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1)
1001화. 심연으로 (1)
쿠르르릉! 쿠르릉!
천둥과 비슷하지만, 천둥보다 훨씬 더 어둡고 깊은 울림을 지닌 소리다.
폭발하듯 울려 퍼지는 굉음에 연호정의 앞을 막아섰던 무사들 대부분이 휘청거리며 땅을 짚었다.
“허억!”
“흡!!”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린 그들의 얼굴에는 본능적인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화아아아악!
뜨거운 공기가 밀려온다. 열탕처럼 끓어오르는 그 공기는 분명한 살기였다.
살기지만, 여느 무사들이 뿜는 살기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어떠한 이유에 기인하여 흘러나오는 살기가 아니라, 이유 없이 죽이고자 하는 원초적인 살기였다.
당연히 사람이 뿜는 살기와는 기질 자체가 다르다. 목적 없는 살기는 그 자체로 파멸을 뜻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죽이고 부수겠다는 의지에 해석 따위는 필요치 않은 법이었다.
‘미친…….’
저도 모르게 연호정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진양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 인간, 갑자기 미친 건가?!’
이런 상황에서 살기를 피워서 그런 게 아니다. 인성을 상실하지 않고서야 이런 무지막지한 살기를 뿜을 수 없기에 미쳤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이 살기를 보면, 정말이지 세상에 지옥이라는 곳도 실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말도 안 돼. 사람이라면 이럴 수 없다. 이건 위험……!’
그때, 진양은 연호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엄한 눈빛 속, 깊고 선명한 눈동자는 한 줌의 악의(惡意)도 담고 있지 않았다.
고요하고 신중했다. 그러면서도 서글프기까지 한 감정이 묻어났다.
‘…….’
왜일까?
천하에, 아니 고금을 통틀어 누가 있어 이런 살기를 뿜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악의로 점철된 기운인데, 정작 연호정의 눈은 너무나도 투명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호정은 불가에서 말하는 마귀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사람이었다.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진양의 얼굴에도 결심의 빛이 어렸다.
화르르르륵!
불처럼, 아니 화염 그 자체가 된 진양의 기도는 연호정의 살기를 조금도 뚫지 못했다.
하지만 연호정의 살기를 더욱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연호정이 진짜 마귀가 아님을 확인했으니, 그는 언제까지나 대장과 함께할 뿐이었다.
쿠구궁! 쿠구구궁!
연호정의 발밑에서 시작된 실금이 남궁세가의 대문까지 이어졌다.
내리치는 번개처럼 갈지자로 번져 나가는 실금이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무사들은, 순간 그 실금 사이에서 유황불이 솟구치는 환상을 보았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흩어진다.
누구 하나 예외가 없었다. 신념으로 충만했던 그들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공포만이 가득했다.
가만히 그들을 둘러보던 연호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화르륵! 화르르륵!
한 발, 한 발 땅을 디딜 때마다 황금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뒤를 따라 걷던 진양은, 문득 연호정의 발치에서 솟구치는 황금빛 연기가 상당히 어둡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저 연기는 연호정의 진기가 제멋대로 방출, 유형화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연호정이 발산하는 황금빛 기파와 똑같은 성질을 지녔다는 뜻이다.
한데도 어둡다. 본래의 빛을 잃은 금광(金光)은 낡은 황포 조각처럼 탁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어깨 위로 불타오르는 금광도 어두운 황색으로 물들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변하고 있다.’
진기가 변하고 있었다.
초절정고수인 진양조차도 실시간으로 유형화된 진기의 색이 변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저 변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스륵.
대문 앞에 선 연호정이 입구를 지키는 두 검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감히 연호정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침만 연신 삼키며 정면을 주시할 뿐이었다.
‘과연.’
연호정의 상단신기 조절 능력은 아직 궁극에 이르지 못했다.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흘러 나간 기파가 검사들에게도 닿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쓰러지지 않는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음에도 끝까지 서 있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남궁가주를 만나러 왔다.”
“…….”
“문을 열어라.”
검사들의 양손이 부르르 떨렸다.
저도 모르게 문을 열 뻔했다. 기세도 기세지만, 목소리 자체에 엄청난 위엄이 서려 있었다.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의 명령이었다.
검사 하나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사, 사전에 연락을 주지 않으셨다면…… 가주님을 뵐 수가…….”
“이해하고 있지?”
“예, 예?!”
“노선배께서 계시지 않는 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 전체를 날려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
연호정이 좌우로 물러난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무사들은 감히 연호정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며 벌벌 떨 뿐이었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대다수가 일류였고, 절정고수들도 꽤 많이 분포해 있었다. 그런 이들조차 연호정의 기세에 먹혀 감히 눈도 못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다시 검사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게 이곳을 박살 낼 의지가 있었다면 도끼부터 휘두르고 들어갔을 것이다.”
“……!”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생각하는 불길한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
연호정이 대문으로 눈을 돌렸다.
“문 열어라. 부수고 싶지 않다.”
결국 검사들은 고개를 떨어트리며 대문을 열었다.
기세에 압도당하긴 했지만, 기실 남궁의 검사들은 연호정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태상가주님과의 비무 이후 거의 대다수가 연호정을 동경했다.
연호정 역시 그 마음을 알기에, 앞서 다른 무사들을 대할 때처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연호정과 진양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후웅. 후우웅.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연호정의 탁한 황색 기파가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검사들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훅.
흘러나오던 황색 아지랑이는 거의 완전한 흑색으로 변해 버렸다.
쿵!
* * *
남궁의 거처로 들어왔음에도 연호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아가 기세를 풀지도 않았다. 뿜어져 나오는 진기는 사라졌지만, 특유의 압도적인 위엄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참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 주는군.’
연호정의 뒷모습을 보는 진양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다.
넉살 좋은 진양조차 감히 말 한마디를 걸 수가 없었다. 그만큼 연호정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화가 나는 거요?’
그렇다. 연호정은 지금 화가 났다.
하지만 화만 난 게 아니었다. 그 파멸적인 살기를 뿜어내면서도 그의 눈빛은 너무나 깊고 맑았다.
서글픔이 엿보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다가올 현실에 슬퍼하는 듯했다.
진양은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거처 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기척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건물 곳곳에 남궁의 검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다만 누구 하나 연호정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내원 안까지 들어갔다.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권력이나 애정 어린 호소 같은 것 말고도 타인을 조종하는 방법이 있다고 보냐.”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진양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섭혼술을 말하는 거요?”
“그건 사술이니까 제외하고.”
“글쎄…… 그런 방법이 있을까? 뭐, 협박이나 그런 종류라면…….”
“협박도 좋은 방법이겠지.”
“…….”
“사람은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 사실, 나도 여러 사람을 조종해 왔어. 물론 실패한 적도 많았지만.”
“무슨 뜻이오?”
“대표적으로 전대 당가주님이 있었지.”
전대 당가주란 당관의 아버지, 암왕 당형을 뜻했다.
“가문의 외지에서 절대 나오지 않으려 하셨다. 외적의 손에 가문이 짓밟히고 있는데도. 아무리 아들과의 갈등이 컸다고 해도, 꼭 그래야만 하는 건가 싶었지.”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오롯이 내 설득 때문에 참전하신 건 아닐 거다. 뭔가 또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내 설득이 아니었다면, 가문이 폭삭 주저앉을 때까지도 나오지 않으셨을 거야.”
“…….”
“즉, 결과적으로 나는 사람을 조종한 것이다.”
“어감이 좀 별로지만……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소.”
“너도 그랬지.”
진양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조종당했다고 한다면야 전대 당가주님보다는 내가 더 심했지. 말 몇 마디로 문주직을 내던지고 당신한테 붙어 버렸으니까.”
“그렇지.”
“한데 그 얘기는 갑자기 왜 하는 거요?”
“너는 설득하기가 쉬웠어. 나는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고, 너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는 말로 널 세뇌시켰지.”
진양이 낄낄거렸다. 비로소 얼굴이 풀어지는 그였다.
“그러게나 말이오. 그 세뇌, 진짜 지독했소. 세뇌라는 말을 듣고 있는 지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걸 보니.”
“진심이 있어서 그렇다.”
연호정의 목소리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너를 원했다. 나와 함께하면 좋겠지만, 함께하지 못한대도 더 높은 곳을 향해 비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어.”
“…….”
“진부한 표현이지만, 내 진심이 통했다고 볼 수 있겠지.”
“나아가 당신 말발이 워낙 좋았소이다.”
“화술이라…… 그래, 화술도 중요한 무기지. 타인을 조종하는 무기.”
“한데,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는 거요?”
덜컹.
중문을 열고 들어가니, 저 멀리 정자가 보였다.
그리고 정자 위에는 한 명의 중년 사내가 등을 돌린 채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사내를 보며 연호정이 말했다.
“한 지역의 패자 소리를 들으려면 그만한 주관이 있어야 한다. 말랑말랑한 성격으로는 절대 패주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절대적으로 동감하오.”
“말하자면, 남궁가주는 너처럼 설득당한 게 아니다. 협박을 당한 것이지.”
진양의 눈에 은은한 화기가 일렁였다.
연호정이 정자로 걸어갔다.
진양은 어느 정도 함께 걷다가 등 뒤의 칼을 뽑아 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위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쿵!
정자 아래 기둥에 광룡부를 기대어 놓은 연호정이 남궁인에게로 다가갔다.
“…….”
남궁인의 얼굴은 못 보던 새에 한층 더 늙어 버린 듯했다.
눈빛은 탁했고, 수염도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언제나 모범적이라 할 만큼 깔끔한 외양을 고수했던 그답지 않았다.
털썩.
연호정이 남궁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남궁인이 쓰게 웃었다.
“어제였나?”
“…….”
“자네가 입맹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생각했네. 조만간 내게로 올 것이라고.”
“남궁가주.”
연호정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누구냐.”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앞뒤 다 자른 그의 말은, 천하의 남궁가주에게 협박을 가한 자가 누구냐는 뜻이었다.
가만히 술잔을 내려다보던 남궁인이 그대로 잔을 비웠다.
“연가주는 좋겠어. 두 아들을 이렇게나 건실하게…….”
“네놈의 푸념 따위나 들으려고 온 길이 아니다.”
“…….”
“검제 선배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이미 네놈의 팔 하나는 자르고 시작했을 것이다.”
남궁인이 충혈된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연호정의 눈빛이 시시각각 차가워졌다.
“누구냐.”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남궁인의 눈빛이 차츰 힘을 잃어 갔다.
“한 지역의 패주 소리를 듣는 사람이 무너져 내릴 만한 일이 얼마나 되겠나.”
“한 번만 더 말 돌리면 그냥 죽이겠다.”
“…….”
“누구냐.”
남궁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아들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