시에 직감했다.
‘실수다.’
좁아진 시야로는 보이지 않지만 공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창날이 다가온다. 창날이 노리는 곳은 라크의 가슴팍이다.
‘죽음.’
라크가 죽음을 직감한다.
마주한 죽음은 서늘하다.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시간 선상이 한없이 길게 늘어졌다.
늘어진 체감시간 속에서 라크는 느낀다.
등줄기를 타고 무언가 흘렀다. 서늘한 감각이다. 차가운 물줄기가 등허리를 타고 역류했다. 물줄기가 지나갈 때마다 감각이 확장됐다.
온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신경이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이 벼려졌다.
척추를 타고 역류한 물줄기가 두개골을 휘감는다. 머리에 냉수를 들이 부은 것만 같다. 눈앞에 불똥이 튀며 투두둑,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감각이다.
그때 느꼈던 그 감각이다.
순식간에 시야가 확장됐다. 한순간에 넓어진 시야와 함께 라크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린다. 라크가 휘두르려던 도끼의 궤도를 틀었다.
촤아아아악!
발이 요란스레 움직인다. 빙글, 제자리에서 돌며 라크가 도끼로 창대를 꺾었다. 꺾인 창대가 허공에 맴돈다.
라크가 회전을 실어 도끼를 던졌다.
다시금 창대를 뻗던 좀비의 머리에 도끼가 틀어박힌다. 라크는 빈손으로 허공을 맴도는 창대를 붙잡아 내던졌다.
푸욱.
“커흡···.”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이 쓰러졌다.
한 번 더 눈을 깜빡였을 때는, 셋의 병사가 더 쓰러져 있었다. 포위망이 완전히 뚫렸다.
포위망을 좁혀오던 병사들이 주춤했다.
상대는 한 명뿐이지만, 그들은 쉽사리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 감각이다.’
라크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육체는 뜨거웠고, 내뱉은 숨은 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머리는 차가웠다.
본능 속에 이성이 자리 잡았다.
타협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서로 일치했다.
‘기이한 일치감, 불가능의 가능.’
본능대로 움직일 때는 하지 못했던 움직임.
확장된 시야와, 기묘한 일치감은 불가능했던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그런가.”
라크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에서 도끼를 뽑아 들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는 거로군.”
뜨거운 열기와 함께 뱉어진 목소리였지만, 그 어조만큼은 차분했다.
라크는 깨달음을 얻었다.
성장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 * *
댕, 대엥.
적습을 알리는 종소리가 막사와 막사 사이에 울려 퍼진다. 잠에서 깬 견습기사들과 함께, 교관들은 황급히 병장기를 챙긴다.
조금 이른 실전이다.
빠르게 지원을 갈 필요가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교관들이 먼저 튀어 나간다. 견습 기사들은 남은 교관들의 지시하에 전투를 준비한다. 그렇게, 먼저 튀어 나간 교관들이 숲의 초입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이었다.
그, 그르르를!
키에에엑!
숲속에서 마왕군이 튀어나왔다.
출발을 준비하던 견습 기사들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마왕군에 당황한다. 교관은 튀어나온 좀비를 발로 걷어차 넘어트리며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이상하다.’
넘어진 좀비는 겁에 질려있다.
교관을 보고 겁에 질린 것이 아니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그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도대체 뭐로부터?’
교관이 그를 깨닫는 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웅.
어디선가 도끼가 날아왔다.
날아온 도끼날이 바닥에 엎어진 좀비의 머리에 찍혔다. 녹색 핏물이 촤악, 하고 튀었다.
“어, 어어···?”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는 교관의 앞으로, 누군가 튀어나온다. 그는 좀비의 머리에 박힌 도끼날을 뽑아듬과 동시에 다시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라크 공자님?”
뒤늦게 교관이 그를 알아본다.
그는 숲속에서 도망쳐 나오는 마왕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다.
그, 그르르륵!
겁에 질린 마왕군이 창을 내지른다.
그 움직임에는 패기가 없다. 확신 없이 내지른 창대에는 위력이 실리지 않았다.
우득.
라크가 발로 창대를 찍어누른다. 나무로 된 창대가 휘다 못해 아예 꺾였다.
빙글.
라크가 꺾인 창대를 붙잡아 던졌다. 좀비가 창대와 함께 나무에 틀어박혔다. 버둥거리며 창대를 뽑으려 드는 좀비를 향해 라크가 도끼를 휘둘렀다.
서걱. 팔과 함께 목이 잘린 좀비가 축 늘어진다.
순식간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좀비가 해체되었다.
눈앞에서 그 모습을 목격한 교관조차,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다.
‘뭐···지?’
이질적이다.
‘저게, 도대체 무슨···?’
이질적인 움직임이었다.
얼핏 보면 맹수처럼 날뛰는 것 같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모든 움직임이 효율적이다. 계산적이다. 본능에 따르되, 이성을 잃지는 않는다. 모든 움직임이 매끄러워 끊이질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짐승이다.
짐승이 마왕군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
교관은 소년을 돕는 것도 잊은 채, 그가 지나온 길을 흘겨봤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소년은 튀어나왔다. 그가 지나온 길이 핏물로 이어져 있다.
길게 이어진 핏물.
여기저기 널브러진 마왕군의 시체.
그 끝에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백색 머리칼은 피에 눌어붙어 있다. 소년이 쥔 도끼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콰직!
소년이 지나온 길에 살아있던 유일한 것이, 방금 명을 달리했다. 소년은 짧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후우······.”
시체 위에 선 소년이 팔을 들어올린다.
엄지로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섬뜩한 모습이다.
교관과함께 모여있던 견습 기사들은 소년의 모습을 흘겨본다. 그들의 뇌리에 핏물을 뒤집어쓴 소년의 이름이 각인된다.
라크 반 그레이스.
북방의 전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