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2)
1002화. 심연으로 (2)
예상했다.
예상은 했지만, 확신은 못 했다.
정확히는, 그 자식이 이 사태에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몹시 크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제 아비에게 협박을 가하기까지 했을 줄은, 천하의 연호정조차도 상상을 못 했다.
‘이치에 어긋나.’
그렇다. 이치에서 벗어난 상황이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허에 찔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창의력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만의 선입견을 품게 되기 마련이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에게도 분명 그런 부분이 있었다.
특히나 회귀 이후 가족과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어떤 가족보다 애틋한 관계를 형성한 지금의 그는 흑암제 시절보다 강해졌을지언정 그때만큼 세상을 의심 어린 눈으로 보진 않았다.
“남궁현.”
연호정의 목소리가 제법 탁해졌다.
“남궁현, 맞지? 첫째가 아니라.”
“…….”
남궁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잔에 또 한 번 술을 따를 뿐.
이미 대답을 했으니, 질문마다 답하지 않았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대답을 강요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놀랍게도 연호정의 예감은 그러했다.
연호정은 말없이 남궁인을 노려보았다.
끈기가 필요했다. 화가 났기 때문에 더더욱 큰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악마의 존재를 믿는가.”
뜬금없는 소리지만, 연호정은 대답했다.
“비유가 아닌 실재를 논한다면, 믿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네. 솔직히, 근 몇 년간 가장 악마 같았던 사람은…….”
남궁인이 술잔으로 연호정을 가리켰다.
“자네였네.”
말을 끝낸 남궁인이 그대로 잔을 비웠다.
연호정이 물었다.
“남궁현은 지금 어디에 있나?”
“질문이 틀렸다네.”
“……그렇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연호정이 다시 물었다.
“머리에 뿔이 달리고 입에서 불을 뿜는 진짜 악마를 봤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
“당신이 본 악마는 어디에 있나?”
남궁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말마따나 나는 악마를 봤네. 악마보다도 더 악마 같은 인간을 봤지. 딱 한 번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 대적할 수 없는 상대라는 걸 깨달았지.”
“…….”
“하면, 그 악마가 내게 어떤 언질을 주었을 것 같은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소리는 했을 것 같군.”
남궁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는 걸세.”
“…….”
“그는 말했네. 자신보다 더 악마 같은 인간이 두 명 있다고.”
“둘?”
“하나는 자신의 아비라고 했네.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사악함으로 무장한 제 아비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
“…….”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인 줄 아나?”
“누구지?”
남궁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바로 자네야.”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 * *
“경치가 좋군.”
청년의 목소리는 참으로 묘했다.
담담하고도 삭막했다. 듣기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분위기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 목소리 속에 드리워진 넘치는 생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른하고 건조하지만, 염세(厭世)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신비로운 생명과 멋들어진 경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생의 수습생과 같았다.
“그림자 속에서 살 때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이 숨을 곳이요, 동화되어야 할 곳이었는데.”
빈말로도 풍부한 어휘력이라 할 순 없지만, 회한과 씁쓸함이 묻어 있는 특유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스님?”
어느새 청년의 뒤에서 한 명의 승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가만히 보면 이립으로, 또 달리 보면 불혹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피부에 주름 하나 없다.
정리되지 않은 수염. 깎은 지 제법 된 듯한 머리에는 짧은 머리카락들이 빽빽하게 솟았다.
계인만 없었다면 어느 산채의 두령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다. 험상궂은 인상이 아닌데도 짧은 머리카락과 거칠게 난 수염 때문에 쉽게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뽐냈다.
하지만 눈빛은 너무나도 깊고 맑다. 조금 바래진 승복은 더럽다기보단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승려가 웃으며 말했다.
“내 마음이 여유로우면 빽빽한 숲도 안락할 것이요, 내 마음이 갑갑하면 광활한 황야조차 좁아 보이기 마련입니다.”
“또 시작이시군요.”
“허허, 그저 그렇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빈승과 시주의 마음은 다르겠지요.”
“하지만 모두의 마음에는 부처가 있다?”
“뵙게 되면 황홀감에 젖어 죽여야 하는 부처가 모두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청년이 피식 웃었다.
웃음조차도, 외양만 보면 참 어색해 보였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이게 무슨 헛소린가 싶었습니다. 부처를 모시는 분께서 부처를 죽이신다니.”
“저희는 부처를 모시지 않습니다. 부처의 경지로 나아가려 할 뿐이지요.”
“그게 그거 아닙니까?”
“빈승 역시 그게 그것인 줄 알았지요. 하지만 다르더군요.”
“정말이지 스님 같은 종교인들의 말은, 아무리 이해해 보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허허허, 다들 그런 소리를 합니다.”
“아마 ‘그’도 저와 같은 마음일 겁니다.”
승려는 청년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승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해할 겁니다. 이해하지 못한 척할 뿐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평가가 후하군요. 하긴, 그럴 만도 하지요.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엄청나게 사납고 꾀가 많은 사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어느새 성천에 이름을 올린 절대 강자가 되었으니.”
“그가 강하기 때문에 후한 평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굴 평가하기엔, 아직 빈승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래도 스님께서는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시지요.”
승려가 미소를 지었다.
청년의 어색한 미소와는 다른,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는 제게 가르침을 주었고, 깨달음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
“본사에는 대단한 학식을 지닌 분들이 많습니다. 깨달음이 높은 분들도 많지요.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언사를 신경 씁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나쁜 길로 빠져들면 안 되니까요.”
말을 하면서도 청년은 자신이 참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나쁜 길이 무엇인가? 청년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야말로 세상 모든 사람이 나쁘다며 손가락질을 할 길이었다.
그는 그조차도 인식하지 못했었다. 아니, 사람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이유는 알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행동을 달리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자신이 나쁜 길을 걸어왔음을.
무림에 몸을 담은 이상 살인은 숙명이라지만, 자신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죄 없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 왔다.
문제가 그것이었다. 이렇다 할 대의도, 아무런 갈등도, 어떠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여 왔다는 것.
청년은 살인 자체가 아니라, 살인으로 넘어가는 선을 정하지 않은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승려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분들 모두가 솔직한 분들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가르침이 모두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담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사내(寺內) 어른들의 가르침이 꼭 맞는 것은 아니라는 말. 승려가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라도 쉽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달랐습니다.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지도 않았지요. 가끔은 정말이지,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격한 언사로 빈승의 정신을 뒤흔들기도 했습니다.”
“그게 스님께는 맞았던 것입니까?”
“빈승에게 맞았던 것인지는 모릅니다. 중요한 건, 그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저에게 보여 주었다는 것이지요.”
“……하긴, 제게도 그랬습니다.”
“그는 제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저를 위하지도 않았지요. 그저 자신의 삶을 보여 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빈승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존재 자체가 저에게는 깨달음이었지요. 아마 사바세계를 떠날 때까지도 그에 대한 고마움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르치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가르쳤다…….”
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국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했던 것이로군요.”
“그에게 배우기 전, 크나큰 좌절을 겪었지요. 자연스레 배움을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배움은 없었지요.”
“…….”
“결국 모든 깨달음은 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어요.”
청년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관한 얘기는 이쯤 하시지요. 계속 듣다 보면 정말이지 찬양하게 될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나저나…….”
청년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꽤 멀리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었다.
무림맹이었다.
헤아리기 어려운 수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성벽이 어찌나 길고 넓은지, 십만 대군이 들이닥쳐도 진입하기 어려울 듯했다.
무시무시한 위용, 그야말로 압권이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하지만 청년의 눈에 무림맹은 단순히 위대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스님도 느끼셨습니까?”
승려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사라졌다.
청년의 옆에 서서 무림맹을 내려다보는 승려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모르겠습니다. ‘죽음’ 그 자체를 이해한 시주의 경지는 빈승으로서는 감히 쳐다도 보기 힘든 곳에 거하고 있습니다. 시주가 느끼는 것을 빈승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봤자 스님 손에 삼십 합이나 버틸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정정당당한 비무라면 그렇겠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우우웅.
승려의 몸에서 은은한 금광이 일었다.
진기의 밀도가 무척이나 높지만, 색이 짙지 않고 투명하기까지 했다.
깨달음의 빛이었다. 그 진기처럼 승려의 마음도 투명할 것이 분명했다.
“공기가 다소 탁하다는 느낌은 듭니다.”
청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람이 엄청 많이 사니까 탁할 수밖에요.”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승려가 물었다.
“시주가 보는 무림맹은 어떻습니까?”
“텁텁합니다. 하지만 어디나 그렇지요. 중요한 건 분위기인데…….”
“…….”
“사악하다는 표현 외에 쓸 만한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승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청년의 예민함이 가히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깨달음의 문제였다.
죽음의 늪을 전전하며, 언제나 그림자 속에서 염왕의 차사처럼 살아왔던 청년은 초절정고수도 얻기 힘든 초월적인 감각을 손에 넣기에 이르렀다.
그런 청년이 사악하다고 말했다. 다름 아닌 백도 정파의 정점이라는 무림맹이.
“어서 가 봐야겠군요.”
“그래야겠지요.”
청년이 발끝으로 땅을 툭툭 쳤다.
“약속은 잊지 마십시오, 범오 스님.”
승려, 범오가 웃으며 말했다.
“시주의 얼굴을 아는 사람 자체가 없습니다. 방장 사형께는 잘 말씀드릴 테니 저를 믿으십시오.”
“좋습니다. 가시지요.”
파아악!
두 사람이 절벽 끝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범오의 신법은 어떠한 흔들림도 없는 신비 그 자체였다. 부동의 명왕상처럼 꼿꼿한데도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간다. 소림 비기 금강부동이었다.
반면 청년의 신법은 은밀하고도 쾌속했다.
그저 그것이 전부였다. 어떠한 특색도 없이 나아간다. 한데, 그 속도가 오히려 범오를 앞서고 있었다.
송곳처럼 뾰족하게 쏘아지는 절정의 신법.
청년의 발끝으로 뜨거운 화기와 차가운 한기가 어우러지며 폭발적인 속도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