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99
그리 언덕을 내려간 대리석 덩이들은 더 작게, 잘게 잘려나간 다음 열차나 상선에 실려 이리저리 옮겨간다.
지금도 트로아스 반도 곳곳에서 새로 지어지고 있는 도시들을 향해서, 그곳에서 새로 지을 저택이 소금처럼 순정한 빛으로 반짝이길 바라는 부호들을 향해서.
그를 위해, 이곳에 자리잡은 채석장에는 수천 명의 인부가 달려들어 작업에 매진한다.
십수 개의 마을이 근방에 새로 생겨나 그들을 먹여살린다. 선로와 운하가 이 채석장까지 이어져 곳곳으로 새로 채굴한 석재들을 실어나른다.
이 채석장은 어쩌면 아이깁토스나 다른 위대한 제국들이 보유한 것보다도 더 거대할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밀밭 대신 달라붙어 일할 여건이 갖춰져 있고, 수없이 많은 석재들이 쉼없이 사방으로 날라질 교통수단이 마련된 곳은 온 지중해를 통틀어 이곳밖에 없으니.
그리고 그렇게 거대한 채석장이 마련되어 대리석의 값이 내려가니 그만큼 더 많은 이들이 망설임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소용돌이 무늬를 보기 위해 대가를 치른다.
다시 수요가 늘어난 만큼 채석장은 더 커지고 인부들은 더 많이 달라붙는다. 점점 땅이 메말라가는 형국이다. 일손이 항상 부족한 상황에 그나마 더는 스스로 버틸 수 없게 된 독립적인 부족들이 내려와 이곳에 인력을 보탰다.
그렇게 될 수 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농사에 매진하는 대신 채석장에 머물러도 먹여살릴 식량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캐낸 대리석을 실어나를 운송수단들이 자리잡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캐내는 석재를 소비할 이들이 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땀을 닦을 수건 한 장을 어깨에 걸치고, 허리싸개 하나를 두른 채 오가는 동안에 수송선이 도착한다.
선원들이 급히 배에서 뛰쳐나와 몸을 쉬고, 다른 이들이 배를 향해 들어가 물과 식량을 채워놓자 그동안 인부들은 멈춰선 선박 위로 대리석들을 옮겨다 싣기 시작한다.
거대한 신전과 왕궁을, 여러 공공 시설들을 장식하는 데 쓰일 자재들이다. 그것들이 먼저 선박에서 큼직하게 자리를 차지하자 곧 그들은 차즘차즘 옆으로 물러선다.
오늘은 인부들이 안탄드로스에서 나온 관리에게서 밀과 금, 삼베 등으로 대가를 지불받는 날이었다. 그들이 어슬렁어슬렁 관리에게 나아가려 하자 다른 인부들이 나선다.
그들은 안탄드로스에서 임금을 지불받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이 실어나르는 자재들 역시 안탄드로스에 고용된 인부들이 실어나르던 것보다 더 작고 조밀하다. 바닥에 깔아놓을 넓은 판재, 유난히 무늬가 아름답고 독특한 부분을 모아놓은 묵직한 덩어리, 무언가를 새기기 좋은 깨끗하고 작은 조각용 돌까지.
그것들을 안탄드로스에서 운영하는 수송선의 남은 자리에 빼곡히 채워넣고는, 다시 채석장으로 돌아간다.
안탄드로스가 개발한 채석장에서, 안탄드로스가 파놓은 수로와 철로를 통해 물건을 옮긴다.
***
잠시 뭔가 고민하던 대장장이는 집게를 꺼내 청동 주물의 끝을 살짝 구부려본다. 그러자 잔 손잡이로 만들어 달아놓으려던 백랍 덩어리가 비교적 덜 뾰족하게 다듬어진다. 이제 다시 찬물에 식히고 손으로 잡아보자 감촉이 나쁘지 않다.
“···이리하면 되었소?”
그리 말하며 대장장이가 도공들 앞에 손잡이를 내려놓자, 그를 커다란 도기 주위에 이리저리 움직여 끼워넣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 손잡이 쪽이 불량이라며 좋지 않은 소문을 내는 이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런 데서 꼬투리가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듯하여···”
“그래. 그럼 돌아가시오.”
도공들은 자신들의 ‘동업자’ 대장장이에게 고개를 숙인 뒤 슬그머니 걸어나간다.
뒤에서 아까까지 자신들과 대화하던 대장장이가 다른 이들에게 이번 달에 쓸 구리를 조금 더 구입할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탄드로스는 거대한 도시였다. 세상에서 가장 긴 길, 가장 높은 탑, 가장 훌륭한 궁전을 짓는 이들이 이곳에 모여있다.
벽돌과 목재, 석탄과 대리석, 과일과 염료와 양모와 아마포가 막대한 분량으로 이곳에 쏟아져들어오면 다시 그것들로 온갖 유용한 것들을 만들어 지중해 각지로 뱉어낸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물류의 흐름은 한 사람이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의 규모가 아니었다.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안에 참여하며 무수한 산업을 굴린다.
“그, 새 점토는 들여왔나? 당장 밀려오는 주문은 많은데 손가락만 빨고 있으니···”
“다른 도기 공방에서 곧 물건이 들어올 걸세. 항해학교 쪽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물량이 좀 밀려있다는군.”
···이렇게, 거기에 편승하는 이들이 생길 수 있을 만큼.
안탄드로스의 왕 파리스가 지은 거대한 배에 실려 막대한 양의 참나무가 안탄드로스로 들어온다. 그 사이에 이들을 위한 유약과 점토를 ‘조금’ 더 실어도 괜찮으리라.
마찬가지로 파리스가 깔아놓은 철로를 통해 무수한 자재들이 각 도시로 흘러들어간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내어 그들의 상품을 끼워보내도 나쁘지 않을 테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파리스가 만들어놓은 기반 위로 올라탔다.
대부분 안탄드로스의 시민이었지만, 굳이 안탄드로스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파리스가 만든 거대한 체계 위에서 손쉽게 자재와 설비에 접근하고 수월하게 고객들에게 접근하기를 바랐다.
그런 이들의 사업이 점점 커졌다.
-끼이이익.
“공장장님들께서 오셨다!”
“당장 세 번째 가마부터 돌려!”
“고장난 물레는요?”
“옆으로 치워놓게! 나중에 항해학교에 맡겨서 수리해보면 되지 않겠나?”
하나의 공장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안탄드로스와 크레타의 왕 파리스 알렉산드로스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공장, 그의 수하인 조영관 아노이토스의 통제 아래 있지도 않은 공장.
그런 공장이 수도 없이 늘어났다.
그러면서도 항상 그들은 스스로 두려워했다.
···결국, 그들이 행하고 있는 바만 따지자면 그들은 파리스와 안탄드로스에 치즈를 갉아먹는 쥐새끼나 다름없었다.
파리스가 건축 자재를 실어나르기 위해 만든 철로에다, 아노이토스가 자기 상단과 공장의 물건들을 내다팔려 지은 배에다 자신들의 물건을 이런저런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끼워넣고 있으니.
그래서 원래 이런 ‘무임승차자’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그래도 선박이나 열차 용적량의 1할, 적어도 2할 이상은 차지해서는 안 된다거나··· 시설을 빌리거나 설비를 가져오는 일 역시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거나···.
그러나 마땅한 책임자도 조직도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그렇듯, 이 판에 끼어드는 사람이 많아지자 결국 그런 암묵적인 규칙 따위 하찮은 것이 되었다.
이곳의 도공들도 자기들끼리 물레 하나씩 끼고서 장사하는 수준을 벗어나 공방을 굴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활동하던 대장장이까지 끼워 사업을 굴리지 않나?
그저, 웬 사고라도 일어나 이 모든 게 한순간에 날아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는데···
“···.”
“···.”
공방 전체가 기이할 정도로 분주했다.
한편으로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이유 모를 침묵 속에서 도공들이 사용인들과 제자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들은 긴장해서 공방 한켠에 자리잡은 저 응접실 쪽을 가리켰다. 의뢰가 들어오거나 할 때 손님을 받는 곳.
도공들은 그곳의 문을 열었고.
“그대들이 이곳의 주인인가 보군.”
“···.”
“···.”
다리를 꼰 채 그곳에 앉은 손님의 모습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대들도 자리에 앉게.”
“그··· 저···.”
“아, 불편해 보이는군. 그렇다면 용건만 말하고 가지.”
손님은 그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망토를 챙겨 어깨에 걸치더니 입을 열었다. 도공들은 밝은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입술을 바라보며 긴장했다.
곧 당장 이 공장을 철거해버리라는 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 다시는 항해학교나 여러 공장, 철로와 수로에 빌붙지 말고 이 도시에서 꺼지라는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식은땀이 그들의 등을 흥건히 적시는 와중에 손님은 말했다.
“도기를 굽는 가마를 개선하게. 가능하다면 유리나 벽돌 공장을 참고해도 괜찮겠군.”
“···어, 예?”
“유약이 제대로 녹지를 않아. 겉표면이 매끄럽지도 않고··· 질이 별로군. 더 높은 온도로 그릇을 가열하면 좋겠군. 유약은 쓰나?”
“···.”
“대답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 아닙니다! 그냥 나무를 태운 잿물을 발라서 씁니다.”
“음, 나무를 태울 때 고온으로 가열해봐도 괜찮을지 모르겠군. 그릇을 빚을 때 회백색이 도는 미끌미끌한 돌을 갈아쓰면 좋을 텐데. 이름이.. 고령석이던가? 뭐, 그럼 되었네. 이만 가보지.”
그리 말한 뒤 파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말일세.
앞으로 철도라든가, 운하 사용을 열어주지. 단 사용료를 내든 자네들이 배를 알아서 마련해 띄우든 하게나.”
“···.”
“···.”
-쿵.
그렇게 문이 닫혔고.
파리스는 떠났다.
철도를 타고 (2)
“처리하고 왔네.”
“그, 어떻게 처리하고 오셨습니까?”
“말해놨던 대로. 대강, 잘.”
“···.”
“···.”
아노이토스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작게 한숨을 내쉰다.
“정말로 가만 놔두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다른 사업에 차질이 빚어질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앞으로 사용료는 내놓으라고 말해놨으니. 그 다음에 말 안 들으면 저 공방을 때려부수든, 자네가 접수하든 하면 되겠지.”
걔네한테 돈 걷어서 그걸로 상선도, 철로도 늘릴 테니까.
어차피 내 영향력 바깥에 있던 이들이니 내게 손해 볼 것은 없다. 가욋돈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아노이토스는 약간 초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내 태연한 태도를 보고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랫동안 함께해온 동료의 초조함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야 걱정되기는 할 테다. 괜한 걱정이라 할 수도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든 통제되지 않는 물류의 흐름이란 정권의 불안 요소였다.
조선에서 그리 집요하게 상업을 통제하고 장인들을 잡아두었던 이유 역시 그런 지점에서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
사적으로 움직이는 자원, 정부의 뒤통수에서 모이는 인력과 물자··· 조금만 손보면 그것들은 정권을 탈취할 병력과 군수물자가 될 수 있으니까.
상업이 부실해서 전라도에서는 풍작인데 경상도에서 사람이 굶어죽어가도 조선은 사적인 물자 유통을 엄격히 때려잡았다. 그것은 조선의 선비들이 단순히 경제에 무지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타 지역의 지배자들보다 특별히 잔인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체제를 유지하고 수호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어중간한 현대인들보다 훨씬 영리하게 조선이라는 작고 궁벽한 왕국을 통치하고 있던 것이다.
그게 단지 멍청한 전근대인들의 헛짓거리일 뿐일까? 그래서 결국 조선은 망하지 않았나?
···뭐, 까놓고 19세기, 20세기에 안 망한 비서구 국가가 얼마나 되나.
게다가 적어도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조선시대의 선비들을 어리석다고 마냥 깔아볼 수 없다. 북쪽이야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남쪽도 그렇다.
한국인들은 왜 서울 한복판의 가락시장에서 사는 채소가 밭뙈기 바로 옆에 있는 슈퍼에서 사는 것보다 더 신선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더럽게 비효율적이지 않나? 전국의 농수산물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지방으로 되돌아간다니. 상품의 신선도도 떨어지고, 덩달아 물가도 높아지지 않나?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아노이토스가 불안해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아노이토스의 불안 역시 나와 자신의 몫이 줄어드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안탄드로스의 왕’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놔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그런 것이지.
꼭 나쁜 일이 일어나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보장도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건 언제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타당한 불안이다.
그리고 솔직히 나로서는 그 불안을 해소해줄 방법도 딱히 없기에 어깨를 으쓱여줄 뿐이었다.
“언제까지나 내가 모든 곳에 교시를 내려줄 수 없네. 전부 내 손안에 둘 수도 없고.
나도 필멸자니까. 내 지혜는 아테나 님의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고 내 몸뚱이도 하나뿐이야. 이만큼 컸으면 고삐만 쥐고 어느 정도는 놔줘야지.”
“그래도 아쉽습니다. 저는 파리스 님께서 하신 일들을 바로 옆에 봤으니까 말이죠.”
나를 보는 아노이토스의 눈이 살짝 빛난다.
“강철도 그렇고, 저 등대에, 수로에, 아니 도시 전체에 주군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군요. 주군이 저 공장들을 접수해서 더 이끌어주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
철없던 젊은 상인 아노이토스가 지중해에서 가장 큰 재산을 굴리는 상인이 되었다. 내가 있었기에.
그래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머릿속 지식이 무한하지도 않고, 트리에레스는 장인들이 알아서 만들었지.
게다가 내가 영원히 살 수도 없을 테니까.”
내게는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이 도시의 경제가 내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이 도시가 내 통제 없이도 성장한다는 뜻이다.
나는 안탄드로스가 더 커지길 원한다.
아노이토스도, 스클레오스도, 프리아모스나 지금은 죽어버린 저 하투샤의 대왕도 생각하지 못할··· 상상 이상의 규모까지.
저 아이깁토스의 파라오조차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경악할 만큼.
파라오는 수백만의 신민을 거느리며 자신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자라며 자랑하고 있다.
나는 천만이 살아가는 도시에서 왔다.
“자, 어차피 일은 진행되었으니.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지.”
나는 손뼉을 쳐 아노이토스를 상념에서 깨웠다.
일할 시간이다.
***
파리스는 왕이기 이전에 양치기였고, 대장장이였다.
그가 안탄드로스에 와서 가장 처음 만나 도움을 받은 이들은 대장장이와 상인이었고, 그들과 함께 일하며 수많은 분야에 손을 댔다.
그만큼 자신의 사소한 지식이, 자신의 작은 개입이 얼마나 큰 효과를 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비교적 정통했던 양조업이나 농업과 관련한 일이 아니더라도 재철이나 토목건축과 같은 분야에서도 적당히 익숙해지자 꽤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해당 분야들에 대해, 파리스는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저 겉핥기식의 지식만으로도 이런저런 시행착오들을 생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그 ‘이런저런 시행착오’는 보통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파리스는 자신이 잠시 스쳐지나갔을 뿐인 도공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문자 그대로 그는 그들을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자신이 세운 인프라 위에서 혜택을 누리며 그 값을 되돌려주지는 않은 수많은 상인들 중 하나였다.
그 중 사업의 규모가 ‘조금’ 컸을 뿐이다. 파리스는 수십 명이 일하는 공장과 수십 명이 일구는 농장을 몇 개씩이나 쥐고 있다.
커봐야 서른 명에서 쉰 명 정도가 모인 공장 하나를 돌아본 것은 단지 파리스의 흥미 때문일 뿐이었다. 사업 현황도 확인하고, 작은 조언이나 줄 겸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파리스가 자연스럽게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파, 파리스 님께서 계, 계, 계시를 내려주셨다.”
바로 그 자신이 이 땅에서 가진 권위였다.
특히 조선공나 대장장이 외에도 직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공인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파리스는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아야 했다.
갑자기 이 땅의 왕을 면담하고 온 공장장이 하얗게 질려 중얼거리자 주위의 견습생들, 잡일꾼들은 대체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고민하다가 이어지는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
“가마를··· 가마를 바꾸라 하셨어. 다, 당장 누가 근처 벽돌 공장으로 가서 좀 알아봐야··· 아니지. 내가 직접 갔다 오지. 그리고 유약을, 유약을 바꾸게!”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나무를 태울 때 좀 더 높은 온도를 쓰라··· 하셨는데···”
“그러니까 그걸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
“자네, 하라면 하게.”
눈치 없는 견습 도공은 공장장에게서 불호령을 듣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본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그를 신성모독자라도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도공들과 인부들은 무언가 중얼거리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마치 하늘에서 파리스가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히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에 눈을 맞췄다.
그리고 공장장이 인근의 공장으로 향하자마자 모든 일이 급진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젠장··· 이, 이걸 어떻게 쓰는 거지? 이쪽에 땔감을 넣어줘야 하나?”
“나와보게! 당장 불꽃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근처에서 뭘 멀뚱거리고 있나!!”
“벽돌로 마감한 뒤 안팎을 흙으로··· 이러면 구멍이 모두 메워지겠지.”
그들은 무수한 시행착오를 감수하며 겨우 거대한 가마를 지었다. 무너지지도, 벽이 쪼개지지도, 터지거나 열이 새어나오지도 않는 가마를 짓는 데만 꽤 많은 시간과 자원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겪어야 할 고난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디선가 파리스가 말한 그 흙을 찾아 그릇을 빚었다. 파리스가 말한 그대로 나무를 태울 때 방금 만든 가마를 써보았다.
당연히 그동안 무수한 그릇들이 일그러지고 갈라졌다. 공방은 그 시간 동안 의뢰를 받지도, 새 도기를 만들어 팔지도 못했으니 그들 모두가 수입 없이 가마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장입합니다!”
“다들 물러서!!”
그래도 그들은 그릇을 구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시’를 받았으니까.
수백 개의 흙덩이가 무너져내리고, 수천 개의 그릇이 쪼개져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재료를 얼마나, 어떻게 배합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빚고 바르고 구워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계속 움직였다.
무의미한 노력이라 생각했다면 결코 그리할 수 없었으리라.
이 기약 없는 여정에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그들에게 교시를 내린 파리스가 결코 허언을 내뱉지 않았으리라 믿었기에 그들은 그 기나긴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릇을 만드는 데 특정한 종류의 흙을 쓰고, 유약의 성분을 바꿔보는 그 사소한 변혁 역시 수백 년의 시도 끝에 정착한 것이다.
파리스가 별 생각 없이 내뱉었던 그 몇 마디는 단숨에 수백 년 어치의 시간을 단축시켰다.
가끔 제대로 된 산물이··· 그들이 한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그릇이 뽑혀나올 때마다 그들은 전율하며 지난 날의 고생을 잊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서로를 끝까지 몰아붙였고.
“파리스 님? 어느 도공들이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그들은 파리스가 경악하며 뱉은 외마디 말에서 알 수 있듯.
“···뭐야, 여기 자기그릇이 왜 있어.”
결국 결실을 맺었다.
세계최초의 자기(Porcelain)라는 결실을 말이다.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나 있어 밀봉이 어렵고 액체를 담으면 조금씩 새어나오는 이 시대의 평범한 암포라(ἀμφορεύς, 보통 점토로 빚었던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의 항아리)와는 달랐다.
이 새로운 그릇은 마치 유리처럼 미끄러우면서도 표면에 단단한 막이 있어 내용물이 새어나오는 일 따위 없었다. 더 튼튼하고 아름다웠다.
곧 안탄드로스에서 겉이 유독 매끄럽고 물이 새지 않는 그릇이 나왔다는 소식이 트로아스 반도 곳곳으로 퍼졌다.
새로 지어진 도시의 귀족들은 살결처럼 부드러운 감촉에, 광택까지 띠고 있다는 그 그릇을 손에 넣으려 안탄드로스로 하인들을 보내 의뢰를 맡겼다.
밀려드는 의뢰를 감당하지 못한 도공들은 결국 상의 끝에 공장을 두어 배 크기로 늘린 다음 수많은 견습생들을 들였다. 수십 개의 물레가 돌아가며 수백 개의 자기그릇이 가마에서 구워졌다.
그리고 그 그릇들은 안탄드로스에서 포도주와 유리병을 수출하며 개발한 포장재와 상자에 담겨 마차에 실려나갔다.
“···잠깐, 이 화물은 안탄드로스의 왕께 소속되지 않은 듯한데.”
“맞습니다. 바실리키 코린토스(Βασιλική Κόρινθος)에서 만든 그릇입니다. 코린토스에서 만든 건 아니고 점토를 그쪽에서 얻어서 상표가 이렇습니다. 혹시 수수료가···”
역참을 관리하던 역무원이 손가락 6개를 펴자, 상인은 그의 손에 철전 6개를 쥐여주고는 열차에 그릇을 실었다.
“똑같이 백랍으로 만든 주전자인데 왜 전번보다 요금이 올랐습니까?”
“지난번에는 아직 가격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을 때 왔으니 그렇지. 알렉산드로스 님과 그분의 복된 신하들이 정한 가격이니 더 항의할 생각 따위 하지 말게나.”
그리 말하며 역무원은 자기 옆에 세워져 있는 요금표를 퉁퉁 두드려보인다.
도자기, 대리석을 비롯한 각종 석재, 쇠붙이들 등등··· 유독 무겁거나 깨지기 쉬운 물건들을 빼놓고는 자리를 얼마나 차지하느냐에 따라 요금을 매긴다.
파리스와 아노이토스 등이 며칠 동안 회의하며 머리를 쥐어짜 세운 결론이었다. 거기에 거리가 멀어질 때마다 더 높은 요금이 매겨지는 등의 변형이 있었지만 골자는 그랬다.
백랍 주전자와 쇠솥을 비롯해 각종 금속물을 챙겨오던 상인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역무원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씁··· 어차피 예전에는 뒷돈이나 줘가며 몰래 실어보내지 않았소? 그때보다 형편이 나아졌으면 그냥 잔말 말고 내시오.”
“여기! 여기, 대리석 타일 하나만 더 실어주십시오! 차량 한 칸만 더!”
“아니 분명 지난번에는 차량 네 칸은 할당해준다 하지 않았소? 여기다 포도주 하나만 더 끼워가게 해주시오!”
“그대 말고도 지금 열차는 다 찰 테니 말이오.”
“···내겠소. 다 내지.”
“잘 생각했소.”
그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역참으로 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흩어지고, 역무원이 결국 종을 울리자 마부는 놀란 말들의 갈기를 쓰다듬어 달래며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다시 어느 운하에서, 바닷가의 부두에서, 마차들이 제각각 오가는 도로에서 금전을 건넨 상인들이 이리저리 오가며 움직인다.
그들이 건넨 금품 중 일부는 역무원의 호주머니로, 다시 일부는 안탄드로스의 궁전 창고로 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부분은 철로와 운하, 배와 열차를 늘리는 데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