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408
그와 함께, 방금까지 겁에 질려 있던 병사들의 눈에 광채가 돌고 그들의 팔에 완력이 깃든다. 그들은 이제 두려움에 떨쳐내고 용맹하게 아마존의 여왕에게 달려들었다.
이 도시와 사랑하는 이들의 안전을 위하여.
그들을 보살피고 지키는 거룩한 이를 위한 신앙을 위하여.
이교도 야만인에게 흔들리는 이 왕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정의를 위하여.
-쿠득.
-콰지직.
-우르르륵.
-쿵!
“···.”
“···.”
“···.”
“···오, 오지 마라, 이 괴물아! 아몬이시여··· 아몬이시여···!!”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은 정의감, 신앙, 애국심 같은 것도 그냥 세게 때리면 진다.
깔끔하게 적들의 두개골을 부순 펜테실레이아가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미소짓는다. 갓 잘라낸 사제의 손을 떼어내고서 신상을 집어들자 찬란한 광휘가 사방을 감싼다.
한순간에 왼손잡이에서 오른손잡이가 되었다가, 이제는 손이 없어진 사제가 울부짖는 소리는 무시했다.
신상에서 흘러나오는 광휘는 점차 새들이 나긋이 노래하는 듯한 화음으로 전환되고, 곧 누군가의 지엄한 목소리로 화(化)한다.
[···몽매한 필멸자야.]고결하고, 위엄이 넘치는 음성이다.
“왜 부르시오?”
“아버지, 그냥 부수면 좋겠습니까?”
[···.]펜테실레이아는 허리띠에서 올라오는 미묘한 진동을 감지한다. 아랫배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의 전음을.
[···목만 자르고, 머리만 내 것으로 바꿔라.]“그거 훌륭한 생각이군요.”
[멈춰라, 이 야만···!]-싹둑.
댕그렁. 댕. 댕.
“이보시오! 포위당했다고 들었소!! 여기, 파리스와 네스토르까지 그대를 지원하러 왔으니···”
여왕이 뒤돌아보자 당황한 표정의 디오메데스가 주위에 처참하게 널린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살짝 토하는 소리가 들린다. 네스토르와 파라오의 등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중간중간에 “이런 시발.”, “사람 대가리를 왜 별모양으로 잘라···.” 같은 심약한 말들을 들어보니 파리스인 듯하다.
“아! 안탄드로스의 왕이여, 오랜만일세? 언제 이 남쪽까지 왔나?”
“···.”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펜테실레이아가 즐겁게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자 갑자기 달각, 하는 소리와 함께 신상에서 무언가 떨어진다.
그것은 황금으로 도금한 표식이었다. 펜테실레이아가 급히 신상 안쪽을 들여다보자 비어 있었다.
날개 달린 원반 사이에 선 남자의 형상. 그것은 저 동쪽, 현대의 이라크 북부에서 숭상되는 남자의 상징이다.
“오··· 아슈르(Ashur)여.”
아슈르. 그것은 도시의 이름이자, 그 도시를 수호하는 신의 이름이니.
그를 먼 훗날의 이름으로는 아시리아라고 한다.
파라오는 그 표식을 보자마자 입이 찢어지도록 웃음지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자 아직도 떨어져나간 두 손을 붙잡고 그렁그렁 눈물을 쏟는 아몬 사제가 보인다.
성큼성큼 걸어간 노쇠한 파라오가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린다.
“이보게, 젊은 사제여. 그대가 증오하던 참칭자 왕이 여기 있다네.”
“으, 으으윽··· 빌어먹을··· 너, 너는 절대로 죽어서 안식을 누리지 모, 못할··· 시, 신들의 재판에서 너의 죄 많은 심장은 암무트에게 먹혀버릴···”
“그래. 그래. 패배자의 말은 잘 들었다. 이 표식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
“이런, 죽었군.”
파라오가 두 손에서 힘을 풀자 사제의 몸이 힘없이 스러져버린다. 파라오는 주위의 아카이아인 영웅들을 둘러보며 묻는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지. 그렇지 않나?”
“말하자면 그렇소.”
“아르고스의 왕이여, 그리고 나머지 왕들이여. 부탁하네. 머리에 뭔가 들어있을 것 같은 사제 놈 몇 명만 데려와서 심문할 수 있게 해주게.”
파라오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떨려온다.
“드디어, 반역자들의 배후를···.”
***
그 뒤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닥 인상깊지 않았다.
대강 사제 몇몇을 끌고 와서 지지고 볶고(비유가 아니다.) 이리저리 만져주니 결국 원하던 답이 나왔다.
“아, 아시리아의 대왕이 우, 우리에게 지원을 약속했소! 제기랄··· 제기랄···!!”
“좋아. 개종시키고 살려주게.”
세습되는 사제 계급에, 수직 계열화된 종교 조직, 무슨 교황처럼 대제사장이니 첫 번째 예언자니 하는 이름의 지도자까지 있고.
신기하다. 그런데 신을 모시는 데 저런 게 다 필요한가? 그냥 제때제때 제사만 지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막, 어떤 신을 모시지 말라고 전쟁까지 해야 하나?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사고가 고대 다신교 사회에 맞춰져버렸다.
아무튼 이게 단지 종교 전쟁만은 아니니 거기에 대한 생각은 떨치는 게 낫겠다.
나중 가면 아문의 교단이 아이깁토스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더니, 결국 왕권이 무너지고 군웅할거가 이어진다. 저 누비아의 흑인 왕조가 분열된 제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 아이깁토스는 쇠퇴의 길을 걷고.
그 뒤엔 아시리아에 먹힌다.
물론 수백 년 뒤의 이야기이기는 한데.
“보시오! 결국 저 신실한 척하는 반역자들이 아무도 모르게 외력과 결탁하였다는 결정적인 증거와 증언이 나왔지 않소?”
아무튼 인근의 강대국 하나를 골로 보낼 수 있다면 아시리아로서도 해볼 만한 장사다. 어차피 반란 세력은 이미 강대했고 그들로서도 간접적인 지원만 해주면 끝이니.
“결국 더러운 자들끼리는 그 오물 묻은 손을 서로 붙들게 되어 있는 법이라오. 짐짓 신심 있는 체 가장하였으나 결국에는 이렇게 외세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 신성한 땅을 더럽혔으니!”
너도 외세랑 손잡았잖아.
그것도 훨씬 본격적으로, 대놓고.
내란 진압하겠다고 외국군 들여와서는, 자국 영토 약탈해가는 것으로 값을 치른다니. 군밤을 좋아하는 조선의 마지막 군주가 들었다면 열심히 메모해갔을 신묘한 책략이다.
물론 내가 피람세스 왕궁을 군대로 점령하다가 파라오의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한 ‘외국인 고문’을 둔 다음 외교권 잡아먹는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정확히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데 가깝다. 그러니 파라오도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거고.
그래서 나는 딴지를 거는 대신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라오는 서기들에게 방금의 연설 내용을 받아적어 온 아이깁토스로 배포하라 명령한 뒤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기분에 맞춰주려 입을 열었다.
“자··· 그래서, 모든 일이 끝났군요. 축하드립니다. 저 반란자들은 이제 곧 완전 소탕을 앞두고 있고, 신들의 지상 대리자로서 위대한 파라오가 다시 쿠마트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대강 내 말에 파라오가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줄 줄 알았다. 그냥, 예의상.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파라오의 반응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문 신의 영향력이 한 세기 전 아톤 숭배의 그림자가 걷혔듯 사그러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불길한 악신들의 이름을 내뱉을 때는 조심하시오.
이제 그 신들과 폭군들의 이름은 모든 서판과 벽화에서 지워질 테고, 옛 신들이 다시 정당한 옥좌를 차지할 것이니.”
기록 말살.
수 세기 동안 맹위를 떨쳤던 아문 신앙이 이제 몰락한다.
“···어쨌건, ‘그 신’의 사제들은 이제 개종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무엇이 더 남았습니까?”
“아시리아가 남지 않았소?”
“곧 아시리아를 원정할 생각입니까?”
파라오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사래친다.
“그럴 리가. 막 내란을 진압했으니 당분간은 자금을 모으고 피난민들을 정착시키는 데 진력해야지.”
“그렇다면···”
“다만 준비는 할 생각이오.”
파라오는 옥좌에서 내려오더니, 나를 알현실에서 응접실로 데려간다. 내가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자 그는 기이한 능력으로 허공에 유리병과 잔을 띄우더니 내게 포도주를 따라다 준다.
“원래는 수년 동안 전쟁을 준비하려 했소. 그때쯤이면 내가 죽고 내 아들이 왕위를 차지하겠지. 그러면 그대에게 내 아들과 함께 아시리아를 쳐부숴달라고 청할까 했었소.”
그 말을 들으니 머리가 살짝 멍해진다.
트로이아와 아이깁토스가 함께 아시리아를 쳐부숴? 그럼 인류 최초의 세계 제국은? 아시리아의 문명세계 제패와 페르시아의 발흥은?
“그럼 우리는 온 세상을 얻을 수 있었겠지.”
“그··· 송구하오나 분명 좋은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곧 있으면 무슨 재앙이 올지 모르는데 한가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겠나. 나는 아이깁토스의 안정을 위해 개입한 거지 무슨 상고시대의 세계대전 기획하려던 게 아니다.
“그래. 나도 그리 생각했소. 전쟁이 끝나고 나서 바로 전쟁 준비라니. 뒤도 없는 해적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오.”
다행히 파라오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금방 뛰쳐나오는 아카이아인들은 뒤도 없는 해적들 아니냐는 암시는 나도 무시했다.
“···물론 아시리아인들에 대한 징벌은 있어야 할 것이오. 감히 쿠마트의 강역에 검은 손을 뻗쳤으면 그 손목이 잘려나갈 생각도 해야겠지.”
나는 파라오가 건넨 잔을 들어다 한모금 입 안에 넣고 굴린다.
···아 씨, 이거 내가 만든 거네.
“그렇습니다. 굳이 파라오께서 직접 나설 이유도 없지요.”
“그래. ‘해왔던 것처럼’만 하면 되지 않겠소?”
“···음?”
해왔던 대로. 해왔던 대로···라···.
아하.
파라오는 잠시 말 없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활짝 웃는다.
나도 활짝 웃었다.
“값은 얼마나 원하나?”
“적당히만 떼어주십시오.”
우리 둘 다 이 짓거리에 맛이 들렸나 보다. 슬슬 나도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어나면서 한마디만 더했다.
“위대한 두 왕국의 지배자시여, 마침내 왕국을 평정하신 데 다시 한번 경하드립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으니 들어주시길 청합니다.”
“무슨 이야기요? 그대의 말이라면 내 달게 듣지.”
“양곡을 저장해두십시오. 피라미드의 공사도, 이제는 당분간 멈춰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피라미드의 건설을 건드리자 이번에야말로 파라오는 얼굴을 굳힌다.
왜냐하면,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니까.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이후 쓰일 자신의 거처다. 영원한 삶의 영광을 위한 궁전이다.
하지만.
“곧 재액이 닥칠지 모릅니다.”
죽음 이후의 삶 이전에 살려야 할 삶들이 있으니.
내 말에 오랫동안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생각하던 파라오는, 뭔가 천천히 입속으로 읊조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야.”
***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홍해에 낯선 배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돌며 에티오피아와 인도양을 누비고 돌아다녔다.
창, 칼, 화살과 함께.
“괴물이다!! 홍해의 괴물들이 여기까지 왔다!! 다들 도망쳐라!!”
“시, 시, 신들이시여! 제발··· 제발 이 위대한 우르(Ur)를 보호하소서!!”
“오디세우스 님? 파리스 님께서 불태워도 된다 하신 건 아시리아 쪽 아닌가요? 이렇게 바빌로니아의 영토를 약탈해도 괜찮을···”
“어차피 가는 길에 있지 않나?
그냥 겸사겸사 한다고 생각해.”
“그···”
“저기 필록테테스도 이미 가서 부수고 있잖아. 빨리 따라가.”
아카이아의 해적들이 홍해와 메소포타미아를 덮친다.
누구도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파라오는 파리스가 돌아가고, 새 ‘용병’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활약해주니 즐거움에 미소지었다.
적들의 도시가 불탈 때마다 축하 연회를 열며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향기로운 맥주를 따라 제단에 올리려 할 때쯤.
파라오는 왠지 모를 이질감에 맥주잔을 내려다본다.
그 안에 서리가 끼어 있었다.
첫 겨울 (1)
“헥토르, 뭘 하나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나의 안드로마케.”
헥토르는 피칠갑이 된 갑옷을 대강 닦아내고는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커다란 숫사슴과 한 묶음의 죽은 나뭇가지였다.
평소 같으면 숫사슴을 먼저 해체하는 데 바빴겠지만 헥토르는 다른 일에 한눈 파는 대신 곧장 나뭇가지 묶음을 들고서 다시 궁전 밖으로 향했다.
안드로마케가 따라나오자 그녀에게 자신의 외투를 대신 걸쳐준 다음 사용인들이 일하는 궁전의 한켠으로 향했다. 급작스레 헥토르와 안드로마케가 들어서자 시녀들이 하나둘씩 비켜선다.
“···화로는 어디에 있지?”
“고귀한 분이시여, 화로라 하심은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이 크고 훌륭한 집에는 화로가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동생이 만들어놓은 것.”
그러자 시녀들은 더 망설이지 않고 저 외벽의 한쪽 구석을 가리킨다. 헥토르는 먼지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서 다시 걸어나가 그 앞에 멈춰선다.
-칙.
헥토르가 품에 품고 있던 부싯돌을 부딪히자 작은 불꽃이 공중으로 튀어오른다. 불씨가 나뭇가지를 삼키며 크게 타오르고, 헥토르는 그를 외벽 한쪽에 마련된 구멍 안에 밀어넣었다.
“헥토르? 이게 지난번에 안탄드로스의 왕이 찾아왔다던 그때, 그···”
“파리스는 이 안에 계속 불씨가 남아있어야 한다 말했습니다. 내게도, 아버지에게도 그리 말해주었지요. 당신이 잠시 친정에 가 있을 적의 이야기입니다.”
헥토르의 얼굴에 쓴웃음이 감돈다.
“파리스가 그때 이곳에 불을 피우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위에서 요리를 해도 되고, 목욕물을 끓여도 좋다고 했지요. 땔감이 많이 필요할 테니 인근의 요정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고 말입니다.”
“···헥토르?”
안드로마케가 무릎 꿇고 화로 앞에 앉은 그에게 손을 내밀자, 헥토르는 그 손을 붙잡아 자기 뺨 위에 놓는다. 사냥에 지쳐 달뜬 뺨이 안드로마케의 차갑게 식은 손끝을 데웠다.
“그 다음에··· 파리스는 이 벽 안쪽의 작은 방에 나를 데려갔지요. 그리고 내게 말했습니다.
파리스는··· 이 방 안에 있으면 결코 추위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화로 몇 개를 가져다두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효율도 좋고 따뜻할 거라 하더군요. 온기도 오래 간다 말해주었지요.”
“···.”
안드로마케는 헥토르의 얼굴이 왠지 슬퍼보여서, 입을 열지 않았다. 헥토르는 부인의 배려에 감사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반쯤 혼잣말이 된 이야기다.
“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더워서 쓰러지지 않겠느냐고. 신기하지만 쓸모는 없지 않겠냐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맞습니다. 하지만 파리스는 아니었지요. 그리고 그 녀석만 옳았습니다.
···항상 그랬지요. 항상 내 파리스는 옳았습니다.”
헥토르는 그리 말하며 다시 안드로마케의 어깨에 걸쳐준 자신의 외투를 꼼꼼히 여며준다.
“들어가 계십시오, 안드로마케. 만일 아스티아낙스가 추워한다면 저 안쪽 방에 데려가라고 하인들에게 말해두었습니다. 당신도 추위에 약하니, 저곳에서 쉬시지요.”
“당신은요?”
“나는···.”
헥토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리도록 눈부신 풍경이었다. 마치 이 땅에 은과 유리를 흩뜨려 뿌려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온 세상이 새하얬다.
모든 나뭇가지들마다 고드름이 달렸다.
“···나는, 동생의 말을 좀 더 유심히 듣지 않았던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있겠습니다.
이보게. 안드로마케 님을 저 안쪽으로 데려다주게.”
안드로마케가 남편에게 뭐라 하기도 전에 시녀들이 그녀의 몸을 몇 겹의 망토로 싸매고 저 안쪽으로 데려갔다.
헥토르는 그렇게 홀로 불을 떼며 벽 바깥에 서 있었다. 한참 동안.
“이봐! 장작은? 아직도 장작을 못 구했나? 씁, 아무리 갑자기 벌목꾼들이 몰렸다지만···.”
“요정들께 제사 지내는 데 쓸 황소가 필요합니다! 황소! 누구 소 한 마리만 빌려주십시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어디오! 사람이 동상에 걸렸소! !”
“기도하시오. 모두 집안의 평화와 온기를 가져다주시는 헤스티아께 자비를 청하시오.”
“파리스 님이 지은 주택이 아직 남았나? 하나도 안 남았어? 방 하나만 얻어다주게. 부인의 몸이 으쓸으쓸해서 그러니···.”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이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핀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들이 등짐으로 땔감을 나르러 오간다
누군가는 제물을 깎으며 요정들에게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허락받기 위해 애쓴다.
밤 사이 얼어죽은 애완견을 묻어주려다, 땅이 얼어붙어 나무 삽이 쪼개지는 일도 있었다.
트로이아의 시민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왕과 장로들이 탄식하고, 노예들은 허리를 웅크린다.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차가움이란 것을 배웠다.
그리고.
파라오의 맥주잔에도 서리가 끼었다.
***
-“양곡을 저장해두십시오. 피라미드의 공사도, 이제는 당분간 멈춰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처음에 파라오는 화를 내려 했다. 아무리 부유하고 강력해졌다 하더라도 그는 한 부락의 왕일 뿐이고, 자신은 파라오다.
그런데 그 작은 부락의 왕자 한 사람이, 감히 위대한 파라오가 영구히 살아갈 궁전의 건축을 말린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곧 재액이 닥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그의 말이 이어지자 파라오의 생각은 달라졌다.
이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 세트나크테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안탄드로스의 왕이자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 그는 사소한 근거조차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파라오를 향하여 이런 ‘직언’을 올린 것이 야만인들의 하찮은 미신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머릿속의 기이한 망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분노와 조소의 기운이 한 차례 몰려왔다 물러나자 파라오의 머릿속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