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409
의문의 씨앗이 자리잡았다.
저것은 기만인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의 제국에서 먼저 양곡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다.
그것이 단지 아카이아의 해적들에게 매어놓은 목줄 이상이라면···.
생각의 흐름은 길지 않았다.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야.”
파라오는 그리 대답하고 파리스와의 대화를 가볍게 넘겼다. 다만, 여러 서기와 신관들을 불러 당분간 건축 사업을 자제하고 창고를 늘리라 명해두었을 뿐.
그들은 뭐라 항의하려 했으나, 파라오가 솔선하여 자신의 피라미드 공사를 중단하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라는 명분 역시 충분했다.
고로 이후에 불어닥친 종교적 격변에도 새 신전이 지어지거나 옛 신전이 허물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지의 부조와 신상에서 아문의 흔적이 쪼아내지고, 그것이 토트, 라, 오시리스의 것으로 대체되었을 뿐.
그 모든 과정은 세심하게 정치적이었다. 다시는 어느 한 신의 신관 세력이 강대한 힘을 그러쥐지 못하도록 세력권을 흩뜨려놓고, 각 교단이 파라오를 향한 충성 경쟁을 지속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과정.
조금만 더 재화를 풀었더라면 훨씬 수월해졌겠으나 파라오는 왠지 모를 찝찝함 때문에 창고의 문을 쉬이 열지 않았다.
이교도 야만인 왕자의 흰소리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쉽게 고민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렇게 오늘이 왔고.
오시리스의 부인 이시스에게 올리던 맥주잔에···
서리가 내렸다.
“···.”
파라오가 제단 앞에서 갑자기 멈춰서자 웅성임이 시작된다. 제의를 위해 움직이던 헐벗은 무희들과 악사들도 당황하여 파라오를 올려다본다.
파라오의 굳은 얼굴이 보인다. 그의 눈에 깃든 공포가 엿보인다.
“파라오시여, 갑자기 무슨 일로 그러십···”
어느 환관이 조심스레 나아가 파라오에게 질문을 던지다가, 그 역시 말을 멈춘다.
그리고 환관은 말을 이어가는 대신 정수리에 놓인 가발을 벗는다. 그러자 그의 벗겨진 두피 위로 몇 올의 차가운 알갱이가 내려앉았다.
파라오가 고개를 치어든다.
그러자 이 신전 앞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홀린 듯 파라오를 따라 하늘을 향해 눈길을 돌린다.
그곳에서는 그들이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먹구름.
바람.
그리고.
그 아래서 흩날리는 눈발.
이 축복받은 쿠마트의 백성들은 수백 년만에 ‘눈’이란 것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지중해를 낀 페니키아인들과 히브리인들의 도시도, 지금껏 뱃사람들의 이야기로만 들었던 눈송이를 마주한 시민들의 웅성임으로 가득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신기하다고 기꺼워하며 차가운 질감을 즐겼고, 누군가는 올해 농사가 어찌될지 모르겠다면서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 하얀 것’들이 한 달 내내 내리게 되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내 온 지중해에서 소문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아, 알렉산드로스···!”
“‘그’가 말한 바 그대로다!! 추위가 온다!! 땅이 식어버리고 바다가 얼어붙을 추위가!!!! 만유의 죽음이 닥쳐오리라!!!!”
“다, 다들 기도하시오. 제, 제발, 저 하얀 죽음이 그치기를···.”
트로이아의 예언자 왕자에 대한 소문이.
그들은 ‘재앙의 예견자’를, ‘따스한 불씨를 가져온 이’를, ‘하투샤를 거꾸러뜨린 위대한 도시의 수호자’를 만나기 위하여 북쪽으로 향했다. 삭풍이 더 강해지더라도 그들은 샘솟는 희망을 품고서 걸어나갔다.
안탄드로스로.
***
-보드득.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다. 거기에 이다 산 깊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에는 느껴볼 일이 없는 감촉.
눈알갱이들이 발 아래서 부서지고 뭉치는 느낌.
“···아.”
실감이 난다.
있어서는 안 될 수준의 추위가 이 땅에 닥쳤다.
“맙소사··· 파리스 님, 이런 폭설은 겪어본 바가 거의 없습니다. 눈이 내리더라도, 잠깐 쌓이더라도 며칠이면 다 녹아내려야 하는데. 이런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그런가···?”
“예.”
아노이토스가 경악감을 나타내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농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밀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 감자라는 것들은 괜찮겠습니까?”
“괜찮을 걸세. 이 정도 추위로 감자는 당장 얼어죽지 않을 테니. 다만 신경써야할 것들이 있기는 하네. 추위가 계속되면 생육하는 대신 다시 휴면기로 들어가거나 할 수 있으니.”
“그···렇습니까? 주군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조금 확신이 깃드는군요.”
아노이토스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끄덕거린다.
“솔, 직히 주군도 이런 추위를 느껴보신 적은 없으시겠지만, 마치 느껴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니 제 마음에 신뢰가 깃듭니다. 왠지 주군과 함께 있으면 이런 추위쯤이야 이겨낼 수 있을 듯한···”
“···정확한 판단일세.”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걸음을 더 걸었다.
-보득.
그리고 발로 바닥을 슥삭슥삭 비벼본다.
-끼익.
“어··· 금방 바닥이 드러나는군.”
“당연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눈이 더 온다면 온 세상의 육지가 하얗게 잠기고 말지 않겠습니까?”
원래 그게 ‘겨울’이다.
나는 그리 말해주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노이토스의 말마따나 ‘파리스’는 이런 추위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21세기의 누군가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내가 이런 추위를 경험해본 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대구에 내려갔을 때뿐이다. 그때 자고 일어나보니 수십 년만의 폭설로 영호남 전역의 교통이 마비되고 있다기에 나는 긴장하며 밖으로 나섰다.
-보독.
그때 딱 이랬다.
체감상 강설량, 약 1센티미터.
한반도 중부 지역에 살고 있던 나로서는 우스운 수준이다. 가끔 끔찍한 폭설이 닥칠 때면 20센티미터는 훌쩍 넘게 쌓인 눈 때문에 종아리까지 눈이 차올라 걸을 수조차 없었다.
부실하게 지은 건물들이 지붕에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강 전체가 얼어붙고, 도로가 가로막힌다.
내게는 그게 혹한이었다.
그러나 겨울에도 비가 내리는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조금 우습게 보이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각지의 철도와 운하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도로 역시 그 인근 주민들에게 급하게 삽을 나눠주고 눈을 치우게 하고 있다.
가슴과 허리를 드러내고, 하늘하늘한 옷만 걸치고 다니던 이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몇 겹이나 되는 일상복을 겹쳐입고서 입김을 뿜어낸다.
안탄드로스 대부분의 산업 단지들도 수력에 의존하는 만큼 강이 얼어붙기 시작하자 급하게 장인들이 달려나와 수로에 얇게 낀 얼음을 깨부수고 있다. 그 정도 얼음으로 수차의 운행이 멈추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아무도, 이런 추위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 알지 못한다.
“스클레오스 아저씨에게··· 전해줘야지. 강의 얼음을 깨면 좋겠지만 그리 급하게 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이야.”
“시종을 보내면 좋겠습니까?”
“아니, 내가 나중에 직접 가서 전해줄 테니 괜찮아.”
나는 외투를 걸쳤다. 모직물 천 사이에 양모를 쑤셔넣어 만든 외투다. 슬쩍슬쩍 천 사이로 비져나온 털들이 거칠게 내 팔다리를 찌른다.
어쩔 수 없다. 처음으로 급하게 만들어본 물건이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면 안 되겠지.
이런 걸 모든 시민들이 입고 다녀야 할 테니.
“나는 이노와 함께 숲으로 가있겠네. 자네는 대신 장로들과 조합장들, 장인들을 모아주게. 나눌 이야기들이 많으니.”
“숲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앞으로 땔감이 아주, 아주 많이 필요해질 테니까. 아마 숲의 동물들도 얼어죽을 텐데 그건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요정들과 논해야 하지 않겠나?”
“···.”
“언제쯤 돌아오실 겁니까? 지금, 각지에서 주군을 알현하러 손님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은 그들에게 숙소를 배정해주게.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는···
···나도 몰라.”
젠장.
정말 모르겠다.
겨울.
비만 추적추적 내리는, 습하고 차가운 가을 같은 지중해의 겨울이 끝났다. 내게는 끊임없이 봄과 여름과 가을만이 나날이 반복되던 세월이었다.
나는 환생하고 나서 이제야 처음으로 겨울을 맞이한다.
···아주 시린 겨울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첫 겨울 (2)
겨울철, 대구나 부산에 가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그곳에서 ‘폭설’의 기준은 우리와 다르다.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눈이 ‘얼마나 쌓이느냐’를 두고서 폭설의 기준을 판별한다. 겨울이 오면 인도에서는 알바생들이 각자 상점 앞에서 눈을 치우고 제설차가 차도를 오간다.
그게 평범한 겨울이다.
하지만 소백산맥으로 나머지 지방과 분리되어 있는 영남권은 이야기가 다르다.
겨울철마다 시베리아 기단이 서해를 지나오면서 눈구름을 형성하지만, 그 눈구름은 소백산맥을 지나오면서 소멸해버리니.
그래서 영남에서 눈은 드물다. 내리자마자 녹아내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기에 전국적으로는 폭설이냐 아니냐를 따질 때 ‘얼마나 쌓이느냐’를 따진다면···
영남권에서는 ‘쌓이면’ 폭설이다.
눈이 쌓이기만 하면 그 일대의 교통이 순식간에 마비되고 시민들은 큰일이 났다며 혀를 찬다.
10년만의 폭설(1cm) 같은 이야기가 농담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 삽이 필요해!”
“거기 있지 않나?”
“날이 나무로 되어 있으니까 부러지잖나! 젠장, 이거 왜 이렇게 단단해?”
“그아아아악! 이, 이게 얼마 짜린데!! 항아리가 죄다 터져나간다!!”
“수레가 미끄러집니다! 미끄러지고 있다니까!! 다, 다 비켜!!”
결국 이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대비되어 있느냐, 얼마나 익숙하느냐에 따라 폭우든 폭설이든 재앙이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고로 지금 저 지평선 너머까지 얇게 깔린 눈은 그 자체만으로 안탄드로스의 시민들에게는 신기한 기적이자, 재앙이고, 삶에 끼어든 갑작스러운 불청객이었다.
물론 눈송이가 떨어져내릴 만큼 추운 영하의 날씨도 그들의 인생에서는 처음일 것이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깨벗고 나다니며 ‘입김’이란 게 나온다며, 신기하다며 뛰어다니다가 이내 감기와 오한에 걸려 앓아누웠다. 물론 아이들이니 얼마 안 가 다들 나았지만.
그 뒤로 사람들도 ‘목도리’라든가, ‘외투’라는 것의 필요성에 대해 지각한 모양이었다. 베틀을 개량해둔 게 이럴 때 쓸모가 있었다. 당장은 수요가 없어 쌓여가던 모직물들이 창고에서 풀려나와 시민들에게 배급되었다.
물론 그들은 뭘 어떻게 할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들 앞에 미리 준비한 ‘겨울 복장’을 입고 나가 연설을 하거나 호기심을 끌었다.
대강의 형태만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나둘씩, 헐벗고 다니던 시민들이 저마다 양털로 짠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며 긴 장화를 걸친다. 평소에 걸치던 하늘하늘하고 간단한 복장보다 훨씬 불편한 옷을 입고 바둥거린다. 샌들이 아닌 신발을 신으니 걷기도 힘들어했다.
물론 며칠이 지나자 바둥거리거나 넘어지는 이들은 사라졌다. 사람은 항상 환경에 적응하니까.
“···파리스, 뜨거운 우유.”
“여기 준비해놨어.”
물론 요정은 쉽게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노는 나와 함께 요정들과의 협상을 위해 오가다 오한이라도 들었는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곧장 으쓸으쓸 떠는 이노를 바닥난방을 설치한 방으로 데려간 다음, 담요를 덮어준 다음 끓인 우유를 건네주었다.
이노는 우유를 몇 번 들이마시더니, 마른 풀처럼 힘없이 담요 속으로 파고들어간 다음 고르릉거린다.
“괴···로워···.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여기, 삶은 오징어도 있···”
“음, 맛있어! 다 나았다!”
“···.”
아무튼,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이노를 달래고 있자 머잖아 사람들이 들어온다.
우리 둘이서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있었지만 워낙에 위엄 없는 모습을 자주 보인 터라 이 중에서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어설픈 이들은 없었다.
“왕이시여, 일단 말씀하신 바대로 나뭇가지들이 부러지지 않도록 쌓인 눈을 털고 가축들을 새로 지은 축사 안에 들였습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디오니소스교도들과 함께 큰 농장을 일구게 된 오소르콘이었다.
안탄드로스의 영토에서는 그가 관리하는 땅에서 가장 먼저 씨감자를 키웠고, 그가 관리하는 포도농장이 가장 거대했다.
나는 오소르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감자 농사에 주력하게. 이곳에 있는 지주들도 모두 명심하시오. 밀을 키우기 점점 어려워질지 모르오. 가장 영향을 받지 않을 작물은 감자일 테니 감자에 집중하시오.”
“하오나 감자는 오래 보관하기 어려워···”
“말리시오. 내가 말해주지 않았소? 발로 밟아 으깨고 말리기를 반복하면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을 테니.”
추뇨(Chuño). 안데스 지방의 전통 보존식. 미래의 동결건조식품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다.
밤에 감자를 얼리고, 낮에 그를 으깨 물을 빼서 말려 만드니 겨울이 추워진 지금 만들기 적당하리라.
나는 땅과 노예를 가진 장로들에게 다시 추뇨 만드는 법을 읊어주었다. 물론 로마 시대도 아니고, 이곳에 대농장을 거느린 이들은 없다. 사람은 적고 황무지는 넓게 펼쳐진 시대다. 이들 밑에 노예가 아무리 많다 한들 수십 명 정도다.
그래도 이들은 각 씨족의 지도자다. 이들이 먼저 움직인다면 다른 농민들도 따라주리라.
아무튼 내가 대안을 내놓으니 이곳에 모여있는 이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진다. 끔찍한 고난과 기근만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출구 전략이 있다는 말이니까.
그들은 기근에 시달려 도시가 무너지고 혼란만이 남은 세계를 굳이 어렵게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하투샤만 보더라도 그리 되었다.
형편이 가장 어려운 곳에서는 식인 행위가 벌어진다는 말도 있었다. 그들은 그런 나락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런 그들에게 안도감만을 심어줄 수는 없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전만큼 충분한 식량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오.”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드넓은 밀밭에서 나올 소출이 조금 줄어들 테니. 허나 말씀해주신 바대로 감자를 키우고 보전한다면···”
“‘조금’ 줄어드는 정도로 생각하지 마시오. 그대들 중 이 추위를 예견한 이가 있었소?”
“···.”
“···.”
“그렇다면 어떻게 이보다 더 추워지리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소?”
잠깐의 이상기후라면 그럴 수 있다.
21세기에도 아랍에 극한의 한파가 몰아닥친 적이 있었다. 2013년 겨울에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눈이 쌓이고, 시리아에 폭풍이 불며, 레바논의 낙타들이 눈밭을 걸어다녔다.
해봐야 5일 동안의 한파였다.
하지만 지금은 벌써 첫 눈이 내린 지 열흘도 더 지났다. 의외로 저 남쪽 아이깁토스에서는 더 빠르게 내렸다 한다.
사람들은 이미 이번 겨울이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재앙이 되리라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이 오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두려워서 외면한다기보다는, 그냥 이보다 더 추운 날씨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데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강설량은 얼마나 춥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눈은 얼어붙은 빗방울이지.”
결국 구름 속 얼음 알갱이가 제 무게를 못 견디고 떨어질 때 따뜻하게 녹아내리면 비가 되고, 그대로 내린다면 눈이니까.
얼마나 습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겨울의 트로이아는 원래 비가 자주 내린다.
즉, 언제 폭설이 내려올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꼽아본다. 드넓은 농장들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 그 다음으로 다뤄야 할 것은···
“일단은··· 제설과 제빙 작업부터 하도록 하겠소. 특히 공동주택들은 천정이 평평하니 그곳에 눈이 쌓일 것이오.
건물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람을 차출해 눈을 치워버리고 눈이 미끄러지도록 비스듬한 사면을 설치해야 하오.”
건축, 도로, 시설물 관리 등등.
이것들을 맡을 사람이 따로 있다.
“조영관?”
나의 부름에 아노이토스가 앞으로 걸어나온다.
“주군, 가도의 관리가 걱정입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역시, 10년 넘게 이런 일로 부려먹었더니 원하는 질문부터 척척 나온다.
“얼음이 생길 만한 곳에는 모두 모래와 소금을 섞어 뿌리도록 하게. 치우는 건 지금처럼 하되 눈이 더 많이 내리면 그때 체계를 잡지.”
“···.”
“···.”
“스클레오스? 자네는 여러 공방에 전달해서 케브렌 강과 연결된 수차들 주위의 얼음을 깨도록 명령해놓게. 그러다 물에 빠지는 이들이 반드시 있을 테니 동상에 걸린 이들이 어떻게 해야할지 일러주게.”
나는 거기까지 말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원래 이 지역에서 몇이나 되는 이들이 동상에 시달려봤을지, 몇이나 동상에 대처해봤을지 생각했다.
“···아니, 내가 처치법을 알려주지.”
“알겠습니다, 주군.”
거기까지 들은 뒤에야 스클레오스 역시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가장 중요한 농사일을 관리했고.
건물의 붕괴를 예방하며 막힌 도로를 뚫고, 산단까지 관리했으니···
대강 급한 일은 끝냈다.
사실 이쯤 되면 누군가 물어볼 줄 알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냐고 말이다. 싸락눈이 조금 내리고 며칠 추위가 몰아닥친 데 비해 너무 지나친 처사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말에 재개발 조합의 조합장들부터, 원래부터 이 도시의 장로였던 이들, 항해학교의 교수와 여러 공방의 장인과 산단의 관리인들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왜 그러나 생각하다가··· 방금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치우는 건 지금처럼 하되 눈이 더 많이 내리면 그때 체계를 잡지.”
‘눈이 더 많이 내리면’.
아.
나도 모르게 확신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 모인 이들의 눈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눈에 담긴 불안, 안도감, 공포, 긴장···
신뢰감.
저들은 나의 확신을 신뢰했다.
“저··· 파리스 님?”
“왜 그러지?”
“다른 도시들에도 어찌 대응할지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걸세. 트로이아와 다르다노스 정도에 움직이면 괜찮겠지. 곧 사절을 보내고 내가 직접 움직이지.”
“그럼, 다른 도시들에는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