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45)
45화 제4장 매듭 (5)
“참 나, 학생이 뭐라고 나서는 거예요? 듣자 하니 지금 쓰러진 환자가 크게 발작을 일으켰다고 하던데.”
119 대원이 불같이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이상한 고집 부리지 말고 당장 비켜요!”
119 대원은 최후통첩을 했다는 듯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힘으로 나를 밀쳐 내려고 했지만, 힘에서 밀릴 내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119 대원의 접근을 힘으로 저지해 버렸다.
주변에서는 그런 나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 또는 치료를 방해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누가 뭐래도 이 상황에서 악당은 나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쓰러진 학생을 내가 필사적으로 119에 이송시키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뇌전증(간질) 환자에게 간질은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떼어 낼 수도, 떼어 내기도 힘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작 단계를 잘 넘어간 환자는 그 뒤로 멀쩡하게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처음에 쓰러지는 학생을 내가 잡아 주었으니 두부 외상의 위험도 없는 상태였고.
만일 쓰러진 거구의 학생이 119에 실려 간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학생은 수능을, 즉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치고 만다.
학교에서 적당히 쉬면서 의식을 회복하면 충분히 수능을 치를 수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쓰러진 학생이 무사히 수능을 치르길 바랐다.
또한 저 학생도 의식은 없으나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확신했다.
“상황이 급박해서 말을 못 했는데 제가 이 친구의 친구입니다.”
나는 즉석에서 하얀 거짓말을 지어냈다.
1살 때부터 지금까지 익혀 온 화려한 언변과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요즘 나의 혀는 메스만큼이나 날카롭고 매끄러웠다.
-수술실의 외과의는 메스가 무기이고, 수술실 밖의 외과의는 혀가 무기다.
놀랍게도 내게 이런 조언을 해 주었던 것은 불구대천의 원수 강태섭이었다.
그리고 회귀를 하면서 나는 내가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강태섭이 사용하던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게 되었다.
“친구요?”
“네, 고등학교 친구입니다. 이 친구 간질을 앓고 있어요. 학교에서도 종종 쓰러지곤 했거든요.”
내가 쓰러진 학생과의 관계와 쓰러진 이유를 설명하자 구급 대원 및 감독관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나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발작을 일으켜도 잠깐 쉬면 금방 괜찮아지더라고요. 병원에 실려 갈 만큼 응급한 질환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참고로 친구가 쓰러지기 직전에 제가 붙잡았거든요. 머리를 어디에 부딪친 것도 아닙니다. 외상 걱정도 안 하셔도 됩니다.”
사정 설명을 하고서 나는 일부러 쓰러진 학생과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119 대원들이 진찰을 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에 119 대원이 쓰러진 학생에게 다가가 활력징후를 확인하고, 학생이 의식을 차리도록 가볍게 흔들어 보기도 했다.
진료를 끝낸 119 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이 없을 뿐, 쓰러진 학생이 무사하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이 학생,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일단 양호실에서 잠깐 쉬게 하죠. 저희도 이 학생이 의식을 차리는 걸 확인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그건 좋은데… 이 학생이 수능 도중에 또 발작을 일으키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감독관은 치아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우려를 표했다.
“빈 교실 없나요? 빈 교실이나 따로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시험을 보게 하면 좋겠네요. 그럼 다른 학생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테니까요.”
“으음…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보죠.”
잠시 후 119 대원들이 들것에 쓰러진 학생을 싣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감독관도 바삐 119 대원들의 뒤를 따랐다.
그제야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던 교실의 분위기가 녹아내렸다.
학생들은 다시 교재를 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계획대로 지휘했던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의 저 학생은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했을까.
발작으로 쓰러진 것도 가슴 아프거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작 자신은 병원에 이송되어 수능을 보지도 못하게 되었다면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의사 노릇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넓게 정의하자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의사나 다름없었다.
위이이이잉.
창가에 서 있던 나는 앰뷸런스가 학교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앰뷸런스는 쓰러진 학생을 싣지 않고 외롭게 떠나는 중이었다.
아마 그 학생은 정상적으로 수능을 치를 수 있는 모양이다.
* * *
전생에 벌어졌던 안타까운 비극을 막아 낸 나는 순조롭게 수능을 치렀다.
전생과 현생에서 평소 공부하던 가닥이 있었기에 수능은 딱히 어렵지 않았다.
다만 기왕 수능을 다시 치르는 김에 전 과목 만점을 받겠다는 각오를 했다.
회귀를 했으면 그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1, 2교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찾아온 점심시간.
야외에서 곽도안, 박정훈과 챙겨 온 도시락을 먹는데 낯익은 얼굴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수능 시험 40분 전에 발작으로 쓰러졌던 덩치 큰 학생이었다.
“저기요. 아까 저를 구해 주셨다면서요?”
학생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게 말을 걸었다.
“아, 네. 몸은 좀 괜찮으세요?”
“1교시 초반에는 살짝 멍하긴 했는데, 그다음부터는 멀쩡했어요. 덕분에요.”
학생이 건강을 회복하고 수능도 무사히 치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학생을 지키기 위한 내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내게 받은 도움을 저 학생도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도움과 도움이 널리 퍼져 나가면 세상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아지고 보다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잠깐 그런 낭만적인 생각도 해 보았다.
한편 우리 둘은 간단하게 통성명을 주고받은 뒤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데 감독관한테 들어 보니까 뭔가 이야기가 복잡하던데요? 그쪽 분이 제 친구라는 말도 했고, 응급처치도 해 주셨다고…….”
강초원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강초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
“119 대원들이 그쪽을 병원으로 데려갈까 봐 그랬어요. 그럼 수능을 못 치르잖아요.”
“와, 거기까지 생각했을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네요.”
“…….”
“게다가 제가 간질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주변에 간질을 앓는 지인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진짜진짜 고맙습니다. 전화번호 좀 알려 주세요. 제가 나중에 연락해서 뭐라도 해 주고 싶네요.”
강초원이 연락처를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내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딱히 보상 같은 것을 바라고 강초원을 도왔던 것은 아닌데 말이다.
아팠던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애초부터 나는 명예나 돈, 권력을 얻기 위해 의사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고생문이 훤한 흉부외과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돈과 명예를 좇는 의사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의사는 엄연히 직업 중 하나이기에 수익과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의사들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잊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이 다루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네가 저 사람을 구했어?”
잠자코 있던 곽도안과 박정훈이 호들갑을 떨며 말을 붙였고, 나는 설렁설렁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회귀를 했음에도 나는 무용담을 늘어놓는 재주는 영 꽝이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난 뒤 수능 2차전이 시작되었다.
강초원이 멀쩡하다는 사실까지 알았기에 문제를 푸는 내 손과 머리는 더욱더 거침이 없었다.
나는 만점을 향해 경주마처럼 질주했다.
지금의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딩동댕동~.
마침내 시험 종료를 알리는 알람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후련한 심정으로 답안지를 제출한 뒤 교실 바깥으로 나왔다.
곽도안, 박정훈과 수능 난이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집에 돌아와서는 부모님과도 대화를 나눴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채점 시간을 가졌다.
수능을 치를 때는 손톱만큼도 긴장을 안 했건만 막상 채점할 때가 되니 살짝 떨렸다.
혹시 답을 밀려 쓴 것은 아닐까 하고.
‘후우, 가자!’
심호흡을 하고 빨간 펜을 손에 쥐었다.
공개된 수능 문제와 답을 출력한 뒤 미리 챙겨 놓은 가채점 답안지와 꼼꼼하게 비교했다.
그런데 막상 채점을 시작하니 손에 들고 있는 빨간 펜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언어 영역을 채점할 때도.
수리 영역을 채점할 때도.
외국어 영역을 채점할 때도.
사회 탐구 영역을 채점할 때도.
왜냐고?
전 과목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귀라는 마술 같은 기회를 얻은 나는 전 과목 만점이라는 기적 같은 성적을 이뤄 냈다.
채점을 끝낸 나는 뱃속 깊은 곳에서 기분 좋은 쾌감이 살랑거리는 것을 느꼈다.
국내 최고의 대학 신원대학교.
그중에서도 최고의 학과인 의과대학의 최정상을 차지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수능은 단지 서전으로 향하는 첫 번째 관문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첫 단추를 잘 꿰었으니 앞으로 남은 단추도 잘 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당장이라도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려 드리고 싶었지만, 일단 꾹 참았다.
가채점 결과보다는 수능 성적표가 더 확실한 증거가 될 테니까.
“자, 이제 출발이야. 네 꿈을~ 네 꿈을 위한 모험~.”
때마침 동생 사랑이가 포켓몬스터 주제가를 부르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형아, 뭐 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왜 놀아 줄까?”
“응. 아빠는 혼자 방에 있고, 엄마는 TV 보고 있어.”
“그럼 놀아 주고말고. 백번이라도.”
기분이 좋았던 나는 사랑이를 번쩍 들어 안은 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꺄아아아아!”
자지러지는 듯한 사랑이의 웃음소리에 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사랑이를 방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사랑이와 함께 포켓몬스터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엄밀히 말해서 나누었다기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들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지만.
사랑이는 며칠 전 어머니를 졸라서 산 몬스터 도감을 펼쳐 놓고 내게 포켓몬스터를 가르쳤다.
강의에 나선 사랑이의 눈빛은 진지했으며, 목소리에는 열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나는 불쑥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사랑이는 과연 커서 무엇이 될까.
어떤 직업을 장래 희망으로 가지고 있을까.
전생에 나는 사랑이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사랑이의 장래를 알지 못한다.
“사랑아.”
“응. 형아.”
“사랑이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나? 으으음…….”
잠시 고민하던 사랑이가 방을 훑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던 걸까.
“엄마, 아빠한테도 아직 말 안 했는데 형아만 알고 있어야 돼?”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포켓몬 마스터가 될 거야.”
사랑이의 당찬 포부에 나는 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과학자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고, 포켓몬 마스터라니!
유쾌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긴 장래 희망을 논하기에 사랑이는 너무 어렸다.
내가 사랑이에게 기대했던 것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어? 형아, 왜 웃어? 나 진지한데.”
눈치 빠른 사랑이가 내 웃음의 의미를 어느 정도 눈치챈 듯해서 나는 웃음기를 쏙 뺐다.
“아니야, 사랑이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래.”
“그렇지? 나 포켓몬 마스터 잘할 것 같지?”
“그럼 물론이고말고.”
사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누가 연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