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238)
238화 제3장 금의환향 (3)
창문을 열고 커튼을 걷어 내자 싱그러운 봄 햇살이 쏟아졌다.
전등을 켜지 않았음에도 기숙사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나는 창가에 선 채 아침 일광욕을 즐겼다. 살갗에 닿은 햇볕의 온기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오늘의 나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바로 오늘이 근 3년 6개월의 기나긴 해외 근무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볼티모어 공항에 첫발을 내디뎠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귀국이라니…….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잘해 줬다, 믿음아.’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나는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겼다.
먼 이국땅에서 전혀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회귀가 주는 예지의 이점을 살릴 수도 없었음에도, 나는 고군분투하며 목표를 이뤄 냈다.
심장 파트와 폐·식도 파트의 펠로우 과정을 마쳤으며 신수술까지 성공적으로 선보였다.
출국할 때 세웠던 목표를 전부 손에 넣은 것이다.
추억에 잠겨 있던 나는 곧 씻고 복장을 갖춘 뒤 1층 기숙사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는 토스트, 스크램블드에그, 소시지, 옥수수 스프.
전형적인 미국식 아침이었다.
느끼하고 무거운 이 식단과도 드디어 이별할 수 있게 됐구나.
나는 식사를 하면서도 식사를 생각했다. 귀국해서 제일 먼저 먹을 맛깔나는 한식을.
“좋은 아침.”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안드레가 식판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나도 살갑게 안드레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리의 마지막 근무일이지?”
“맞아.”
“시간 참 빨리도 흘러간다. 벌써 작별이라니…….”
안드레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제임스 홉킨스에 남을 생각은 없어? 네가 잔류하면 흉부외과 스태프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전혀.”
“한국 흉부외과는 근무 환경도 열악하다며? 그럼 굳이 복귀해서 고생할 필요 없잖아?”
안드레의 말에 반박할 논리를 찾아보았지만 분하게도 찾을 수 없었다.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다 근무해 본 결과 근무 환경은 미국의 압승이었다.
우선 연봉 차이가 극심했다.
한국 흉부외과 전문의 연봉을 높게 잡아서 1억이라고 하면 미국은 6억이었다.
한국에서 6년 일해야 버는 돈을 미국에서는 1년 만에 벌 수 있는 것이다.
근무 시간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미국은 정규 근무 시간이 끝나면 칼퇴였다.
설령 응급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퇴근 후에도 콜을 받으면 병원으로 뛰쳐 나가야 하는 한국과는 대조적인 부분이었다.
수술 건수의 차이도 존재했다.
미국에서 나는 하루 1건에서 많으면 2건 정도 수술을 했다.
반면 한국의 하루 평균 수술 건수는 3-4건이었다.
직급과 서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도 미국 의사 문화의 장점 중 하나였고.
‘그러고 보니 나은 게 하나도 없네.’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미국 생활도 적응했고 능력도 인정받았는데 돌아가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
“안드레.”
“왜?”
“혹시 누구한테 부탁이라도 받았니? 내가 흉부외과에 남도록 설득해 달라고?”
“그런 건 없어. 단지 네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야.”
안드레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안드레는 고마운 친구였다.
내가 연수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 보모처럼 돌봐 주었으니까.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왜 안드레는 다른 연수생 가이드와 달리 유독 친절한 걸까.
내가 그 이유를 직접 묻자 안드레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2년 전쯤에 연수생 한 명이 기숙사에서 자살했어. 내가 가이드를 맡았던 중국 의사였지.”
“…….”
“예전만 해도 나 역시 연수생에 무관심했어. 르브론 패거리가 중국 의사를 따돌릴 때 방관하기만 했고.”
안드레는 고통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방치 속에서 타국의 의사가 자살했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난 변했어. 내가 가진 역할에 중요성을 깨닫고 연수생들을 챙겨 주기 시작했지.”
안드레의 고백이 끝났음에도 나는 침묵을 지켰다.
안드레가 힘겹게 내보인 상처를 보듬어 줄 말을 찾지 못해서.
어설픈 위로를 할 바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 듯했다.
“밥맛 떨어지게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나?”
안드레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내가 먼저 물어본 건데.”
“오늘 수술 스케줄은 어떻게 돼?”
“오전에 싱글 포트 흉강경 수술 있고. 오후에는 로봇 수술.”
“힘들겠네.”
“나한테 그 정도면 천국이야.”
식사를 마친 나는 병원 본관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안드레와 헤어진 후 6층에 위치한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귀국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익숙했던 병동이 새삼 낯설게만 느껴졌다. 마치 오늘 처음 병동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테이션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간호사들의 모습도.
한국과는 달리 넉넉하게 비어 있는 병실의 모습도.
[제임스 홉킨스에 남는 게 어때?]회의실로 향하던 도중, 문득 안드레가 내게 던졌던 질문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나는 다시 한번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 *
오전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난 후 흉부외과 과장 스티브가 나를 불렀다.
스티브는 미국인답게 말을 질질 끌거나 완곡하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제임스 홉킨스에 남아 주길 바란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연봉을 1.5배 올려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제안은 고맙지만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스티브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내 선택도 존중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제임스 홉킨스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스티브와의 면담을 끝낸 후 나는 곧바로 수술실을 찾았다.
오늘의 첫 번째 수술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환자는 폐암 2기였으며 좌측 폐 상엽에 3센티미터 크기의 종양이 존재했다.
수술 방법은 흉강경으로 종양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 교수와 함께 완성했던 흉강경 폐 절제술과 오늘 내가 펼칠 흉강경 폐 절제술은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오늘 펼칠 수술은 전생의 내가 완성한 신수술이었다.
이름하여 싱글 포트 흉강경 폐 절제술.
흉강경 수술을 하면 환자의 몸에 보통 3개의 절개창을 뚫는다.
내시경 카메라가 들어갈 절개창 하나.
수술 도구가 들어가야 하는 절개창 두 개.
하지만 싱글 포트 수술은 말 그대로 단 하나의 절개창만을 이용한다.
절개창의 숫자가 적으므로 환자에게 흉터가 남지 않으며 회복도 빨랐다.
전생에서 강태섭에게 도둑맞았던 신수술은 이제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수술 이름 앞에 Lee’s’라는 내 성이 떡하니 붙었으니 말 다 했다.
벅. 벅. 벅. 벅.
나는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하며 귀국 후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당분간은 푹 쉬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낼 테고.
그 이후부터 근무할 병원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신원 대학교 병원, 서울 본원.
신원 대학교 병원, 용인 분원.
신원 대학교 병원, 부산 분원.
근무지는 세 곳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내가 가야 할 곳은 명확해 보였다.
운명의 격전지는 바로 부산이었다. 전생의 원수 강태섭이 흉부외과 과장으로 있는.
강태섭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벌써부터 피가 뜨거웠다.
“리, 컨디션은 어때?”
스크럽이 끝날 때쯤, 동료 제임스가 곁에 서서 말을 걸었다.
“컨디션이야 항상 최고지.”
“그거 다행이네. 사실 말이야, 칼슨 대학교 병원 흉부외과의들이 아까 급하게 연락을 했어.”
“뭐라고 하던데?”
“리의 싱글 포트 폐 절제술을 참관하고 싶다고 하던데 참관 허용해도 괜찮겠어?”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물었다.
‘갑작스러운 참관이라.’
보는 눈이 생기면 아무래도 부담… 스러울 리는 없었다.
나는 기꺼이 참관을 허락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변한 부분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환자가 위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딱히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쟤는 뭔데 저렇게 나대?
자기만 잘난 줄 아나?
어휴, 꼴 보기 싫어.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나섰다가는 직·간접으로 이런 반응이 나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일까.
제임스 홉킨스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이른바 관종이 되어 버렸다.
“정말 괜찮아? 예정에 없던 참관이라 부담스러울 텐데.”
오히려 제임스가 나를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평소대로 하면 그만이야. 문제없어.”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참관하러 오는 사람 중에 러셀 과장이 있어. 그 사람 엄청 깐깐하다고.”
제임스가 러셀의 불순한 참관 의도를 설명했다.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러셀은 신수술 브레이커라고 했다.
어떤 외과의가 신수술을 개발하면 참관하고 나서 그 신수술을 엄청나게 헐뜯고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러셀 때문에 상용화되지 못한 신수술이 무려 열 손가락을 넘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러셀의 참관이 오히려 반가워 미칠 지경이었다.
“차라리 잘됐네.”
“제정신이야? 적을 집 안에 들이는 꼴이라고.”
“제임스, 발상을 조금만 바꿔 봐. 그 까칠한 러셀이 내 신수술을 참관하고도 아무 말 못 한다면 말이야.”
“…….”
“싱글 포트 흉강경 수술이 모든 주에서 인정받는 거 아니겠어?”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싱글 포트 흉강경 수술을 성공적으로 발표했지만 나는 여전히 심한 갈증을 앓고 있었다.
신수술이 좀처럼 다른 병원으로 퍼지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러셀의 참관은 차라리 호재였다.
“휴, 넌 진짜 못 말린다. 마지막 근무일은 무난하게 보내도 될 텐데.”
“내 삶은 예전부터 굴곡이 심했어.”
“네가 일부러 굴곡이 심한 길만 택한 건 아니고? 어쨌든 잘해 봐.”
제임스는 체념하는 기색으로 내 뜻을 받아들였다.
제임스가 떠난 후 나는 수술 복장을 갖추고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나를 반겨 준 것은 알싸한 소독약 냄새였다.
살갗에 닿는 공기는 차가웠다.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수술 도구를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달그락달그락 쇳소리가 경쾌했다.
“아직 멀었어?”
“리, 미안. 흉강경 싱글 포트 수술 준비는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3년 차 레지던트 존이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했다.
레지던트와 간호사가 수술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2층에 위치한 참관용 수술방을 올려다보았다.
칼슨 병원의 흉부외과들이 이제 막 참관용 수술방에 입장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자리 중앙에 앉은 중년 사내가 러셀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내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팔짱을 끼고 수술방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그 잘난 실력을 구경 한번 해 보자’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리, 수술 준비 끝났어.”
제임스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집도의 자리에 섰다.
고별 수술에 친히 손님이 행차하셨으니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 줘야겠지?
나는 가볍게 손목을 풀며 말했다.
“지금부터 우측 폐 우상엽에 위치한 2스테이지 폐암에 대한 흉강경 싱글 포트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 10번 블레이드.”
간호사가 건넨 메스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일단 시작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