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36)
136화 제3장 물러서지 않을 때(1)
“제 생각에는 수술 전 폐와 심장 관리를 좀 더 철저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믿음의 대답에 양순재는 추가적인 대답을 촉구했다.
수술 중이 아닌 수술 전 환자 관리가 필요하다는 방향성은 옳았다.
하지만 방금 같은 애매모호한 대답으로는 환자의 출혈을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출혈을 막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잘 막아야 한다.’고 대답하는 꼴이었다.
“이걸 대답이라고 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믿음이 망설이면서 입술을 들썩거렸다.
뜸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양순재는 대답이 더욱 궁금해졌다.
폐·식도 파트에서 20년을 넘게 수련해 온 양순재였다.
그런 그조차 처음 경험한 출혈 케이스이자 방금 막 그 원인을 알아낸 케이스 아니던가?
인턴에 불과한 이믿음은 과연 그 케이스의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천재로서의 위용을 보여 줄 수 있을까.
“믿음아, 그만 안달 나게 하렴.”
“알겠습니다. 만약 제가 주치의라면… 호흡기 내과와 순환기 내과에 협진을 요청하겠습니다.”
“…….”
“수술 중에 출혈이 예상되는데 예방해야 할 것이 있냐고 말입니다.”
협진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이믿음은 단순한 설명을 덧붙였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이런 문구처럼 환자 관리에 관련된 섬세한 부분은 내과 쪽에 맡기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대답을 하고서 이믿음은 양순재의 눈치를 봤다.
스스로 말하고도 확신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양순재는 아직 자신의 눈치를 보는 제자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자신과 똑같은 정답에 다다른 제자의 답변이 흡족했다.
‘역시 천재인 건가?’
양순재는 속으로 이믿음에게 감탄했다.
이믿음의 말대로 그 역시 오늘 같은 환자를 다시 수술한다면 수술 전 내과에 협진 요청을 할 것이다.
외과 환자니까 무조건 외과에서 처리해야 해.
…하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울 일은 전혀 아니었다.
심전도 판독, 다양한 약물 치료, 장기적인 환자 관리 등등.
응급 상황이 아닌 환자 관리 측면에서는 내과가 외과를 압도했다.
이런 부분을 인정하고 도움을 받는 일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니?”
양순재는 차분하게 대답의 이유부터 물었다.
“제가 인턴 근무 첫 달에 순환기 내과 근무를 섰습니다.”
“그래서?”
“순환기 내과 선생님들이 환자 관리하는 걸 봤는데, 약물이나 주사제 사용하는 게 외과보다 훨씬 정교했습니다.”
“…….”
“프리 오퍼(Preparation of operation, 수술 전 오더)도 루틴대로 넣지 않고요.”
“그러니까 순환기 내과 근무를 하면서 배웠다?”
“네, 첫째로 수술만큼이나 수술 전 환자 관리가 중요하다는 점, 환자 관리가 필요할 땐 내과에 기대도 좋겠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짝. 짝. 짝. 짝.
이믿음의 똑 부러진 대답에 양순재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
이믿음은 두 가지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순간 스승으로서 느끼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믿음은 모를 것이다.
이런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자신이 흉부외과로 복귀했다는 것을.
이믿음이 언젠가 자신을 밟고 올라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자신의 심정을.
방금 대답을 들어 보니 그 시기는 반드시 올 것 같았다.
그것도 늦지 않게.
“교수님, 제가 맞는 겁니까? 협진 요청이라고 하면 너무 쉽고 성의 없게 대답한 것 같아서…….”
이믿음은 여전히 확신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말이 맞다. 정답이야. 쉽고 성의 없는 대답이 아니라 무척 효율적인 대답이지.”
양순재는 이믿음의 대답이 옳았던 이유를 덧붙였다.
사실 이미 이믿음의 입에서 나온 것들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했을 뿐.
“휴, 헛소리를 한 게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원, 녀석도.”
안도하는 제자의 모습에 양순재는 피식 웃었다.
* * *
“교수님, 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환자의 갑작스런 출혈과 심정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바로 양 교수 자체에 관한 질문이었다.
오늘 오전 컨퍼런스 당시 나는 심한 충격에 휩싸였다.
폐·식도 파트의 대가이자 흉부외과의 최고참인 양 교수였다.
비록 6년을 쉬고 복귀했다지만 받는 대접이 영 좋지 않았다.
양 교수의 후배이지만 과장인 이 과장은 근무 실적으로 양 교수를 몰아붙였다.
진료 시간은 줄이고.
비급여 처치는 늘리고.
검사는 팍팍 하라고 말이다.
-에이 씨, 지금 회진이 문제야? 꼴에 선배라고 과장 말을 개똥으로 알아 쳐듣는데 말이야.
급기야 이 과장은 양 교수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나는 양 교수를 존경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의국 식구들 앞에서 분명하게 천명한 것이다.
이런 치욕스러운 상황을 당한 양 교수 본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무리에서 떨어져 따돌림을 당했던 전생의 나는 그 아픔이 얼마나 깊고 고통스러운지 잘 알았다.
그래서 양 교수의 정신 건강이 염려되었다.
“첫날부터 네 걱정만 끼쳤구나.”
컨퍼런스 때 분위기가 안 좋던데 흉부외과 생활이 정말 괜찮냐고 묻자 양 교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썩 좋은 건 아니란다. 이 과장이 날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으니까.”
“과장님은 오히려 교수님께 절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요?”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화를 못 내고 있는 양 교수를 대신해서 화를 냈다.
이 과장의 행동은 적반하장의 끝판왕이었다.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
양 교수 같은 고급 인력이 합류했으면 고마워하는 것도 모자랐다.
그런데 감히 실적 운운하면서 망신을 줘?
“저는 양 교수님이 더 강하게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과장 같은 사람도 필요하단다.”
“…….”
“병원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도 있어야 병원이 유지가 되지 않겠니?”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둔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교수님, 지금 이 과장의 무례한 행동을 오냐오냐 하실 때가 아닙니다.
따끔하게 혼을 내셔야죠.
저는 전생에서 이미 경험했습니다. 이 과장은 반성과 성찰이라는 단어를 아예 모르고 산다는 걸.
가만히 두면 더 기어오른다고요.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나는 일단 가슴에 눌러 담았다.
환자밖에 모르는 사람.
의국 내 정치 관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사람들의 머릿속으로만 존재하는 성희롱 소문에 혼자 괴로워하다가 은퇴한 사람.
그런 순진한 양 교수가 상대하기에 이 과장은 너무 벅찬 적수였다.
전생의 나 역시 양 교수와 같은 부류였기에 그 마음은 잘 알았다.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양 교수가 푸대접받는 건 괴로웠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늘 일만 해도 그랬다.
내적으로는 이 과장과 윤 교수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한 것에 불과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좀 더 심화된다면 그때는 내가 나서볼 수 있을 것이다.
내겐 전생에 없던 모략가 기질이 있었다.
그런 내가 보좌만 잘한다면 아무리 물렁물렁한 성격의 양 교수라도 충분히 이 과장을 무찌를 수 있었다.
겸사겸사 잘됐네.
강태섭만큼은 아니지만 이 과장도 별로 좋아하진 않았으니까.
전생에서 이 과장과 엉켰던 악연들을 떠올리며 나는 이 과장 척결에 대한 불씨를 가슴에 안았다.
“그나저나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니?”
양 교수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
본인을 화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어떤 생각 말씀이십니까?”
“의대 시절 말이다. 그때 네가 한국에 남지 않고 미국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양 교수는 아직도 내 미국행에 미련이 남은 듯했다.
사제의 힘으로 수술을 멋지게 끝낸 뒤에도 미국행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 말이다.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한국에 남을 겁니다. 백 번이면 백 번 다.”
“그 정도니?”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양 교수.
“네, 안 그랬으면 교수님과 지금처럼 지내지 못했을 텐데요. 그리고 수련 기간을 단축하는 게 그렇게 매력적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회귀를 통해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이었다.
좁게는 내 가족.
넓게는 나를 스쳐 간 의료계의 인연과 환자들.
미국행을 택했다면 수련 기간을 줄이고 좀 더 신식 수술을 배울 수 있었겠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만약 미국으로 간다고 하면.
나중에 단기로 몇 개월 정도 연수를 받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네 생각은 충분히 알았다. 앞으로는 미국행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마.”
“…….”
“슬슬 일어날까?”
양 교수가 먼저 일어나서 휴게실을 나왔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환자와 제자를 위해 복귀한 늙은 의사의 뒷모습은 위대한 것 같으면서 동시에 초라한 것 같기도 했다.
* * *
다음 수술 스케줄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는 상황.
나는 곧바로 흉부외과 병동으로 복귀했다.
“믿음아, 태호 좀 도와줘라. 지금 정신없어 보이던데.”
“네, 선배.”
2년 차 황은우의 부탁에 나는 병실에서 드레싱을 하고 있던 손태호를 찾았다.
손태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스멀스멀 불쾌한 기분이 올라왔다.
악연이란 인연만큼이나 강력한 것이었다.
“바쁘냐?”
“당연하지. 네가 수술방에 있는 동안 병동 환자 처치랑 검사는 내가 다 했는데.”
손태호의 목소리가 날카로웠기에 나 역시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수술방 업무는 날로 먹는 줄 알겠네. 최소한 너는 일하는 도중 화장실이라도 갈 수 있지. 난 아니라고.”
“말싸움하기 싫으니까 스테이션에 가 봐. 간호사가 네가 처치해야 할 환자 알려 줄 테니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손태호를 돕고 싶은 만큼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손태호의 일손이 느려지면 피해는 보는 건 고스란히 환자의 몫이었다.
즉, 손태호가 밉다고 환자를 고통스럽게 한다면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런 미련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태호가 그러는데 처치할 환자가 있다고.”
“네, 811호 박지윤 환자 흉관 제거 오더가 나와서요. 준비는 다 해 놨어요.”
“바로 가시죠.”
김지연 간호사와 나란히 병실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문득 귀를 기울여 보니 누군가가 빠르게 뒤에서 접근 중이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를 들어 보면 환자가 아닌 의사 같았다. 환자들은 슬리퍼를 신고 있어서 이런 묵직한 발소리를 낼 수 없었다.
‘손 선생님 아까는 감사했습니다.’라는 인사 소리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처치를 끝낸 손태호가 내 뒤를 쫓아오는 건가?
아까 못다 한 말이 있어서?
손태호가 접근한다는 사실에 마음의 준비를 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타다다닥.
발소리가 급격하게 빨라졌다.
빠르게 거리를 좁힌 손태호로 추정되는 인물이 내 오른쪽 손목을 꽉 붙들었다.
의도는 알 수 없었으나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하고 있던 터.
나는 왼손으로 상대의 손목을 붙잡으며 측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역시 손태호였다.
“야, 너 뭐하냐?”
“아아아아! 아프니까 손목부터 놓고 말해.”
“그럼 네가 먼저 손목을 놓던가.”
내 말에 내 오른쪽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푸는 손태호.
“두 분, 무슨 일 있으세요?”
나와 손태호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놀란 김지연 간호사가 큰 눈을 깜빡거렸다.
내색을 안 했지만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을 잘못 먹었나, 손태호 녀석은 왜 갑자기 달려와 내 손목을 붙잡았을까.
“아니에요. 별일 아니니까 지연 선생님은 병실에 먼저 가 계세요.”
“아. 네.”
김지연을 먼저 보낸 뒤 손태호에게 들은 이야기는 황당했다.
내 손목에 벌레 같은 것이 있어서 그걸 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난 바빠서 이만.”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대고 사라지는 손태호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붙들린 손목.
손목에 가해졌던 힘의 방향.
모든 것을 고려하자 손태호의 의도가 뚜렷하게 보였다.
하… 이 새끼가 진짜 쳐 돌았나?
나는 오랜만에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는 경험을 했다.
손태호는 내 손목을 붙잡아 김지연 간호사의 엉덩이를 만지게 할 작정이었다.
왜냐고?
내가 미우니까.
나를 성희롱 인턴으로 몰아서 땅끝까지 추락시키고 싶었으니까.
손태호를 향한 적개심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가운데
나는 일단 처치부터 마무리하기로 했다.
쓰레기 같은 놈.
곧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