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38)
138화 제3장 물러서지 않을 때(3)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나는 결국 환자에 대해 떠올리는 것을 포기했다.
흉부외과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전생의 초반부.
나는 진작 폐급으로 찍혀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 앞가림조차 잘 못하던 때라 인상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곤 했다.
따라서 환자가 왜 응급실을 두 번이나 찾았는지.
두 번째에는 왜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비록 그 원인은 몰랐지만 앞으로 닥칠 일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비가 온다는 걸 알고 있으면.
미리 우산을 준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에코(초음파)를 해 보면 좋지 않을까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내가 한마디 했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 황은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설마 내가 그 정도도 생각 못했을까 봐? 당연히 에코 찍으려고 했지. 그런데 환자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
“아니요.”
“검사비 얼마 나오냐고 계속 묻더니 너무 비싸다는 거야. 그냥 약이나 지어 달래. 그거 먹고 자겠다고.”
황은우의 설명에 내 가슴은 타들어 갔다.
전생에서 어떤 식으로 일이 커졌는지 이제야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환자에게는 심상치 않은 심질환이 존재한다.
기존 검사상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상위 단계의 검사인 초음파를 진행하려고 하지만.
환자는 진료비가 부담스럽다며 초음파를 거절한다.
귀가한 환자는 병세가 악화되어 다시 응급실을 찾지만 결국 목숨을 잃는다」
전생에서 응급의학과 근무를 섰을 때.
나는 우연치 않게 비슷한 케이스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제가 가서 설득하고 올까요?”
“됐다. 너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아? 말을 잘한다고 해서 진료비를 깎아 줄 순 없잖아?”
“…….”
“아니면 네 돈으로 검사비 내 주게? 아서라. 그런 식으로 일 처리하면 넌 백 퍼센트 마이너스 통장이야.”
내가 직접 응급실로 내려가겠다고 말했더니 황은우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돈 타령을 하며 검사를 거절하는 환자에게 진저리가 난 모양이었다.
검사비가 왜 이렇게 비싸요?
다른 대학병원은 안 그러는데 왜 이 병원만 비싸요?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 보면 진료비에 불만을 가진 환자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물론 환자들의 불만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이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쓸데없는 검사와 처방을 넣는 경우도 많으니까.
이런 불만이 증폭되면 환자는 병원비에 지나치게 민감해진다.
급기야 병원이 자신을 등 쳐 먹으려고 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지금 응급실에 있는 흉부외과 환자가 딱 그런 케이스일 것이다.
“그럼 이 환자 어떻게 처방하실 거예요?”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혀 밑에서 녹여 먹는)이나 주고 끝내야지, 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선배?”
“글쎄, 지금 상황에서는 나도 딱히 해 줄 게 없어 보인다.”
황은우의 의견에 허성호가 동의했다.
결국 응급상황이 닥쳤을 때 먹는 경구약을 처방하고 환자를 돌려보내자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에게 닥칠 재앙을 알고 있는 나였다.
두 사람의 의견을 순순히 따를 수는 없었다.
“제가 마지막으로 내려가 볼게요. 초음파 설득이 가능하면 촬영을 하고, 아니면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 처방해서 돌려보낼게요.”
“굳이 사서 고생하네. 네 맘대로 해라.”
“그럼 환자 보고 바로 수술방으로 오던가.”
“네, 선배.”
두 사람의 허락을 얻어 낸 나는 곧바로 당직실을 벗어났다.
어쩌면 오늘은 의술보다 화술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 * *
“안녕하세요. 흉부외과에서 온 의사입니다.”
응급실로 내려간 나는 문제의 환자 앞에 서서 인사를 건넸다.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환자가 그제야 나를 응시했다.
50대 남성, 이름은 고일섭.
얼굴은 까무잡잡했고 피부가 쭈글쭈글해서 외모보다 족히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생산 노동을 하는지 손이 울퉁불퉁하고 흉터가 많았다.
환자와 마주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고일섭을 설득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겠다는 것을.
먼저 진료를 본 황은우가 얼마나 고생했을지를.
“아까 본 의사 선생이 아닌데 누굽니까?”
고일섭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분이 지금 바쁘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병원비 깎아 줄 거 아니면 병원장이 와도 소용없어.”
“당신 왜 그래요. 지금 당신 몸이 중요하지 그깟 돈 몇 푼이 중요해요? 고집 그만 부리고 검사 좀 받아요.”
잠자코 있던 아내로 보이는 보호자가 대화에 껴들었다.
답답해하는 걸 보니 그녀도 참다 참다 이제야 한마디를 꺼낸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냥 약이나 받아서 가면 될 것 같은데 자꾸 쓸데없이 검사를 받으라고 하니까 그렇지.”
고일섭이 버럭 성질을 부리자 보호자가 쓰게 웃었다.
“선생님들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물론 이유가 있겠지. 다들 돈독에 올랐으니까.”
고일섭은 ‘내 말이 맞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제아무리 1살부터 지략과 화술을 키워 왔다고 하지만 과연 내가 고일섭을 설득할 수 있을까.
나조차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려보내자니 다시 만났을 땐 반죽음 상태일 게 뻔해서 그럴 수도 없고.
진퇴양난에 사면초가가 아닐 수 없었다.
“환자분, 저희가 돈독에 오른 게 아니라 다 사정이 있습니다.”
나는 차분하게 설명에 나섰다.
응급실 입장료 개념으로 지불하는 응급의료관리료.
평일 오후 6시 이후.
토요일 오후 1시 이후.
공휴일 진료 시 추가되는 진찰료의 30퍼센트 할증, 처치 및 수술료 50퍼센트 할증 등등.
환자의 응급실 병원비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는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했다.
그럼에도 고일섭은 막무가내였지만.
“그렇게 어려운 말, 난 모르겠어. 복잡하게 이야기하면서 돈을 더 받으려는 속셈 아닌가?”
“아니요, 응급실은 말 그대로 응급한 환자를 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상대적으로 덜 응급한 환자분에게 비용 부담이 더 갈 수밖에 없습니다.”
“…….”
“이렇게 진료비 차등을 두지 않으면 환자분들은 너나 나나 응급실 진료를 보려고 할 겁니다.”
“…….”
“진료 예약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응급실에 가면 되니까요.”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로 설명했으면 알아들을 법도 한데 고일섭은 여전히 고집불통이었다.
고일섭을 구하려다가 내 속이 먼저 터지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 같았다.
“봐 봐, 그러니까 환자 급을 나눠서 돈을 더 받고 덜 받고 한다는 거잖아. 이게 장삿속이 아니면 뭔데?”
“하… 제 이야기를 듣고도 그런 결론이 나올 수 있네요.”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오는 탄식.
이제 나는 고일섭에게 분노를 넘어 황당함과 감탄의 감정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정보를 왜곡할 수가 있단 말인가.
환자에 감정 이입하며 최대한 환자 편에 서려고 하는 나조차 슬슬 힘이 빠지려 하고 있었다.
의사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환자.
의사의 기운을 쏙 빼놓는 환자.
환자의 분류는 이렇게 두 가지로도 가능한데 고일섭은 당연히 후자에 속했다.
그것도 보통 악성이 아니었다.
‘곧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 일정에 마지막 수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허성호가 봐주긴 하겠지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끽해야 10분에서 15분 정도였다.
그만 포기하고 올라가야 하나?
이 환자가 그 환자가, 그러니까 응급실을 두 번 찾았다가 죽는 환자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갈팡질팡하는 사이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도 불상사를 대비해 내 돈 주고 고일섭을 검사시키는 건 어떨까 하는 발상이었다.
고일섭에게 제일 중요한 건 돈이니까 돈을 대주면 검사를 받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섣불리 돈으로 유혹했다간 나를 무시하냐며 오히려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었다.
그거야말로 최악의 전개가 될 수 있었다.
말귀는 못 알아듣고 돈으로 승부를 보기는 힘들고.
궁지에 몰린, 벼랑 끝에 서게 된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최후의 최후의 순간.
결국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내 의술 지식과 솜씨였다.
나만의 알고리즘을 수차례 거치자 다행히도 그럴듯한 답안이 나왔다.
“의사 선생, 왜 말이 없어요? 그래서 진료비를 깎아 줄 겁니까? 말 겁니까?”
“…….”
“…….”
“안 깎아 주면 그냥 가고.”
고일섭의 독촉에 나는 말라붙었던 입술을 뗐다.
“마지막으로 검사 한 번만 더 받으시죠. 그 검사가 끝나면 약 처방하고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내 말은 귓등으로 들었어? 비싼 검사는 안 받는다니까?”
“그러니까 저렴한 검사로 해 드릴게요. 아까 했던 심전도 검사요. 가슴에 전극 붙였던 검사.”
“…….”
“초음파는 응급실 할증이 붙으면 15만 원도 넘어가는데 심전도 검사는 할증이 붙어도 2만 원이 안 돼요.”
나는 고일섭에게 심전도를 한 번 더 권했다.
앞서 정상이라는 판독 소견이 한 번 나오지 않았느냐.
굳이 심전도를 한 번 더 하는 의미가 있냐라고 누군가는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의미가 있다.
심전도를 하는 방법이 아까와 달라진다면 말이다.
순환기 내과 근무 당시, 김용 교수에게 전수받은 심전도 케이스에 이와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던 걸 나는 가까스로 기억해 냈다.
과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남에게 잘 줄 수 있는 학문은 의술밖에 없었다.
“이것도 상술 아니야? 왜 아까 했던 검사를 또 하라고 하지?”
고일섭은 일관성 있게 나를 의심했다.
“아까와는 다른 방법으로 진행할 거니까요. 저랑 말싸움하시는 것도 지치시죠?
“…….”
“그러니까 심전도 검사 한 번만 더 받고 약 처방도 받고 퇴원하세요.”
“뭐, 2만 원 정도 추가되는 거라면…….”
고일섭이 드디어 고집을 꺾었다.
나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던 충동을 참았다.
이만큼이라도 양보를 얻어 낸 게 어디란 말인가.
지금 받아 낸 양보만으로도 나는 고일섭의 증세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동용 심전도를 침상으로 끌고 온 뒤 나는 고일섭이 엎드려 눕도록 유도했다.
“엎드리라고? 난 이거 한 번 더 엎드려서 받은 적이 없는데?”
“영광인 줄 아세요. 저희 쪽에서도 엄청 드문 일이니까.”
나는 등을 보고 누운 고일섭의 왼쪽 견갑골 아래에 심전도 패치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는 후벽 흉부유도 심전도라는 것이었다.
보통 심전도는 환자가 천장을 똑바로 보고 누운 자세에서 펼친다.
하지만 후벽 흉부유도 심전도는 그 반대였다.
환자는 엎드려 누운 채 심전도를 받게 된다.
심장에는 전벽과 후벽이 존재하는데, 일반적인 심전도는 후벽부에 발생하는 심근 경색이나 허혈 증상을 판독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후벽 흉부유도 심전도를 선택했다.
전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후벽에 문제가 있을 테니까.
혈액 검사상에 troponin과 CK-MB 수치가 높았던 걸 보면 환자에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뭐, 애초에 환자가 순순히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면 쉽게 갈 수 있는 문제긴 했지만 말이다.
“몸에 힘 빼시고 평소처럼 숨 쉬세요.”
전극을 모두 부착한 나는 환자에게 안정을 취하라고 말한 뒤 심전도를 작동시켰다.
판독지가 인쇄되는 짧은 순간이 마치 몇십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지이이잉.
마침내 따끈따끈하게 뽑혀 나오는 판독지.
환자에게 이상이 없길 바라야 할까.
아니면 이상이 있길 바라야 하는 걸까.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손에 쥔 판독지를 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