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50)
50화 제5장 나는 의대생이다 (5)
“넌 첫날부터 엄청 눈에 띄는구나.”
곁에서 숙소 복도를 걷던 남초롱이 한마디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반의 부러움이, 절반의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초롱이 왜 이런 말을 던졌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전생의 남초롱은 오늘 밤 이후로 볼 수 없었던 친구였으니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남초롱을 살리고 싶었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서전으로서.
전생의 나는 수없이 많은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이젠 나를 괴롭혔던 죽음들을 하나하나 다 물리치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앞선 교통사고에 비해, 남초롱을 살리는 일은 비교적 난이도가 낮다는 점이었다.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 데다 교통사고 환자까지 멋있게 치료했으니까 이제 우리 과에서 널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네?”
“아마도?”
“넌 참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세상에 대단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
나는 당차게 선언하듯 말했다.
“응? 그게 무슨 뜻이야?”
“남의 눈에 잘 띄는 사람이 있고, 남의 눈에 덜 띄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해.”
“…….”
“그러니까 대단한 사람은 없어. 애초에 모든 사람이 다 대단하니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걸?”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초롱.
“사실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
“뭐야, 그게.”
내 말에 남초롱이 깔깔깔 웃었다. 먹구름이 끼었던 얼굴에 햇살처럼 미소가 번졌다.
아직 컨디션 회복이 덜 돼서 말이 꼬였지만, 어쨌든 남초롱이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아 참, 나는 널 아는데 넌 날 모르지? 난 남초롱이라고 해.”
“이름도 예쁘네.”
내 칭찬에 남초롱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몸을 배배 꼬았다.
“고마워.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해. 오리엔테이션 시작하면 보자.”
남초롱은 여자 숙소로 향했고, 나는 양순재 교수가 있는 7층으로 향했다.
교수가 묵는 방 앞에 선 나는 심호흡을 하고 해야 할 말들을 정리했다.
의예과 2년을 알차게 보낼 것인지.
맹탕으로 보낼 것인지는 이 문 너머에 있는 양순재 교수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양순재 교수에게 도움을 얻어야 하는 내 혀에 달려 있었다.
똑. 똑. 똑.
나는 손등으로 문을 두드렸다.
“교수님, 이믿음입니다.”
* * *
“금방 왔구나. 거기 앉으렴.”
양 교수가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소파에 앉았고, 양 교수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탐색전이라도 벌이듯 양 교수는 한참 동안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한국의 흉부외과 초창기를 온몸으로 겪어 낸 노장의 눈빛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눈빛이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 엑스레이 같았다.
전생에 나와 양 교수 사이의 접점은 없었다.
본과에 들어가서 딱 한 학기 수업을 들었을 뿐이었으니까.
양 교수가 존경 받는 흉부외과의라는 것도 졸업을 하고 나서야 풍문으로 들었다.
“신입생이라 날 잘 모르겠지? 간단하게 내 소개부터 하마. 내 이름은 양순재이고, 재작년까지 신원대학교 병원 흉부외과 부교수를 하다가 퇴임하고 학교 교수직을 맡았단다.”
“…….”
“정상적이라면 본과 때 보는 게 맞겠지만, 오늘은 우연치 않게 인솔자가 되었지.”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뭐. 영광씩이나.”
양 교수가 헛헛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첫날부터 존재감이 대단하던걸?”
양 교수는 곧바로 교통사고 건을 화제로 올렸다.
다른 동기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내 침착함과 처치 능력 등에 놀랐다고 밝혔다.
의대생이 아니라 마치 노련한 의사를 보는 것 같았다며 나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내 입장에선 웃음이 날 만큼 당연한 말이었다.
실제로 나는 단맛, 쓴맛, 매운맛을 다 본 전직 흉부외과의였으니까.
“믿음이 네가 어떻게 그런 처치를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구나.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말해 줄 수 있겠니?”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나는 직감했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의예과 2년을 보람차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암. 그렇고말고.”
“저는… 천재입니다.”
나는 양 교수의 눈을 쳐다보며 당돌하게 말했다.
어린 시절의 치트키가 ‘난 몰라요’였다면, 앞으로 내가 사용할 치트키는 천재였다.
천재라는 단어는 한 사람의 비정상적인 활약을 이해시키는 데 가장 완벽한 설명이었다.
내가 천재라는데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천재 말고 낮의 내 활약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달리 또 있단 말인가.
“천재라… 전체 수석을 했으면 당연히 머리는 좋겠지. 하지만 머리가 좋은 것과 처치법을 알고 있는 건 별개의 영역이란다.”
양 교수는 여전히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너는 너무 침착했어. 붕대를 감는 솜씨와 부목을 대는 솜씨까지 예사롭지 않았지.”
“…….”
“그건 단순히 책을 본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노련한 흉부외과의답게 양순재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나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흉부외과의였다.
1살 때부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영악한 짓을 해 왔다.
나는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금방 찾아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공부를 하면서 의학 전공 서적을 구입해 따로 공부를 했습니다.”
“…….”
“일단 제가 처음 처치한 환자에 대해 말씀드리면 femoral open fracture(대퇴부 개방성 골절) 환자였고, 저는 환자의 골절 부위를 드레싱한 뒤 붕대를 환행대로 감았습니다.”
“…….”
“이후 무릎에 splint(부목)를 대서 추가 손상을 방지했고요.”
나는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회귀한 나의 무기는 의료 지식뿐만이 아니었다.
메스처럼 날카롭고 봉합술처럼 정교한 화술 또한 나의 무기였다.
“의료 지식 말고 제 처치 방식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병원에서 한 번 본 걸 따라 한 겁니다.”
“하… 한 번 본 걸 따라 했다고?”
휘둥그레지는 양순재의 눈동자.
“네, 어머니가 간호사입니다. 병동과 응급실에 가끔 놀러 갔는데, 그때 본 걸 따라 했을 뿐입니다.”
“…….”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천재라서 그런지 한눈에 쓱 보고 바로 기억이 되더군요.”
설명이 끝나자,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허… 이거 완전히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구나.”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는 양 교수.
하지만 양 교수도 내 말을 믿지 않고는 별도리가 없을 것이다.
내 활약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내 입에서 나온 것뿐이니까.
“제가 교수님 입장이라도 당황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뭐, 네가 천재라는 말 말고는 낮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기는 하지. 그래도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구나.”
양 교수는 내 설명을 어느 정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내 목표는 단순히 양 교수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양 교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가르침이냐 하면, 흉부외과의 폐·식도 파트에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었다.
흉부외과에는 두 가지 펠로우 과정이 있다.
하나는 심장 파트.
다른 하나는 일반 흉부 파트라 불리는 폐·식도 파트였다.
전생의 나는 심장 파트에 매진했으나, 이번 생에서는 폐·식도 파트까지 정복해 보고 싶었다.
안 그래도 인력 부족에 허덕이는 흉부외과 아닌가.
심장과 폐·식도 파트.
양쪽을 능수능란하게 집도할 수 있다면, 환자는 물론이요 동료 서전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지.’
양 교수를 바라보는 나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양 교수는 비록 은퇴했으나 폐·식도 파트의 대가였다.
양 교수의 가르침을 일찍부터 받을 수 있다면 내 성장은 마치 날개를 단 듯 더욱 빨라질 것이다.
“교수님,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래, 말해 보거라.”
“개인적으로 교수님께 흉부외과의 폐·식도 파트에 관련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혹시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믿음아, 네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그건 무리란다.”
양 교수가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분명 내가 주제넘은 제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본과는 기본이고, 인턴과 레지던트까지 끝나야 흉부외과의 폐·식도 관련 질환을 배울 수 있단다.”
“…….”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폐·식도 관련 질환은 무려 펠로우 과정이란다. 앞으로 11년은 더 지난 뒤에야 배울 수 있는 것들이란 말이지.”
“…….”
“이제 막 의예과에 입학한 네가 그걸 어떻게 소화하겠니?”
양 교수는 나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펠로우 과정을 지금 배우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양 교수의 말은 상식적으로 옳았으나, 나는 애초에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존재였다.
나는 무려 4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온 전직 흉부외과 의사니까.
“그럼 혹시 교수님께 테스트라도 받아 볼 수 없을까요?”
“테스트?”
“교수님이 내주시는 문제를 풀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인정할 만한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저도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허… 믿음이 너는 사람을 여러 번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번거로운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유치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흉부외과 서전이 되고 싶습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교수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 뒤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적적으로 찾아온 두 번째 삶.
이번 생에는 나를 거쳐 갔던 그 어떤 환자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더 강해져야 했다.
더 유능해져야 했다.
“…….”
“…….”
한참 동안 이어진 무거운 침묵.
그것을 먼저 깨트린 것은 양 교수였다.
“살다 살다 너처럼 당돌한 아이는 또 처음이구나. 그래, 좋다. 테스트를 하는 것쯤이야 못 할 것도 없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할 것까지는 없어. 나는 단지 기회를 줄 뿐이니까. 단, 테스트 결과가 형편없다면 오늘 네가 말한 부탁은 없었던 일로 해야 할 거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양 교수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후련하게 방을 나왔다.
테스트?
그까짓 거 대충 풀어도 만점일 것이다.
나는 의예과 학생의 탈을 쓴 전직 흉부외과 부교수였으니까.
숙소로 복귀하던 나는 학생들이 우르르 지하 강당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드디어 오리엔테이션의 본 일정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남은 유일한 숙제는 남초롱의 목숨을 살리는 것뿐이었다.
* * *
“교수님,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있었다면서요?”
병리과 교수 최문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양순재에게 물었다.
양순재와 최문희는 1층 홀에 있는 매점 앞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엄청 놀라셨겠어요. 듣자 하니 빗길에 미끄러진 자동차 두 대가 충돌했다고 하던데.”
“뭐. 여차저차 잘 해결했지.”
“혼자서 처치 가능하셨어요? 신입생들이 도움이 됐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믿음이라고 전체 수석으로 들어온 친구가 있어. 그 친구 덕분에 한숨 돌렸지.”
양순재는 사건 당시와 처치를 도운 이믿음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문희의 말대로였다.
신입생만으로는 거의 도움이 안 되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이믿음 덕분에 환자들을 살릴 수 있었다.
만약 현장에 이믿음이 없었다면?
양순재는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전체 수석하고 응급처치법을 아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죠?”
그가 이믿음에게 했던 질문을 최문희가 똑같이 하고 있었다.
양순재는 괜스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능 공부와 의대 전공 공부를 병행했다고 하더군. 또 그 친구의 어머니가 간호사래. 몇 번 병원을 방문했을 때 의사가 처치하는 걸 봤는데…….”
“…….”
“그걸 고스란히 기억하고 따라 했다는 거지.”
“진짜예요? 교수님?”
최문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내가 자네한테 거짓말하면 어디서 떡이라도 떨어지나?”
“그건 아는데, 선뜻 믿기지가 않아서요.”
“나도 자네랑 똑같은 반응이었어. 그런데 본인이 천재고 선행 학습까지 했다고 하니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와! 이번 학번에 엄청난 별종이 들어왔네요.”
“그러게 말이야. 우리 의대에 전무후무한 캐릭터가 될 것 같군.”
양순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에 잠겼다.
조만간 이믿음을 불러서 치르게 할 테스트 문제를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 스스로를 천재로 칭한 당돌한 신입생 이믿음.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있는 주제에 감히 펠로우 과정까지 탐내는 신입생 이믿음.
과연 녀석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궁금했다.
“교수님, 그 학생 이름이 이믿음이라고 했죠?”
“그런데?”
“교수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도 꼭 한 번 보고 싶어서요.”
최문희도 이믿음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