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98
〈 98화 〉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3)
* * *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과, 이제야 막 스물 남짓을 살아온 소녀는 서로를 바라본다.
“······.”
노인의 시선에는 세월의 무게가 담겨있다. 상대의 진의를 읽으려 드는 눈동자는 무겁다.
그에 비해 소녀의 눈동자는 어떠한가.
가볍다. 담긴 것이 없어 가볍다.
툭, 내뱉은 말에 무슨 뜻이 담겨있겠냐는 듯한 표정이다. 소녀의 눈을 통해 그 뜻을 읽으려 해도, 반짝이는 백금색의 빛무리가 그것을 방해한다.
“후우······.”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노인이다.
질레온은 한숨을 내쉬며 지팡이로 툭, 하고 바닥을 건드렸다. 드르륵, 의자가 저절로 질레온의 앞으로 끌려왔다.
“그래.”
질레온은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그는 속으로 레스티에 대한 평가를 고친다.
유약하고, 움츠러들기 바빴던 소녀는 이젠 없다. 자신의 앞에 앉은 소녀는 차기 마탑주다.
‘잿빛 마탑을 이끌어나갈, 잿빛의 주인.’
소녀에게 자격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저 아이가 그 자리에 앉아 무게를 감내하려 든다면······.
‘확인함이 옳다.’
질레온은 소녀가 가진 패를 어렴풋이 보았다. 확실히, 효과적인 패였다. 잘만 사용한다면 잿빛 마탑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을 만한 패.
그리고, 그 패가 가져올 혼돈에선 질레온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더욱더 질레온은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단순한 혼란을 가져올 것인가.
아니면, 개혁의 바람을 가져올 것인가.
“귀 기울여 듣겠네.”
들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차기 마탑주의 말씀이니.”
레스티 엘레노아.
눈앞의 소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2.
그런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도록.
나는 르뤼엘 왕녀에게서 온 편지를 확인했다. 추천서는 이미 라크에게 건넸고, 이건 사담이었다.
그리고, 교수.
아일라의 편지가 요즘 뜸하더군. 편지를 자주···까진 아니더라도, 주기적으로, 정기적으로 보내 달라고 귀띔해주면 좋겠어.
돌아온 편지를 보고 나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하긴, 생각해보면 왕성에 있을 때부터 르뤼엘 왕녀는 자주 아일라에 관해 묻곤 했다.
그 아이는 어떻게 지내지.
혹시 아일라와 엮이는 남학도는 없나?
그녀가 심심할 때마다 물어보는 게 아일라의 근황이었으니까.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어지간하셔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아일라를 무척이나 아끼는 듯 싶었다.
‘정작 본인은 극구 부정하지만 말야.’
왜, 걱정되십니까?
장난삼아 그렇게 편지를 보내보니, 얼마 안 가 장문의 답장이 돌아왔다.
······꼭 비꼬는듯한 말투군, 교수.
내가 아일라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필요한 일이지. 오히려 내 업무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대라면 알고 있을······.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편지를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결국 강한 부정과, 둘러댐이란 두 단어로 요약이 가능한 편지였으니까.
“그렇다는군요.”
나는 그 편지를 툭, 건드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 옆에 앉아있는 인물이 있다. 그녀는 이 편지를 보내온 왕녀님과 같은 백금발과 금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으, 으읏······.”
제 4 왕녀, 아일라.
그녀는 양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귓가가 빨갛게 물들어 있다.
“편지 좀 자주 보내 달라고 하십니다.”
“···그으,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습니까? 좋은 언니를 두셨네요.”
그 귀가 조금 더 붉어졌다.
그러다 결국 인내심의 한계가 왔는지, 아일라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교수님. 저희 언니가 진짜, 그······.”
차마 입으로 말하진 못하겠다는 듯, 그녀가 내 앞에 놓인 편지를 가리켰다. 보다 정확하겐 편지지에 적힌, 쓸데없이 상세한 줄글들을.
나는 그 아이의 학사 생활을 자세히 들을 필요가 있다. 과보호라고 생각하나? 전혀 아니다. 이건 철저히 필요에 의한, 지극히 사무적인 측면에서의 요구이며······.
르뤼엘 왕녀 딴에는 나름 비장미 넘치게 쓴 문장일지 몰라도, 제삼자 입장에선··· 혹은 문장이 가리키는 대상의 입장에선 부끄럽게 느껴질 뿐이다.
“···저렇게.”
아일라가 힘겹게 물었다.
“저렇게까지 하셨어요?”
“예.”
“···진짜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보다 더함 더했지, 덜하진 않으셨습니다.”
“이상하다, 분명 멋진 언니였는데······.”
아일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르뤼엘 왕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는 듯 싶었다.
“뭐, 나름 사정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편지지를 접었다.
처음부터 아일라에게 편지를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우연히 아일라가 왕도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러 내게 찾아왔고······.
‘그때, 하필이면 르뤼엘 왕녀가 편지를 보낸 탓이겠지.’
주머니에 접어 넣어둔 편지지에서 빛이 나니, 아일라는 ‘그게 뭐예요, 교수님?’ 이라고 질문했다. 질문을 받았으니 나는 답을 보여줬을 뿐이다.
‘물어봐서 보여준 건데 뭘.’
손님 석에 앉아, 주전부리를 집어 먹던 아일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별일 없으셨다니 다행이네요.”
“큰 문제는 아니었으니까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사실, 나는 아일라에게 별궁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들려주진 않았다. 적당한 거짓말을 섞었다.
‘굳이 전부 말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르뤼엘 왕녀도 그를 원하진 않을거고..
그녀는 아일라가 ‘평범’하게 아플리아를 졸업하고 왕성으로 돌아오길 원했다.
나는 아일라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왕성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그녀의 노고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내 눈동자가 아일라를 향한다.
그녀의 낯빛은 밝다. 일전에, 왕성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밝고, 근심이 없어 보이는 얼굴.
르뤼엘 왕녀가 바라 마지않았을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묻어 나왔다. 그녀의 수고로움이 쓸모가 없진 않았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나는 편지지를 흔들며 아일라에게 말했다.
“아무쪼록, 제 1 왕녀님께는 자주 편지를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래야겠네요.”
분명 그제도 보낸 거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일라를 뒤로하고, 나는 책장에 꽂힌 서류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게 뭐에요, 교수님?”
“체험 학습 사유서입니다.”
“저희 체험 학습 가나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근에 학생 하나를 현장 학습에 보냈습니다. 그 건으로 아론 학장님께서 사유서를 작성하라 하시길래.”
대충 왜 체험 학습을 허가했는가, 혹은 그런 학습을 설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걸 묻는 종류의 사유서였다.
‘처음엔 눈을 까뒤집으셨지.’
그나마 라크가 현장 학습이 중요한 전투 마학과 학생이고, 전장이라기보단 ‘견습 기사 훈련소’의 양식에 가까운 까닭에 허가가 떨어졌다.
‘그마저도 힘겹게 떨어지긴 했지만, 뭐.’
사유서를 작성하고자 내가 깃펜을 들었을 때였다. 나를 흘겨보던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혹시, 현장학습을 갔다는 학생이 라크인가요?”
깃펜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직 사유서는 백지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일라를 바라봤다.
“라크 공자가 맞다면.”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금빛 속에 깃든 별무리가 반짝인다.
“돌아왔을 때는, 전투 마학과의 수석이 바뀔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글쎄요? 그냥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지었다.
그 모습은 일개 학생이라기보단, 별의 예언을 읊는 예언자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3.
견습 기사 훈련소.
라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틀째의 아침을 마주하고 있었다. 딱딱한 막사에서 잤지만 허리가 아프진 않았다.
“끄응.”
기지개를 피며 막사 바깥으로 나온다.
아직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이라 주둔지는 조용했다. 순회하는 교관들은 일찍 일어난 라크에게 딱히 주의를 주지 않았다.
사실, 대부분의 교관이 라크에게 무언갈 지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라크가 견습 기사 훈련소에 온 것을 기행 정도로 여기는 듯 했다.
‘진지하게 임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며칠 뒤면 떠날 인물이다.’
괜히 얽혀봐야 좋을 게 없다.
명문가 자제의 기행에 끼어 들어봐야 피를 보는 건 교관들뿐이었으니까.
군기를 잡지도, 훈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라크가 하고 싶은 대로 그들은 라크를 내버려 뒀다. 물론 라크는 대충 하지는 않았다. 견습들이 훈련할 때 같이 훈련을 했다. 그들이 연병장을 뛸 때 따라 뛰었다.
“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라크는 견습 기사들과 같은 생활을 했다. 그렇게 해야 뭐라도 얻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단체 생활도 나쁘지 않군.’
라크는 짧게 숨을 내뱉고 도끼를 고쳐 잡았다. 아침 일찍부터 훈련장으로 나가 도끼를 휘둘렀다.
‘교관들을 따라 현장에 나가는 건 내일 아침이라 했다.’
내일 아침이면 마왕군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교관들의 철저한 감독하에 상대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전장은 전장이다.
‘조금 긴장되는군.’
라크는 말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해가 떠오르고, 교관들이 기사를 깨우기 시작할 때쯤 라크는 단련을 멈췄다.
이튿날이 시작된다.
라크는 도끼를 허리춤에 묶은 채 견습 기사들이 모이는 연병장으로 향했다.
* * *
견습 기사의 훈련은 체계적이었다.
당장 전장에 나서게 될 기사들을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것이 이곳, 견습 기사 훈련소다. 교관들이 가르치는 것은 실전과 직관된것들 뿐이다.
“따라 해라. 돌진을 막아 세우기 위해선 창대를 땅에 고정해야 한다. 이 동작을 기억해라.”
전장에서 유용한 것들.
꼭 필요한 기술들을 교관들은 가르쳤다. 내일 있을 실습을 위해 몇 번이고 주의를 줬다.
연병장을 뛰고, 무기를 다루는 법을 점검하고, 기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몇 번이고 강조한다.
견습 기사들은 잘게 쪼개어 하루를 보낸다. 한 톨의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전장에 서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은 이곳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배워가야 했으니까.
그렇게 이튿날의 해가 저물 무렵이다.
“입맛에는 맞으십니까, 공자님?”
“음, 어렸을 때 설산에서 오크 고기를 씹었을 때가 기억난다. 고기가 무척 질기군······.”
“하하, 농담도 심하셔라.”
“농담이 아닌······.”
“그래도 뭐, 고기가 나온다는 게 좋은 일입니다. 아마도, 내일 현장에 나가야 하니 배를 든든하게 채우라는 것이겠죠.”
견습 기사 하나와 말을 튼 라크는,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다 보니, 견습 기사가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런데, 라크 공자님은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겁니까?”
“열심히?”
“그게 그렇잖습니까. 라크 공자님, 무척 강하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교관님들과 견줄 만큼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을 드맥이라 소개한 견습 기사는 말을 계속했다.
“그 정도로 강하신 데다가, 그 이름 높은 아플리아의 학생이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훈련소까지 찾아오실 필요가 있나 싶어서 말이죠.”
“음.”
라크가 고기를 씹으며 답했다.
“교수님이 이곳을 추천했다. 현장을 경험하고 오라고.”
“정신 나간 교수로군요.”
“조금 독특한 분이시긴 하지.”
“아니, 도대체 학생을 대뜸 훈련소에 던져넣는 교수가 어딨단 말입니까? 제가 라크 공자님이었다면 대뜸 욕부터 갈겼을 겁니다.”
제 가슴을 팡팡 치는 드맥을 보며, 라크는 쓰게 웃었다.
“그랬다간 목이 뽑힐 거다.”
“예?”
“무서운 교수님이니까.”
“어, 그렇습니까···?”
드맥과 라크는 이야기를 나누며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오늘 밤 경계 근무 당번이었다. 본래 드맥에게 주어진 업무이지만 라크가 함께 하겠다며 지원한 까닭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던 그들은 근무를 설 위치로 향했다. 나누던 이야기는 어느새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라크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곳 훈련소에는 교수님 말도 있지만 내가 원해서 온 것도 있다.”
“공자님께서 원하셨다니?”
“필요했으니까.”
둘은 지정된 위치에 섰다.
어둠이 깔린 숲은 조용했다. 조용한 숲속에서 라크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이기고 싶은 상대가 하나 있다. 그런데, 도무지 이기질 못하겠다. 그래서 무언가 바뀌긴 해야 하는데··· 이곳에 오면 바뀌지 않을까 싶었다.”
“흠, 성격이 좀 더럽게 바뀌긴 하죠.”
“난 육체를 말한 거다.”
“뭐, 잘은 모르겠지만.”
드맥이 미소지었다.
꽤 시원시원한 미소였다.
“원하는 걸 얻고 가시길 바랍···?!”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라크가 앞장서 걷던 드맥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드맥이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억! 갑자기 왜 그러십···.”
드맥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서 있던 위치에 화살이 박혀있었다. 화살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날라왔다.
“드맥.”
라크가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교관들을 불러와라.”
라크가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허리춤에 걸린 도끼를 뽑아 든다. 도끼날을 쭉 뻗는다.
“적습이다.”
그 도끼날이 가리키는 곳은 숲의 깊은 곳이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