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09)
1109화. 호아마병(虎牙馬兵) (9)
‘이놈은…….’
찰나지간, 소현종은 번개가 되어 날아오는 상대의 정체가 적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검제가 아니다. 이놈이야.’
그것은 본능이었다.
검제만큼 강하지도 않고, 검제만 한 연륜도 없다. 그런데도 소현종은 이 번개를 닮은 검사야말로 섬서 무림의 최고 지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짐승만큼이나 발달된 육감을 지닌 고수만이 알 수 있는 감각.
“으아압!”
모용우가 탕마신검을 휘둘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있는 힘을 다해 휘두른 일검, 무정천뢰식의 낙뢰교격(落雷交擊)이었다.
소현종의 좌수가 일순 수많은 환상을 그려 냈다.
콰앙!
모용우가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검으로도 죽이기는커녕 튕겨 나가기까지 한다. 심지어 소현종은 본래 기량의 삼 할 정도밖에 구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극에 이른 절대고수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소현종이라고 멀쩡한 건 아니었다.
파지지직!
검기에 베인 손날에서 번진 뇌기가 전신을 누볐다.
‘이런.’
흑금강마공(黑金剛魔功)의 힘을 최대한 발휘했지만, 그래도 뇌기가 잔존하여 몸 이곳저곳에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울컥!
소현종의 코와 입에서도 기어이 피가 흘러나왔다.
멀쩡한 몸 상태였다면 상처를 입기는커녕 반격기 한 번으로 상대를 빈사 상태로 몰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아무 의미가 없는 생각이었다. 생사의 전투에서 이랬다면, 저랬다면 떠들어 대는 것만큼 추한 짓도 없다.
소현종은 핑계를 대는 대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화아악!
창을 놓았어도, 오른팔을 쓸 수 없어도 나는 강하다.
소현종의 기세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지독한 내상을 입었음에도 그의 기세는 여전히 파멸적이었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괴물이구나.’
무극수가 얼마나 막강한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압도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모용세가 최강의 무공이라는 벽력무로도 상대가 안 된다. 보아하니 제 기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상태 같은데도 호랑이와 고양이만큼의 차이가 났다.
‘그래도.’
쿵!
강하게 땅을 박찬 모용우의 두 눈에, 어느새 흔들림이 사라졌다.
‘그래도 간다.’
번쩍!
또 한 번 불타오르는 뇌정공.
모용우 역시 누구보다 내공 소모가 심한 상황이었다. 단순 피해량만 보면 소현종에 미칠 수 없지만, 제힘을 낼 수 없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무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목숨을 걸고 상대를 죽이려 드는 것.
지이이잉!
푸른 번개를 두르고 돌진하는 모용우를 향해, 소현종이 또 한 번 좌수를 휘둘렀다.
그의 팔은 마치 짧은 창과 같았다. 손끝을 가지런히 모아 찔러 가는 모습이, 실제 창을 휘두르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
쩌정! 퍼엉!
검날을 비틀어 막았지만, 이번에도 모용우는 열 걸음 이상 물러나야만 했다.
‘힘들다.’
두 번 부딪쳤을 뿐인데도, 지금껏 기마병들과 싸운 것을 다 합친 것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다행이라면 소현종 역시 후속타를 가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흑금강마공을 뚫고 들어온 뇌기가 끊임없이 상처를 지지고 단전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압!!”
우우우웅!!
소름 끼치는 기합성과 함께 시커먼 마기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모용우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듯한 착각이 일 만큼 압도적인 마기였다.
‘이길 수 있나?’
목숨을 건 싸움은 많이 해 봤다. 하지만 이렇게 불가해(不可解)한 힘을 구사하는 초고수와의 싸움은 처음이었다.
싸움도 공격이 통해야 성립하는 법이었다. 이건 싸움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쩌정! 쩌어엉!
소현종의 좌수는 연환기가 없되, 일타 일타가 막강했다.
두 번의 공격을 더 막아 낸 모용우는 기어이 무릎을 꿇었다. 전신의 뼈마디가 모조리 부서진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치솟았다.
‘안 돼.’
오히려 그 정도로 당해 버리니 정신이 차갑게 곤두섰다.
‘난 죽으러 온 것이 아니야. 죽이러 온 것이다.’
파직! 파지직!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뇌기가 어깨와 두 다리를 마구 두들겼다.
‘내가 죽으면 우리 군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설령 이번 전투에서 이긴다 할지라도, 무림맹의 작은 주인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무림의 사기는 바닥을 치게 될 거야.’
삼교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시작부터 아군의 사기를 밑창까지 끌어 내리는 미친 짓을 할 순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주…….’
도주해야만 했다. 그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게 낫다. 일단은 피하고 봐야 해.’
누구보다 합리적인 생각을 할 줄 아는 모용우였지만, 이상하게 그의 두 다리는 또다시 적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소현종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청동으로 만든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일그러지자, 정말이지 마주 보기 힘들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나는 왜 도망치지 않고 맞서는 거지.’
쩌저정! 쩌엉!
검과 손이 부딪치며 연신 쇳소리를 터트렸다.
모용우는 피를 토하면서도 덤볐고, 소현종은 괴성을 지르며 모용우를 밀쳐 냈다.
‘이길 수 있나? 이 괴물에게?’
이기지 못한다.
이길 수가 없다. 자신과 적장의 무공 격차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이 정도 차이를 무시하고 적을 죽이려면 천운(天運)이 필요했다.
‘애초에, 나는 왜 이자에게 달려들었을까.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도 없었는데.’
모른다.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올곧게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다.
‘그저 일심(一心)으로…….’
그때였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모용우는 하나뿐인 의제의 말을 떠올렸다.
‘이유 따위 있겠습니까?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했지요.’
언젠가, 왜 양천의 제자가 되었느냐고 묻는 말에 연호정은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세작 사태로 반흑도파와 얽혀 무림맹이 뒤집어졌을 때.
사태를 해결하고 흑도 무림으로 돌아가려던 연호정은 이렇게 말했다.
‘저도 사람인데 기분이 좋을 순 없지요. 솔직히 성질머리 같아서는 선동당한 사람들도 다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성질 부려 봤자 놈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
‘때로는 내 목적을 위해서 나의 한 부분을 죽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래요. 결국 나의 일부분을 버리는 것도 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나의 일부분을 버린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뜨겁게 가슴을 달구었다.
쾅! 콰앙!
소현종의 공격은 갈수록 강해졌다.
미친 듯이 밀려 나가면서도, 모용우는 생각했다.
‘적을 죽이기 위해 내 목숨을 버리면 되는 것인가.’
안 된다.
목숨을 버려야 할 순간이 온다면 거리낌 없이 버릴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버려야 이 괴물을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지겨운 놈!”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후우우웅!
소현종의 왼팔 전체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이번 한 수로 완전히 끝내 버릴 생각인 것이다.
모용우는 피에 젖은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웃었다.
‘왼팔 하나로 잘도…….’
그때였다.
쿠궁!
소현종의 몸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묶이기라도 한 듯 덜컥 멈춰 섰다.
후우우우웅!
아름다운 자색의 진기가 소현종을 에워쌌다.
화검자였다. 복부에 창을 달고 일어난 화검자가 소현종을 향해 자하진기를 있는 대로 퍼부어 대고 있었다.
상극의 힘이란 곧 반대되는 힘을 손쉽게 파괴하거나 제어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누구의 힘이 더 우월하냐에 따라 상극의 관계가 바뀌기도 한다.
화검자는 무극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검이 아닌 도를 좇으며 한 땀, 한 땀 완성된 그의 자하진기는 어떠한 무극수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강력한 순도를 자랑했다.
남궁승과의 생사결로 절반 이상의 힘이 깎여 버린 소현종으로서는, 화검자의 자하진기를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소현종이 이를 악물었다.
“으아아!”
콰드득!
그의 몸 곳곳에서 탈골되는 소리가 들렸다.
힘으로 자하진기를 벗어나려 한다. 무시무시한 독기였다.
바로 그때.
모용우가 질주했다.
콰앙!
한 줄기 벼락이 되어 나아가는 모용우. 그는 다시 한번 연호정의 말을 떠올렸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의 일부를 죽인다.’
적장을 죽이기 위해, 나의 어떤 부분을 죽여야 할까?
흐릿했던 모용우의 두 눈에 신광(神光)이 번졌다.
‘저놈, 후속타가 날아오지 않는다.’
소현종 역시 한 번 부딪칠 때마다 내상을 입고 있다는 뜻이다. 후속타를 이어 가기 힘들 만큼 몸 상태가 나쁘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면?
지이이이잉!
양손으로 쥐었던 탕마신검을 한 손으로 쥔 후,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소현종이 괴성을 토했다.
“이것들이!”
일순 탕마신검이 수십 개의 선을 그렸다.
마치 벼락으로 이뤄진 그물망을 보는 듯, 폭이 반 장이 넘는 뇌망(雷網)이 소현종을 향해 짓쳐 들었다.
무정천뢰식의 절대 방어초인 검뢰신망(劍雷迅網)을 공격초로 펼친 것이다.
무공의 한계, 초식의 한계를 돌파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경지는 과거 모용군이 공공대사와의 비무 때 보여 준 것으로, ‘그’ 모용군이 죽음을 불사하고 깨닫는 과정에서 얻은 최고급 무리(武理)였다.
즉, 지금 이 순간 모용우는 한때나마 소림 방장을 비무로 꺾은 모용군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는 것.
검뢰신망의 뇌검기가 소현종을 휩쓸었다.
콰콰쾅! 퍼펑!
“크윽!”
손으로 펼치는 환창(幻槍)으로 막기에는 검뢰신망에 담긴 힘이 너무 거셌다.
검기도 검기지만 특히 뇌기가 성가셨다. 자하진기로 몸이 자유를 잃은 지금, 검뢰신망의 검기 십여 발이 소현종의 체내로 침투하여 무차별 폭발을 일으켰다.
퍼버버버벅!
“으악!”
그 인간 같지 않은 소현종의 입에서도 기어이 고통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모용우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적장을 죽이기 위해 그가 버린 것은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선입견이었다.
무정천뢰식은 단발의 위력이 강한 검법이요, 신공이다. 아무리 후속타를 빠르게 펼쳐도 하나의 초식을 끝맺기 전까지는 그다음 초식을 펼칠 수 없다.
모용우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무리하면서까지 자신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것에 동의했다.
번쩍!
검뢰신망이 끝나기도 전에 소현종을 스쳐 가는 좌수(左手)가 하늘빛 참격을 뿜어냈다.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역사가 담긴 벽력무와 건곤무.
그중 모용우의 왼손 수도(手刀)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건곤백팔검해(乾坤百八劍解)의 삼대비기 중 하나, 천지단공(天地斷空)이었다.
퍼버벅!
모용우의 왼팔 곳곳에서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화검자의 내공에 오른팔이 박살 난 소현종의 모습과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소현종은 상극의 힘에 한 팔을 잃었다는 것이고, 모용우는 왼팔을 희생하면서까지 깨달음에 몸을 던졌다는 것.
“…….”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현종이 쓴웃음을 흘렸다.
“……이래서 전쟁이 재미있는 거야.”
그의 우측 어깨에서부터 좌측 옆구리까지 붉은 선이 그어졌다.
스르륵. 쿵!
상체가 사선으로 갈라진 소현종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