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131)
131_거인의 몰락 (1)
1924년 12월 31일.
존 조지프 퍼싱 원수는 퇴역했다.
현 미군 규정상 군인의 정년은 만 63세까지였으므로, 원래라면 퍼싱 또한 자신의 64세 생일을 맞이하는 9월 13일에 퇴역해야 했다.
하지만… 다들 알잖나?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회오리가 마침내 끝날 때쯤, 미합중국의 국가 원수인 우드로 윌슨에 얽힌 끔찍한 스캔들이 터지며 의회는 거의 1년간 집단 아노미 상태에 빠져버렸다.
대통령이 총에 맞아 이승 하직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닌 미국이라지만, ‘영부인과 비서관 주도하에 조직적인 대통령 직무 수행 불능 상태 은폐 시도’라는 이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서 행정부고 의회고 죄다 멘탈이 깨져버린 탓에 군 재편성과 뒷수습이라는 거대한 작업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 결과, ‘퍼싱은 하나뿐인 미 육군 원수이니 아무튼 괜찮음’이라는 기적의 논리가 동원되며 그의 퇴역이 연기되었다. 이렇게 퍼싱의 최초 업적이 또 하나 늘어났다. 애초에 그만한 인물이 아니고선 이 거대한 똥을 누가 치우겠나.
하지만 저 영감님, 어째 심통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미합중국의 그 어떤 군인도 차보지 못한 금색 4스타가 찬란히 빛나는 가운데, 퍼싱은 퇴임사를 읊어 나가고 있었다.
“―바로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의회는 어마어마한 군축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래. 저 군축.
군축 때문에 이 난리가 났지. 에휴.
“우리는 영국인들의 압제에 피의 투쟁을 벌인 끝에 독립했으며, 그 압제자들이 돌아와 백악관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군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쓸모없을지도 모르지만 군이 없으면 국가는 존망의 기로에 섭니다. 하지만 그들 정치인들은 때때로 조국의 역사에 무지한, 무식하며 분별없는 자들에게 경제 지표를 떠벌리며 위험한 선동을 해대고 있습니다.”
장내에 있던 인사들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니, 퇴역한다고 노빠꾸로 불타는 것 보소. 혹시 하딩이 포커로 지갑이라도 털어가셨습니까? 아니면 이제 정치권도 관심 없고 하니 그냥 막 지르기로 하셨습니까?
물론 나처럼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사람들은 이 거침없는 발언에 경악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군바리들이란 그렇게 센티멘탈하며 감수성 넘치는 사람이 드물다. 다들 얹힌 속에 사이다 들어간다는 듯 ‘어우 씨 이게 사이다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거… 뒷감당 가능한가?
아니지, 딴 사람은 눈치 봐야 하지만 퍼싱은 가능하다. 오직 퍼싱만이 가능한 불빠따 세례인 셈이다.
64세 노인네 생애 최후의 불타는 쥐불놀이 실화냐? 가슴이 절로 웅장해진다.
“여러분은 이 엄혹한 시기에서도, 결코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우리의 책임을 방기하지 마십시오. 합중국의 역사상 총이 필요 없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조국이 우리의 노고에 관심 없다 하여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그러했듯, 우리의 역할을 다하면 될 뿐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시대를 호령했던 위대한 군인은 마지막까지 후배와 부하들,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지식이 갱신되지 않는다 하여 지혜가 부족하겠는가.
그는 원수이자 위대한 장군으로서 경례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그렇게 퍼싱은 떠났다.
그리고 남은 이들에겐 재앙이 열렸다.
확고부동한 전쟁영웅이자 거대한 입지를 가진 퍼싱마저 사라진 지금, 우리는 무자비한 군축의 칼날 아래 구아악 구아아악 하며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하인즈 소장은 미국―스페인 전쟁, 그리고 이후의 필리핀 전쟁에도 참전했다. 나와는 멕시코 원정 때 처음 안면을 텄었지.
그리고 퍼싱이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참모차장으로서 퍼싱과 호흡을 맞췄다.
“오랜만에 보는군. 뫼즈―아르곤 직전에 마지막으로 자네 얼굴을 본 것 같은데.”
“예 맞습니다. 그 이후로 93사단이 일선에서 빠지고, 조기에 귀환하면서 장군님을 뵐 겨를이 없어졌지요.”
“캉브레와 아미앵의 영웅을 부관으로 쓸 수 있다니, 아마 나만큼 호사스러운 참모총장은 없을 걸세. 허허. 어디 한번 함께 잘 일해보세나.”
“알겠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때 그 마적 놈들 대가리 들고 오던 정신 나… 패기 넘치던 소위가 이렇게 클 줄 누가 알았겠나.”
“아니, 그건 제가 아니라 패튼입니다. 조지 패튼 주니어 말입니다.”
“그놈이 그놈이지 뭘. 아주 똑같은 놈들이 끼리끼리 만났어.”
억울해! 억울하다고!
기어이 내 인생에 거대한 암덩이를 주셨군요, 선배님. 제가 기필코 부관의 권한을 풀로 남용해서 복수하겠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게 있다면, 아무리 내가 이것저것 했다손 쳐도 아시안이라는 그 미묘한 벽이 있는데 어떻게 날 뽑아 쓸 생각을 했는가였다.
물론 마셜의 추천이 있긴 했다지만, 그거랑 그거는 별개 아니겠나.
내 소박한 질문에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답했다.
“나는 아일랜드계라네. 부모님 두 분 모두 확실한 아이리쉬지. 내가 대충 어떤 소릴 들었는지 알겠지?”
“아, 옙.”
아일랜드계도 가짜 백인 소리 오지게 듣지. 나는 그 말에 군말 없이 납득했다.
“이제 퍼싱 원수는 없다네. 그 말인즉슨…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제발 예산 좀 달라고 징징대야 한단 사실이고.”
“갑갑하군요.”
“그래서 바로 지금 자네의 역량이 주목받는 거야. 자네는 그 의회와 정면승부해서 전차의 불씨를 살린 인물이잖나.”
그게 또 그렇게 연결되네.
물론 내 뒷공작을 알고 있진 않겠지만, 어쨌거나 필사적으로 이빨을 깐 건 사실이니까 그 점을 높게 평가받은 듯하다.
그렇게 나는 워싱턴 D.C와 강 하나를 마주하고 있는 버지니아 알링턴 카운티, 포트 마이어로 이사하게 되었다.
“여기 집 열쇠일세.”
“잘 쓰겠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또 나름대로 수리를 했으니 크게 돈 들어갈 일은 없을 게야. 기병대 주둔지다 보니 승마 코스도 제법 괜찮아. 자네, 가면 갈수록 허벅지가 두툼해져 가는데 운동도 겸해서 말이라도 좀 타게.”
“예, 예에….”
마셜이 살던 3호 공관이 이제 나와 도로시, 그리고 아이들의 집이 되었고, 마셜은 부인과 장모님을 모신 채 룰루랄라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동안 제 뒷배를 많이 봐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당분간 큰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군축에 저항하며 발버둥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감히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일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 * *
1925년 1월 중순.
나는 은밀한 부름을 받고 오랜만에 워싱턴 D.C의 우보크로 향했다.
삼년상을 치르는 이 경건한 장례식장은 원주인이 3년을 채우기 무섭게 새로운 상주가 입점… 아니, 입상…? 아무튼 새롭게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광기가 이토록 두렵다.
“왔나?”
“예.”
“부탁했던 건?”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권력 남용 아닙니까?”
“어허. 무슨 소린가. 나는 시가대로 구매했네.”
작년 대선에서 다시 승리해 재선 대통령이 된 남자, 하딩은 반지를 탐하는 골룸처럼 내가 내민 편지 봉투를 받아들었다.
“마이, 마이 프레셔스….”
그러니까 진짜 골룸이잖아 이 사람아. 종이쪼가리에 그렇게 눈을 반짝거리면 어쩌란 거야.
“후우, 생산 라인엔 저희도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제가 손수 카드팩을 뜯었습니다.”
“고맙네. 고마워. 이제 나도 좀 이길 수 있겠지. 이 나라가 이 모양이라네. 장관이라는 놈들은 죄다 블랙 로터스 4장씩 넣고 다니는데 나만 2장밖에 없었단 말이야.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나? 직업이 망할 대통령인 탓에 눈치가 보여서 카드팩 사러 나갈 수도 없다고.”
“크흠….”
“흐흐. 요즘 삶의 낙이 이거밖에 없다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출마하면 안 됐어.”
하딩은 털썩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힘을 쭉 풀고 주저앉다시피 했다.
“사실 나 대신 대충… 이 카드를 백악관에 앉혀 놔도 똑같지 않겠나? 모두가 우러러보고 몸값 비싸단 점에선 둘 다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카드는 말을 못 하잖습니까. 잘생기지도 않았구요.”
“크흐흐! 그렇군. 주둥이를 터는 게 대통령의 업이니 어쩔 수 없군. 기껏 여기까지 왔으니 한 게임 하겠나?”
우리는 시가 연기를 산소처럼 들이키며 빡겜을 돌렸고, 사기 카드를 새롭게 처넣은 하딩은 날 영혼까지 탈곡해버렸다.
“아니 이게 게임이야? 실화냐? 이 갈비지 트래쉬 게임이 진짜….”
“역시 게임 만든 사람이 고수라는 법은 없나 보군. 이것참, 나도 백악관에서 승률이 썩 높은 편은 아닌데 자네 혹시… 게임 잘 못하는 거 아닌가?”
지금 저 인간이 나보고 허접이라고 놀린 거지? 와,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게 하네.
나는 빡쳐서 내 손패를 냅다 테이블에 집어 던지며 카드빨이 오늘따라 안 붙는 걸 어쩌냐며 징징댔고, 그 추한 모습을 바라보는 하딩은 더더욱 싱글벙글 날 놀려댔다.
하지만 웃는 그의 얼굴엔 이상하게도 힘이 빠져 있었다.
“웬일로 신이 날 향해 미소지어 주시는군. 이렇게 필요한 카드가 척척 나오는 일도, 일이 척척 풀리는 경우도 드물었는데 말야.”
“요즘 많이 힘드십니까?”
“자네도 젊은 나이에 수만 명을 거느려 봤으니 이 느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지 않겠나? 권한과 책임은 주어져 있는데, 막상 내 뜻대로 드라이브를 하려고 하면 내 파워는 온데간데없고 세상에는 ‘할 수 없는’ 이유만이 가득하다네.”
하딩은 숨이 차오르는지 위스키를 물처럼 벌컥거렸다.
“나는 무능해.”
“각하.”
“나 자신이야말로 스스로를 명확하게 알 수 있네. 나는 대통령을 할 만한 그릇이 아냐. 나는 동네 친구들이랑 어깨동무하고 놀러 다니며 가끔 거드름피우는 정도가 딱이었어.”
그는 내가 아닌 저 머나먼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백악관에 입성한 이후, 내 친구들은 두 부류로 갈렸다네. 나를 팔아 헛짓거리를 하려다 뒷덜미를 잡혀서는… 저 무서운 D.C의 괴물들에게 흔적도 없이 짓이겨진 녀석들. 그리고 내가 친구들을 챙겨주지 않는다며 투덜이가 된 녀석들.”
“원래 누구 하나 성공하면 사돈의 팔촌까지 들러붙지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 바로 그래서야. 나는 대통령의 권능에 매혹되기보다는 친구들을 잃어간다는 그 사실이 슬퍼 견딜 수가 없네.
친구 놈들 입에 맛좋은 고기를 처넣어주고 싶단 생각을 4년 내내 했지만, 그것만큼은 할 수 없다는 최소한의 양심이 있단 점에서 더 슬프고 말야.”
아니, 이제 새로운 임기가 4년이나 남았는데 벌써 그러시면 어떡하십니까.
슬프게도 수십 년의 연배 차이가 나는 나로서는 이 불쌍한 남자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 함께했던 사람이었던 모양이니까.
우리는 그렇게 밤을 보내고 헤어졌다.
“카드는 잘 쓰겠네!”
“건승을 기원합니다, 하하.”
“그래. 내가 백악관의 최강자로 올라서면 꼭 소감에 자네를 언급하지. 오늘의 이 고마움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어!”
고작 딱지 2장 준 거로 그리 거창하게 말하진 마시구요.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일종의 예언이 아니었나 싶다.
그날로부터 두 달 뒤, 하딩의 부고가 전 미국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