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Top Star RAW novel - Chapter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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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혁이라는 배우에게 꽂혀 버렸다
– 혁이 형, [홍길동전> 공개 오디션 서류 합격했어. 축하해!
백곰이 전화로 알려주었다.
“고맙다.”
– 열심히 준비해서 오디션 꼭 합격해야 돼.
“그래.”
– 오디션은 나흘 뒤 오후 3시, SBC 사옥 7층 드라마본부 드라마2국 회의실에서 할 거야. 오디션 공통 과제가 있는데 홍길동 대사인 것 같더라. 보내줄게.
백곰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정 실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백곰과 달리 정 실장은 여전히 [홍길동전> 오디션 참가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 사극에서 주인공을 했던 배우들이 이번 오디션에 꽤 많이 도전하는 모양입니다. 김길빈, 이기융 같은 배우도 참가한다고 하네요.
이기융이라면 사극 전문 배우라고 일컬을 정도로 사극에 자주 출연했다.
주인공만 대여섯 번.
40대 후반이라 나이가 조금 많기는 하지만 분장으로 커버할 수 있다.
골격이 크고, 강건한 턱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굵고 낮으면서도 증폭이 큰 목소리 등 홍길동으로 손색이 없는 배우이다.
그리고 김길빈.
드라마 캐스팅 0순위.
현대극이면 현대극, 사극이면 사극, 멜로면 멜로 모두 가능한 전천후 배우이다.
외모는 물론이고 연기의 폭도 넓고, 자기 관리도 철저하며 국내와 일본, 중국 등에 퍼져 있는 팬덤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소속사는 국내 3대 연예인 기획사에 포함되는 와우(WOW).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즐비하게 포진해 있는 곳에서도 최고급 대우를 받고 있는 배우가 바로 김길빈이다.
시청률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출연하는 작품마다 흥행몰이를 해왔다.
최근에 그 기세가 조금 꺾이기는 했지만 김길빈이라는 네임벨류는 여전히 최고급이다.
– 김길빈이 홍길동으로 확정된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정 실장이 말했다.
“얼마 전에 공정하게 오디션이 치러질 것 같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 그랬지요. 그런데 김길빈이 오디션에 참가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내정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김길빈은 [홍길동전>의 총괄 연출을 맡는 문웅현 피디의 작품에 세 번이나 출연했고,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문 피디로서는 김길빈을 신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길빈은 문 피디를 아버지라 부르고, 문 피디 또한 김길빈을 아들처럼 여긴다는 건 방송계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관계다.
그러니 홍길동 역할로 김길빈이 내정된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 수밖에.
문 피디는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한 번 결정하면 번복하는 법이 거의 없다.
고집불통.
고집을 부려서 드라마를 말아먹는다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텐데, 매번 성공을 거두니 그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다.
드라마는 시청률이 깡패이다. 시청률에 살고, 시청률에 죽는다.
문 피디의 드라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최소 중박.
물론 최근 들어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의 고집을 뭐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문 피디가 김길빈으로 마음을 정했다면 그것을 바꿀 방법은 없다.
– 오디션, 꼭 하실 생각이세요?
정 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 들러리가 될 수도 있는데요?
정 실장은 설사 내정설이 아니더라도 강우혁이 김길빈이라는 벽을 넘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아끼는 배우가 상처 입는 게 싫었다.
“설사 들러리가 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오디션을 보는 것 자체가 경험이고, 그걸 준비하면서 얻는 게 있으니까 제가 잃을 건 전혀 없습니다.”
마침 스케줄도 없다. 드라마도 끝났고, 광고 촬영도 없고, 영화 [생강> 추가 촬영도 끝났다.
‘아도’ 추가 촬영이 남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일정이 없다.
달리 할 것도 없고 [홍길동전> 오디션 준비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겠다는 거다.
이왕 하는 거 사력을 다할 뿐.
허균,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을 추체험하며 얻은 능력이 녹슬지 않도록 승마장과 검도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고, 매일 국궁 화살 500발을 쏘고 있다.
창, 철퇴 등의 무기 다루는 법도 혼자서 연마했다.
임꺽정과 장길산은 격투술도 매우 뛰어났다.
이소룡을 추체험하면서 얻은 무술 능력과 결합하자 그 위력이 매우 커졌다.
임꺽정과 장길산의 격투술은 이소룡만큼 정교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사극 격투신을 촬영할 때에는 매우 쓸모가 있을 것이다.
***
SBC 사옥 7층 드라마본부 드라마2국 회의실.
[홍길동전> 사흘째 오디션 장소로 쓰이고 있었다.문웅현 피디는 오전에 오디션을 본 김길빈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마디로 실망.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그냥 나왔다.
공통 과제 연기만 놓고 순위를 매기자면 중위권.
그런데도 이 국장은 김길빈에게 공통 과제의 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사담에 가까운 질의응답만 해댔다. 오디션이 아니라 카페에서 만나 안부 대화를 주고받을 때나 나올 질문을.
김길빈의 소속사에서 이 국장에게 로비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일어났다.
김길빈은 오디션 내내 자기가 캐스팅될 거라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만약 소속사에서 이 국장을 포섭했다면 김길빈이 합격을 확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캐스팅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문 피디와 이 국장이 자기편이 되는 것이니까.
과연 그럴까?
문 피디는 김길빈의 최근 연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날로 먹는다는 느낌.
김길빈은 최근 2년 동안 쉬운 역할만 했다. 연기자로서 큰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역할.
김길빈에게 사극 출연 제의가 몇 편 들어간 것으로 아는데, 김길빈은 응하지 않았다.
현대극보다 사극이 여러 모로 귀찮고 성가신 게 사실이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사극은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홍길동전>을 기획할 때부터 문 피디는 홍길동 역에 김길빈을 염두에 두었다.
문 피디가 연락하면 곧바로 캐스팅에 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장길승 작가도 홍길동 역에 김길빈을 생각하면서 집필했다.
드라마화가 확정되자마자 문 피디는 소속사를 통하지 않고 김길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생각하고 소속사로 전화를 걸어 홍길동 캐스팅 제안을 했다.
김길빈 담당 매니저는 매우 반가워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아무런 답변이 없다가 이틀 만에 매니저가 전화를 걸어왔다.
– 피디님, 며칠만 시간을 주십시오.
“길빈이가 안 한다고 합디까?”
– 그, 그건 아닙니다. 다른 일정하고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조율이 필요하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난 뒤 담당 매니저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그동안 김길빈은 전화는커녕 문자 하나 보내지 않았다.
괘씸했다.
떴다 이건가?
– 일정 조율에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며칠만 더 주시면···.
문 피디는 감이 왔다. 김길빈은 하기 싫어하고, 담당 매니저는 김길빈을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면 계약 조건을 두고 소속사와 밀당을 하면서 [홍길동전>을 활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거 없습니다. 홍길동 역은 공개 오디션으로 뽑겠습니다.”
하기 싫다는 놈 억지로 시키고 싶지 않다.
그렇게 정리하고 회사와 논의를 해서 홍길동 역은 오디션으로 선발하기로 확정지었다.
오디션 홍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길빈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 아버지하면서.
매니저가 김길빈을 설득하거나 달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내심 반갑기도 했다.
호불호가 명확한 문 피디답지 않게 갈등했다. 그만큼 김길빈에 대한 신뢰가 컸고 함께한 시간이 길었다.
그런데 오늘 본 김길빈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열의도 성의도 없었다.
물론 촬영이 시작되면 잘해내긴 할 것이다.
그걸 알기에 장 작가와 이 국장이 그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고.
사실 사흘째 오디션을 보고 있지만 김길빈만큼 눈에 들어오는 친구가 없다.
“다음 참가자 들어오라고 해.”
이 국장이 김 피디에게 지시했다.
김 피디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우혁을 불렀다.
문 피디는 다음 참가자의 이력서를 살펴보았다.
강우혁.
아는 배우다.
[서울 가로등>을 보았다.오디션을 볼 것도 없다.
강우혁은 아니다.
기침인지 재채기인지 하는 인형을 가지고 나와 복화술을 하는 걸 봤다.
강우혁의 목소리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온화한 목소리였던가?
홍길동은 험악하기 그지없는 도둑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다.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세상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을 만큼의 울분과 분노, 사회에 대한 불만, 이상향을 향한 열망과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가로등지기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천사표 인물이다.
이력서를 보니 강우혁이 출연한 전작도 본 기억도 난다.
거기서도 선한 역할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에 남지 않는 연기.
무난하고 심심한 연기.
뮤지컬도 한 모양인데, 그건 못 보았다.
설마 여기서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건 아니겠지?
“공통 과제 받으셨지요? 바로 시작해 주세요.”
우혁이 인사를 마치자마자 이 국장이 요구했다.
우혁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렇게 10초 동안 대사를 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소인은··· 누구이옵니까.”
우혁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가슴 밑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슬픔과 울분, 억울함, 분노가 서려 있었다.
문 피디의 눈과 귀가 활짝 열렸다.
“하늘의 자식이옵니까. 아니면 땅의 자식이옵니까.”
우혁의 목소리는 목구멍의 벽을 간신히 기어올라 앙다문 어금니에 짓이기며 힘겹게 입 밖으로 탈출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손톱으로 벽을 긁는 듯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것도 아니면, 짐승의 자식이옵니까아아아.”
그동안 억눌러 왔던 서러움이 뱃속에 응어리가 되어 뭉쳐 있다가 덩어리 채 토해지듯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늘같은 아버지이자 집안의 어른 앞이라 마음껏 터트리지도 못하고 꾹꾹 억누른 채 쿨럭쿨럭 덩어리진 피를 토하듯 서러움을 토해냈다.
우혁은 어깨를 들먹이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심사위원들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소인은···.”
소리 없는 흐느낌이 이어지다가 흐느낌과 함께 거대한 돌에 깔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우혁의 눈물이 회의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형을 형이라 할 수 없는 것이옵니까아!”
대사에 이어 서러운 흐느낌이 이어졌다.
장길승 작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문 피디는 얼이 빠진 모습으로 멍하니 우혁을 응시했다.
우혁의 연기는 커다랗고 묵직한 물체가 날아와 가슴을 타격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우혁이 아니었다.
“수고했습니다.”
이 국장이 우혁에게 말했다.
우혁은 천천히 일어났다.
문 피디는 우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우혁은 여전히 홍길동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국장과 김 국장, 박 시피, 장 작가가 우혁에게 질문을 했다.
우혁은 담담하게 질문에 답했다.
문 피디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문 피디, 질문할 거 없습니까?”
이 국장이 물었다.
“없습니다.”
문 피디가 대답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강우혁의 이력서에 시선을 부려놓은 채.
“수고하셨어요. 나가 보세요.”
이 국장이 우혁에게 말했다.
우혁은 가볍게 목례한 뒤 회의실을 빠져 나갔다.
문 피디는 강우혁의 이력서의 이름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지금까지 문 피디가 오디션을 보면서 부여한 동그라미 중 가장 많은 수는 세 개였다.
“질문 왜 안 하셨어요?”
장 작가가 문 피디에게 물었다.
왜냐!
이미 결정했으니까.
질문한다고 달라질 게 있나?
멋진 답을 하면 떨어질 놈을 붙이고, 제대로 답을 못하면 붙을 놈을 떨어뜨리나?
여기가 회사 신입사원 면접인가?
연기 봤으면 됐지, 질문은 무슨 질문.
문 피디는 고집불통이다.
아무도 못 말린다.
한 번 꽂히면 그것으로 끝.
대신 한 번 돌아서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좀 전에 강우혁이라는 배우에게 꽂혀 버렸다.
그것도 제대로!
객관적이고 이성적 판단은 개에게 줘버렸다.
귀신에 씌이듯이 씌었다.
자료들 들이대고 반박해도 먹히지 않는다.
새파란 신인이었던 김길빈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문 피디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문 피디는 김길빈에게 꽂혔다.
좀 전에 강우혁에게서 느낀 절절함과 열정, 열의가 당시 김길빈에게는 있었다.
그런 이제는 김길빈에게서 그것들을 느낄 수가 없다.
김길빈?
관심 없다.
문 피디의 머릿속을 열어본다면 한 사람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강우혁!
만약 문 피디의 머릿속에서 김길빈이라는 이름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승부욕이 불타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부산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철수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가 흘린 깨알 하나를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