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44)
144화 제4장 격돌(4)
간사한 손태호를 손봐 주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양 교수에게 녹음 파일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과장이 모종의 인물과 협력해 양 교수를 내쫓으려 한다는 사실을 녹음해 둔 파일 말이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잠깐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을까요?”
컨퍼런스와 오전 회의가 끝난 뒤 나는 양 교수를 붙잡았다.
“암, 그러고말고.”
내 부탁에 양 교수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끔찍한 진실을 깨달을 양 교수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가슴이 아팠다.
이 과장이 양 교수를 미워하는 것과 달리, 양 교수는 이 과장을 미워하지 않았으니까.
병원의 수익을 신경 써야 하는 의사도 필요하다고 금쪽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참혹한 기분을 나는 잘 알았다.
그런데 그 기분을 스승인 양 교수가 느끼게 될 줄이야.
“서 선생이 네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하던걸?”
회의실에 들어와서 먼저 운을 뗀 것은 양 교수였다.
“어제 응급 관상동맥 우회술 제1 보조를 훌륭히 마쳤다고 들었다. 인턴이 퍼스트를 소화하다니…….”
“…….”
“이 사실을 다른 외과의들이 알면 놀라서 까무러칠걸?”
양 교수는 한창 나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흉부외과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보기 좋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가슴은 거북해져만 갔다.
이 과장에 관한 진실을 입 밖으로 낼 타이밍도 놓치게 되었다.
기뻐하는 양 교수에게 초를 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교수님, 저기… 단도직입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화제를 바꿨다.
“왜?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니? 갑자기 표정이 무섭게 변했구나.”
“네, 심각한 일을 알게 돼서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일단 이걸 들어 주세요.”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을 가운에서 꺼낸 뒤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3달 뒤에 인사고과 있는 거 알지? 내가 그 양반 점수를 완전히 뭉개 놨다고. 진료부원장님 뵐 때마다 슬쩍슬쩍 양념도 쳐 놨지.
정적이 흐르는 회의실에 이 과장의 사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녹음 파일을 듣는 양 교수의 얼굴은 차차 굳어졌다.
파일에서 언급하는 그 양반이 양 교수 본인이라는 걸 알아챈 듯했다.
양 교수가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일부러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인사고과에서 밑바닥을 기는 양 교수를 어떻게 구제할 것인지.
또 이 과장에게는 어떻게 한 방을 먹일 것인지를.
“허허…….”
녹음 파일이 종료되자 양 교수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들어 슬쩍 훔쳐본 양 교수의 얼굴은 넋이 나가 있었다.
후배이자 과장인 이 과장이 자신을 쫓아낼 흑심을 품었다는 걸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어제 회의실에서 우연히 통화를 엿들었습니다. 내용이 심상치 않아서 녹음을 해 두었고요.”
“…….”
“교수님.”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파일을 들으셨으니 지금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셨을 겁니다.”
“이쯤 되면 이해하기 싫어도 이해할 수밖에…….”
“이대로 가다간 올 하반기에 교수님께 퇴직 권고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지방 분원으로 인사 발령이 나는 것 피하지 못할 것 같고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단다. 하지만 이쯤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싶구나.”
양 교수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과장이 인사고과를 깎아 놓고 진료부원장님까지 삶아 놨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덧붙였다.
물론 양 교수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이 과장은 오래전부터 공들여 양 교수를 위한 함정을 파 놓았다.
양 교수는 그 함정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제아무리 낙천적으로 상황을 보려고 해도 상황은 깜깜해 보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회귀한 흉부외과의인 나는 남들보다 돋보일 수 있는 몇 가지 수술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 그거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미래에 각광받을 수술을 현시점으로 가져온다.
그러니까 양 교수가 신수술을 개발하게 만든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양 교수 구제법이었다.
신수술법으로 흉부외과계에 파장을 일으킨다면 바닥을 친 인사고과 따위는 단번에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교수님께도 아직 비장의 무기는 남아 있습니다. 과장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는.”
“정말 그런 게 있을까?”
“네, 남은 기간 동안 흉강경 폐암 수술을 완성하시는 겁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비장의 카드를 언급했다.
* * *
흉강경 폐암 수술.
이것은 먼 훗날 최초 침습 수술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기존 폐암 수술은 보통 후측방 개흉술로 진행하는데, 이때 환자의 몸에 부득이하게 15~20센티가량의 절개창과 흉터가 생긴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흉강경 폐암 수술이 개발되었다.
흉강경 폐암 수술의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수술 부위에 2센티 크기의 절개창을 2, 3개 정도 만들어 놓는다.
그 절개창으로 수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수술 카메라와 수술 도구를 삽입한다.
이후 기존 수술과 똑같이 종양 조직을 제거한다.
즉, 흉강경 폐암 수술은 기존 수술에 비해 절개창의 크기와 범위가 10배 가까이 줄어드는 것이다.
환자에게 흉터가 크게 남지 않는다는 점.
수술 후 통증 조절 및 회복 기간 단축이 가능하다는 점 등등.
흉강경 폐암 수술은 훗날 폐암 1기 수술의 대세로 자리 잡는다.
“내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걸 용케 알고 있구나.”
양 교수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국 같은 서구권에서 이제 막 대세로 떠오른 수술인데 말이구나.”
“저도 꾸준히 해외 논문을 공부 중입니다.”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어쨌거나 흉강경 폐암 수술은 양 교수의 말 그대로였다.
2005년도인 현시점에서는 해외의 흉부외과, 특히 미국에서 많이 이뤄지는 수술이었다.
한국에서는 걸음마도 떼지 않은 단계였다.
그러니까 양 교수가 흉강경 폐암 수술을 완성한다면 말이다.
이 과장이 몰아세운 낭떠러지에서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것만이 양 교수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동시에 이 과장의 콧대마저 찍어 누를 수 있는.
“그럼 믿음이 너도 잘 알겠구나. 흉강경 폐암 수술이 만만치 않다는 걸.”
“…….”
“흉강경 수술은 일반 개흉술에 비해 시야가 좁고 출혈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기도 힘들단다.”
“…….”
“아직 대중적으로 퍼지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양 교수는 흉강경 폐암 수술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양 교수의 판단을 나는 존중하고 이해했다.
수술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새로운 기술은 저항을 받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양 교수를 이해하는 것과 설득을 포기하는 일은 다른 영역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수술을 해야 인정을 받지 않겠습니까?”
“…….”
“그래야 과장님이 파 놓은 함정을 극복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저를 이끌어 주고 싶은 마음에 은퇴를 번복하고 의국으로 복귀한 교수님입니다.”
“…….”
“그런 교수님이 정치질의 희생양이 되어 내팽개쳐지는 것을 저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
“그래서 교수님이 흉강경 폐암 수술을 완성하셔서 과장님께 비수를 꽂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격정적인 목소리로 양 교수에게 진심을 전했다.
동료를 존중하고 환자에게 헌신하는 의사는 왜 맨날 당해야만 하는가.
왜 맨날 단물만 쪽쪽 빨리고 버림을 받아야만 하는가.
왜 맨날 진급은 늦어지고 힘든 수술만 전담해야 하는가.
굿 닥터들의 말년에 숙명처럼 찾아오는 먹구름.
그 먹구름을 나는 시원하게 걷어 내고 싶었다.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의 이치를 실현해 보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주제넘은 이야기를…….”
나는 양 교수의 표정을 살피며 달아오른 감정을 억눌렀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 사건의 당사자는 양 교수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결론 역시 양 교수에게 맡길 일이었다.
다만 나는 양 교수가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못된 후배에게 본때를 보여 주길 바랄 뿐이었다.
“괜찮다. 다 나를 생각하는 말이었으니까. 또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양 교수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흉강경 폐암 수술을 소화할 수만 있다면 이 난관을 타개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겠지만.”
양 교수의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에 머물렀다.
수술을 소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세어 보는 것이리라.
3개월 안으로 미국에서 유행 중인 수술을 따라잡는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양 교수는 경험 많고 노련한 외과의였다.
그의 곁에는 전생에서 각종 신수술을 섭렵하고 돌아온 내가 있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친다면 그 시너지는 곱절로 발휘되지 않을까.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몰라.’
나는 현 상황을 전화위복으로 삼기로 했다.
이번 사건으로 양 교수의 영향력을 키우고, 더 나아가서 양 교수를 과장으로 앉힌다면 흉부외과 분위기는 180도 달라질 것이다.
내가 바라는 쪽으로.
“믿음아.”
양 교수가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그윽한 목소리를 나를 불렀다.
“네, 교수님.”
“솔직히 녹음 파일을 듣고 나도 많이 충격을 받았단다. 이 과장이 나를 그 정도로 미워하는지도 몰랐고, 나를 내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몰랐으니까.”
“…….”
“하지만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녀석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양 교수는 괴로워 보였다.
지금까지 의국에 헌신한 스스로가 한심해 보이고.
친한 후배를 향해 쓰디쓴 배신감을 느끼며.
벼랑까지 몰린 상황에 비참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전생에 내가 강태섭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양 교수가 그런 감정들에 마냥 파묻히지 않기를 바랐다.
꿋꿋하게 일어서서 그 감정들을 이겨 내고 우뚝 서기를 바랐다.
전생의 나처럼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누구에게나 비극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나도 네 말대로 흉강경 폐암 수술에 도전해 보고는 싶구나. 수술에 성공해서 이 과장에게 멋지게 복수를 하고 싶구나. 하지만.”
“…….”
“아무리 나라도 흉강경 수술은 자신이 없단다. 은퇴할 나이에 고난이도의 신수술을 소화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양 교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양 교수의 제자가 된 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내겐 안타깝고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의대에 다닐 때부터 양 교수가 힘들어하는 나를 일으켜 왔으니 이젠 내가 양 교수를 일으킬 차례였다.
“아닙니다. 교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차분하게 양 교수를 다독였다.
“지금도 6시간 가까이 걸리는 3기 폐암 수술까지 거뜬히 해내시지 않습니까?”
“…….”
“체력적으로 보나 기술적으로 보나 양 교수님이 못해 내는 게 더 이상합니다.
“…….”
“무엇보다 흉강경 폐암 수술이 실패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이유?”
“네, 교수님 곁에는 천재인 제가 있으니까요. 제가 있는 한 흉강경 수술은 실패할 리 없습니다.”
내가 진심 백 퍼센트로 던진 말에 양 교수가 껄껄 웃었다.
그의 밑에서 수련받던 초창기 때나 들을 수 있었던 호탕한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래, 나 혼자라면 힘들지 몰라도 네가 도와준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구나.”
“…….”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네 신세를 좀 져야겠구나.”
“얼마든지 부탁드립니다.”
나와 양 교수는 드디어 같은 곳을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