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10)
1110화. 호아마병(虎牙馬兵) (10)
“커허억!”
무릎을 꿇은 모용우는 한 사발의 피를 토했다.
‘빌어먹을.’
온몸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려 왔다.
등줄기를 훑는 고통에 당장 쓰러지고 싶었다. 정말이지 이 정도로 끔찍한 고통은 오랜만이었다.
파직! 파지직!
그의 등 뒤로 시퍼런 뇌기가 번뜩이다가 사라졌다.
내상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통제되지 않는 뇌정기였다. 검뢰신망을 구사함과 동시에 건곤팔극진기까지 끌어 올려 천지단공을 펼쳤다.
두 가지 첨예한 힘을 일시에 끌어 올렸으니 오장육부가 산산조각 나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위험해. 서둘러 진기를 바로잡지 않으면 폭사당한다.’
모용우는 입술을 깨물며 뇌정기를 수습했다.
당연하게도 잘 수습되지 않았다. 기(氣)는 의념의 영향을 받는다지만, 그가 연마한 뇌정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흉포한 진기 중 하나였다.
설령 주인이 심각한 상처를 입어도 의념에 따라 움직일 테지만, 건곤팔극진기를 억지로 꺼내는 순간 뇌정기가 관장할 곳 일부를 없애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평소 오가던 길이 막힌 뇌정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통제를 벗어난 뇌정기는 순식간에 몸 이곳저곳을 누비며 주인의 의지를 배반했다.
‘이런…….’
모용우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러다 죽는다……!’
그때였다.
후우우웅!
등 뒤에서부터 스며든 부드러운 힘이 순식간에 뇌정기를 다스렸다.
아니, 뇌정기만이 아니었다. 그 신선의 힘은 출혈을 일으킨 장기의 상처까지도 막아 주고 있었다.
신비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힘이었다. 가히 신선의 권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용우는 놀라서 화검자를 바라보았다.
“움직이지 말게.”
배에 창이 꽂혔음에도 화검자의 표정은 부드럽기만 했다.
“아직 나의 진기는 넉넉하네. 마음이 급하겠지만, 일단 몸부터 바로잡아야 싸울 수 있지 않겠나.”
“지, 진인…….”
“눈을 감게. 그리고 내공을 바로잡아. 나의 힘으로 자네의 기를 통제하는 것은 잠시일 뿐이야. 결국 진기는 주인의 의지를 따르는 법이니.”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모용우는 눈을 감은 채 뇌정공의 구결을 읊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지잉. 지이이잉.
흥분해서 미쳐 날뛰던 뇌정기가 비로소 모용우의 의지에 따라 전신을 누볐다.
“후우!”
빠른 운공을 끝낸 모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모용우는 깜짝 놀랐다.
소모되었던 내공이 절반 이상 차올랐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입은 내상 역시도 대부분 봉합되어 있었다.
물론 나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한 치료가 되어 있었다. 이 상태로 며칠 푹 쉬면 거의 완벽하게 본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이게 어떻게……?’
모용우가 화검자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화검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안색이 다소 창백했지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도사임에도 마치 부처를 닮았다.
“가게.”
“……진인.”
“나는 지금 움직일 수 없어. 도우려 해도 도울 수 없으니, 자네는 자네 할 일을 하면 되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화검자의 복부를 관통한 저 장창은 그 굵기가 상당했다. 저 창이 뽑히는 순간 화검자도 죽을 것이다.
“진…….”
“어서 가게.”
잠시 화검자를 보던 모용우가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그 한 번의 인사에 모든 것을 담았다. 정중한 인사를 끝낸 모용우는 다시 전선으로 몸을 날렸다.
“……후우.”
화검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란 놈은 끝까지 어설프구나.’
인생의 마지막을 화산을 위해, 섬서 무림을 위해, 천하를 위해 써 보자고 분연히 검을 들고 뛰쳐나왔다.
한데 이게 뭔가? 적의 부대가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마지막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아직도 오만함을 떨치지 못한 것이냐.’
솔직히 적의 부대를 완전히 궤멸시킬 때까지는 살아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과한 욕심이었음을 지금 깨달았다.
화검자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에야 비로소 모든 집착과 오만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도 나쁘지 않은 전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무극에 이른 적장을 죽이는 데에 일조하였으니, 이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새삼 적장을 죽인 젊은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일격을 먹이는 순간, 젊은이가 스스로의 선입견을 버리고 크나큰 깨달음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천운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사람 스스로가 자신의 일부를 버릴 때, 비로소 천운은 찾아오게 마련이었다.
‘듣기로 저 부대는 사음에서 보낸 것이라 하였는데.’
사음교에서 보낸 첩자가, 팔십여 년이 흐른 뒤 사음의 부대를 이끄는 적장의 손에 죽게 되었다.
얄궂지만, 역시나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
‘사부님.’
점점 어두워져 가는 하늘인데도 화검자의 눈에는 맑고 푸르게 보였다.
‘제 나름대로 몸부림치며 살아 보긴 했습니다만, 이게 잘 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였다.
환청인지 뭔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후회는 없느냐?’
스승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내가 나에게 하는 질문인가.
화검자가 눈을 감았다.
‘후회는 없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그렇지요.’
자신의 깨달음을 책으로 엮어 화산에 전해 주었다.
또한.
‘무림의 젊은 장수에게 나의 힘을 건넸으니, 화산을 지키는 데에 한 손 거들어 줄 것이다.’
뇌기를 다루는 그 젊은이의 몸에 자하신공의 씨앗을 심어 두었다.
칠십 년이 훌쩍 넘도록 연마한 그 내공은 순정하고도 순정하여, 그 젊은이의 무공은 물론 심신의 정화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부디.’
스르륵.
화검자의 몸 곳곳이 뿌연 가루로 변했다.
‘영령들께서 화산을 지켜 주시기를.’
훅! 치링!
온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난 곳에는, 그가 걸쳤던 옷과 그의 몸을 뚫은 장창 한 자루만 덩그러니 남았다.
* * *
마병장 갈요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히히히힝!!
주인 없이 내달리는 천고의 마물, 흑혈신마(黑血神馬)가 무시무시한 울음을 토해 냈다.
그 울음은 가히 천둥소리를 방불케 하는지라, 적아를 구분치 않고 모두가 깜짝 놀라 거대한 흑색 기마를 바라보았다.
은호마병의 총대장과 심령으로 연결된 흑혈신마가 미친 듯이 울음을 터트리며 발광한다.
‘설마?’
흑혈신마의 울음에는 지독한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 실제로 두 눈에선 피눈물이 흐르고 있으며, 입가에는 흰 거품이 줄줄 흘렀다.
‘흑혈신마가 저렇게 발광하는 것은 처음 본다. 그렇다면?’
주인의 죽음.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설령 온몸이 토막 나도 괴로워하지 않을 마물이 흑혈신마였다.
갈요의 얼굴에 지독한 살기가 어렸다.
“뭣들 하고 있느냐! 목숨을 돌보지 말고 진군하라!”
콰콰쾅! 퍼펑!
은호마병의 질주가 한층 더 거세어졌다.
선두에서 기마병들을 쳐 죽이던 남궁승은 적의 사나운 질주에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가 변했는데.’
여전히 상단전이 어두웠다.
정말이지, 상단전을 쓰지 못하는 게 이렇게까지 막막한 일인 줄 상상도 못 했다. 바로 옆에서 살기가 터져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 신들린 검법으로도 적의 모든 공격을 막아 내기가 벅찰 수밖에 없었다.
‘끝도 없구나.’
게다가 남궁승 역시 소현종과의 전투에서 절반에 가까운 내공을 소모했다.
상단전이 멀쩡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지만, 그게 아닌 지금으로선 말 그대로 내공과 체력으로만 싸워야 했다.
물론 천고의 깨달음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가림막을 둘러 놓고 싸우는 것 같아서 효율적인 전투가 불가능했다.
‘아군도 많이 지쳤다.’
좌우에서 벽을 쌓고 적들을 막아 내는 무림인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기는 높지만, 체력이 거의 다 떨어졌다. 반대로 적들은 기마로 전진하니 체력 소모도 크지 않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육천…… 아니, 칠천은 족히 넘는다.’
무시무시한 숫자였다.
서로가 서로를 쳐 죽이는 전면전을 벌였다고는 하나, 일만 중 삼천이 죽었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심지어 그 삼천은 정예 기병이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전과였지만, 반대로 아군의 사상자는 적보다 이천이 더 많았다.
좌우군과 무림맹 병력을 합쳐도 삼천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무려 오천의 병력이 불과 한 시진이 조금 넘는 싸움에서 증발한 것이다.
이 정도 피해라면 사실상 전멸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떻게든 전투를 지속하고 있지만, 남은 병력의 수만 봐도 이번 싸움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궁승 자신은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아군 병력이 다 죽고 자신만 살아 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적장이라도 죽였어야 했거늘!’
천하의 남궁승이라도 초조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
기적 아닌 기적은, 놀랍게도 저 멀리 남쪽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콰쾅!
남궁승의 눈이 커졌다.
“이런!”
일자로 돌격하던 마병이 점점 형세를 두텁게 굳혀 가니, 어느새 병력 우측이 뻥 하고 뚫려 버렸다.
“뚫어라! 또 한 번 뚫어!”
“막아라!”
“좌측, 아니 우측이다! 놈들이 이곳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퍼버버벅!
한번 대형이 뚫리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은호마병이 세 개의 진으로 쪼개지며 삽시간에 우군 양익을 뚫어 버렸다.
“안 돼!!”
속절없는 외침일 뿐이었다.
남궁승은 아군 병력을 뚫고 나아간 적들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 자신이 맡은 중부도 뚫릴 것이며,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구멍을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럴 수가! 도대체……!’
남궁승은 무극에 진입한 이래, 처음으로 무공에 대한 좌절감을 느꼈다.
혼자서는 백 명, 천 명도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 대 집단의 싸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당백에서 끝났다. 아군 병력을 뚫고 들어가는 적들을 다 틀어막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병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극수가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증거였다. 무극수는 상황에 따라 전황을 바꿀 수 있는 존재지만, 절대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만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용선진인이 외쳤다.
“삼진은 방어를 두텁게 세워라! 사진과 오진은 적들을 추살해라! 절대 성도로 보내선 안 된다!”
파바박!
용선진인은 직접 사진과 오진의 무사들을 이끌고 후미를 뚫은 마병들을 쫓았다.
피피피핑!
무시무시한 놈들이었다.
적의 진형을 돌파하고 미친 듯이 질주하는 와중에도 쫓아오는 적을 향해 상반신을 틀어 화살을 날려 댄다.
그간 쌓인 피로는 어디로 날려 버렸는지, 한 발 한 발에 강력한 위력이 살아 숨 쉰다. 수백의 기병을 쫓아가던 화산의 검수 이십, 섬서의 무림인 백여 명이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화살을 쳐 내며 달리는 용선진인의 얼굴에도 기어이 좌절이 깃들었다.
‘정말 이대로 끝나 버린 것인가?!’
우르르 몰려가는 검은 기마들의 뒷모습은 마치 태양을 가리는 암흑과도 같았다.
용선진인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을 때.
콰아앙!
그들이 상상도 못 했던 기적을 일으키는 오십 기의 기마가 있었다.
“감히!”
어디서도 들어 보지 못한, 사자의 그것을 닮은 목소리가 전장을 가로질렀다.
“반쪽짜리들이 어디서 날뛰느냐!!”
퍼퍼퍼퍼펑!
무차별로 울려 퍼지는 파육음.
용선진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눈에, 저 멀리 새카만 장창을 휘두르며 오십 기의 기마를 이끌고 달려오는 노장(老將)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