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543)
543_내일도 저 노을을 볼 수 있기를 (2)
헝가리의 새로운 지도자 너지 임레는 세 가지 미션을 동시에 달성해야만 했다.
첫 번째. 파탄 난 경제를 재건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
두 번째. 공산주의 이념을 지키며 정권을 사수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소련의 침공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래서, 너지 동지는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자신들을 지켜줄 이를 찾고 있소.”
“그게 티토 동지란 말입니까.”
“그렇소. 현실적으로 봤을 때 미군이 직접 헝가리를 지켜줄 리도, 지켜줄 수도 없잖소?”
지도를 보면 서방 세력이 헝가리로 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본래는 체코슬로바키아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바로 그 접경지대인 슬로바키아엔 소련군이 진주하지 않았나.
“킴 동지가 말한 동유럽 패권이 바로 이것이잖소. 내가 체코와 헝가리, 폴란드를 수습해 새로운 단일 블록을 형성하고 소련의 세를 꺾어주길 바라니 그토록 우릴 밀어줬겠지.”
“계속해 보시죠.”
“지금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하지. 소련의 압제에서 동유럽이 해방될 마지막 기회요. 우릴 믿고 베팅하시오.”
티토는 여유롭게 파이프 담배를 뻑뻑 피우며 말했다. 그의 얼굴엔 승리자의 미소가 맺혀 있었다.
소련을 꺾길 원한다면 지금이 최고의 찬스.
불패의 명장과 수소폭탄이라는 두 가지 명검을 들고 있는 미국. 이걸 쥐고 있는 미국은 당연히 소련이 굴욕을 삼키리라고 판단하고 있을 터.
그리고 유고는 최선의 선택을 통해 승자의 반열에 오르리라.
하지만 유진 킴의 굳은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친애하는 티토 주석 각하.”
“왜 그러시오.”
“저는 소련의 붕괴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잠깐 통역을 힐끗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 해석한 것 아니냐는 뜻을 담은 눈빛이 쏘아졌다.
“통역은 제대로 번역한 듯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저는, 전혀, 소련이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소련이 패배와 멸망을 받아들이고 얌전히 죽어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티토 당신이 이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러시아 제국이라면 어쩌면 패배를 인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확신으로 건국된 소비에트 연방은 결코 외부의 압력에 의해 멸망하지 않는다. 원 역사를 아는 유진은 확신했다.
그리고 외부자인 유진이 아는 진실을 티토가 모를 리가 없다. 그의 얼굴에 붙은 미소가 살짝 꿈틀댔다.
“그리고 비슷한 이야기지만, 저는 공산주의는 결국 실패하리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소련을 무너뜨린다면 외세에 의해 중단된 사회실험에 대한 희구(希求)는 더욱 커지기만 하겠지요. 공산주의의 실패는 명명백백해야 하며, 인민 스스로가 그 몹쓸 역병에서 벗어나려고 움직일 때만 진정으로 냉전이 종식될 겁니다.”
“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소만.”
면전에서 역병의 군주 소리를 듣게 된 티토가 발끈했지만, 유진은 고요하기만 했다.
“내가 아는 걸 귀하께서 모를 리 없습니다. 유고군의 헝가리 파병은 소련을 뒤흔들고, 최종적으로는 전쟁으로 귀결될 겁니다.”
“…….”
“저는 군인 출신이라 돌려 말하시면 잘못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서로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냥 터놓고 말씀하시죠. 다음부터는 제가 아니라 외교 전문가인 차관이나 차관보가 올 수도 있으니.”
한참 동안 티토는 파이프에서 연기만 모락모락 피워 올리더니, 결국 그것을 내려놓았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역할이 없소. 이 세계에 판단이라는 게 가능한 나라는 단 둘뿐이고 나머지는 들러리에 불과해.”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제국주의 열강이 판치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참으로 인권 감수성 넘치는 시대 같은데요.”
“당신네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 같은 나라에도 엄연히 주권이라는 게 존재하오. 다른 모든 나라들이 졸개 역할을 거부하고 세상의 주인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하나로 결집해 한목소리를 낸다면 세 번째 플레이어로 발돋움할 수 있겠지.”
제3세계.
비동맹주의.
“소련과 전쟁을 벌인다고 해서 플레이어가 될 것 같진 않습니다만.”
“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국의 사고 능력을 조금 저평가해야 할 듯하오만.”
“정정하지요. 그 미친 도박에 우리를 끼워 넣지 마십시오.”
“그렇지. 바로 그걸 기대했소.”
전직 파르티잔 지도자와 현직 미 육군 대원수는 비슷한 결론에 다다랐다.
― 유고와 헝가리가 군사동맹을 맺는다.
―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소련이 침공한다.
― 지형과 국력 등의 문제로 헝가리는 소련군에 짓밟힐 확률이 매우 높지만, 유고가 개입한다면 전쟁은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련은 유고를 응징해야 하며, 유고 본토까지 공격하게 될 것이다.
― 유고가 버티기만 한다면, 소련의 패권은 심각하게 손상된다.
티토가 봤을 때 미국이 합리적이라면 유고를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신들에겐 전혀 손해가 아니잖소? 우리를 챔피언으로 쓰시오. 무기, 탄약, 물자를 내놓고 소련의 핵무기만 붙들어준다면 나는 전략적 승리를 거머쥘 수 있소.”
“그래서 미친 도박이란 겁니다. 베오그라드에 핵이 떨어지는 게 두렵지 않습니까?”
“당신들을 보고 확신했소. 워싱턴과 크렘린 모두 핵을 발사할 용기가 없다는 걸.”
티토는 의아하다는 듯 뉘앙스를 숨기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설계한 것 아니었소? 이제 와서 쫄다니. 나는 한동안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했었소. 그런데 내가 결심을 굳히니 갑자기 평화의 사도처럼 구는군.”
“소련이 자신들의 패배가 확정되는 그 순간에도 핵을 신줏단지처럼 들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낙관적인 기대입니다. 제가 귀국에 기대했던 건 중재자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그 이상은 너무 위험합니다.”
“이보시오, 킴 장군. 우리 유고는 이미 하루하루가 위험천만이었소.”
그는 울분이 차오르는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탈린은 우릴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고, 나는 선택해야만 했소. 상식적으로 명색이 공산 국가의 수장인 내가 당신과 몇 차례씩 만나는 게 웃기지 않소? 왜 그랬을까? 안 그러면 저 동독이나 체코보다 먼저 우리가 뭉개졌을 테니까!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 그리도 고까우시오?”
“저는 언제나, 가능한 한 사람이 덜 죽는 선택지를 골라왔습니다.”
이번엔 유진이 담배를 물었다.
“물론 제겐 임무가 있었기에, 똑같은 목숨이라면 당연히 미국인의 목숨을 우선시했습니다.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긍휼히 여길 사람이었으면 성직자를 했겠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을 길을 피하고 싶을 뿐입니다.”
“말은 번드르르하군.”
“뭐어, 왜 본인은 아닌 것처럼 그러십니까. 귀하의 머릿속에 있는 그 계획. 헝가리는 동의했습니까?”
유진은 마주 본 상대가 아주 잠시 주저하는 틈을 타 쏘아붙였다.
“귀국은 전쟁 후 헝가리에게서 영토를 할양받았지요. 헝가리가 땅뙈기 뜯어간 유고의 성장을 위해 국토 전체가 잿더미가 되겠다는 선택지를 고를 린 없을 텐데―”
“우리는 스탈린을 반면교사 삼아 각 사회주의 국가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함께 발전해 나갈 것이오. 헝가리도 당연히 충분한 대가를 얻을 테고.”
“거 보십쇼. 우리랑 별로 다를 것도 없구만.”
유진의 냉소 앞에 티토는 입을 달싹거렸지만 끝끝내 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꺼내지는 않았다.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서는 티토 동지의 큰 뜻이 분명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국 국무 장관으로서는 결코 이 위험한 도박판에 말려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오. 그러면 헝가리는 저 폭력적인 소련 놈들에게 짓밟히겠군.”
“티토 동지께서 헝가리와 함께 싸우면 되잖습니까?”
“나 또한 내 나라의 인민이 조금 더 소중하오. 누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뒷배를 기대할 수 없다면 소련과의 충돌은 자살행위. 그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대화로 풀어나가니 참 좋잖습니까. 저희의 입장을 이해해 주셨으니, 저희 또한 당연히 티토 동지를 배려하겠습니다.”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입만 떠들어 대는 거라면 상관없다.
그리고 미국을 ‘이해’해 줬으니 당연히 친구비가 입금될 것이다.
티토는 둘 다라고 짐작했고, 그의 짐작은 딱히 틀리지 않았다.
이제 긴장을 살짝 푼 그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다 치고, 이집트는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는지 귀띔이나 해주시오. 제국주의자들이 펄펄 날뛰고 있을 듯한데.”
“아. 나세르에게 전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유진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뒤지게 처맞을 준비 하라고.”
* * *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을 맞이하는 모스크바의 분위기는 실로 음침하기 그지없었다.
소련 정부는 모든 힘을 총동원해 정보를 통제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소련 인민들은 이러한 통제하에서도 소문을 주워듣는 놀라운 재주에 숙달되어 있었다.
“주코프 동무.”
“…….”
“뭔가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없으시오?”
주코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서베를린 봉쇄로는 미국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의 힘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콘서트장이 되어버렸다.
세계 곳곳에서 끌어모은 수송기를 통해 미국은 어마어마한 물자를 매일마다 서베를린에 투하했고, 서베를린은 배급제를 운용하며 순조롭게 버티고 있었다.
“곧 겨울이 오면 연료 소모량이 대폭 늘어납니다.”
“첩보에 따르면 미국은 그 연료 소모량을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의 수송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군. 설마 동무가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주코프는 쏟아지는 규탄을 들으면서도 고개만 떨구고 있어야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리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는 흐루쇼프였다.
“지금 우리는 미국인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흔들리는 동지들을 다잡아야 합니다.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 체코와 더불어 이들의 이반을 막아야만 합니다.”
“유사시를 대비해 접경지의 병력은 출동 준비를 갖춰 놓았습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우리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줬습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우린 정말 미국에 굴복한다는 유례없는 수치를 겪게 될 겁니다.”
없던 손패가 들어왔다.
수에즈 운하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숨통과도 같은 곳. 나세르가 이곳을 조여버린다면 미국을 지원하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는 즉시 움직여야만 한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소련의 위협이 눈앞에 있으니 이집트에게 양보한다’라는 선택지가 있긴 하지만, 크렘린의 그 누구도 저 돼지 같은 영국과 프랑스가 그 선택지를 고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체코까지 되찾을 수도 있지 않겠소?”
“과도한 기대는 금물입니다. 미국이 하염없이 체코에서 대치하는 동안 우리 중국의 동지들이 티베트 인민들을 해방시켰으니 저들은 서서히 숨통이 조이는 느낌일 게요.”
“무슨 소리! 지금 아쉬운 건 미국인들이오. 그들은 감히 사회주의 혁명을 가로막으려 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만 하오.”
흐루쇼프는 지금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위기가 무엇 때문에 터졌는가. 결국 그놈의 위신 문제였다.
소련이 결코 쉽게 물러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이 지경까지 왔으면 무언가 하나쯤은 챙겨 가야만 협상에 응할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모지리들은 마치 미국이 당장이라도 굴복해서 대가리를 박기라도 한 듯 이상한 소리를 주워섬기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어찌하지요?”
“그자들은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쟁은 외면하고 당장 이집트를 침공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습니다. 이는 명백한 배반 행위입니다.”
“주코프 동무. 우리가 이집트에 지원을 해줄 방안은 없소?”
“터키가 우리의 물자 지원을 가로막는다면 어렵습니다.”
“주코프 동무 입에서는 어렵다, 안 된다는 말만 나오는군.”
“하하하!!”
그의 얼굴이 점점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크렘린 인사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이제 비밀무기를 공개할 때가 온 것 같소.”
“아주 좋은 찬스입니다.”
“잠깐, 지금 그랬다간 대치만 쓸데없이 길어질지도―”
“흐루쇼프 동무, 과한 걱정이오. 미국인들도 한 번쯤 진정한 공포를 맛봐야 두 번 다시 이런 불장난을 하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소, 몰로토프 동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기이한 낙관론이 크렘린을 가득 메운 가운데.
흐루쇼프와 몰로토프, 그리고 주코프는 조용히 서로 눈빛만을 교환했다.
그리고 얼마 후.
소련은 로켓을 발사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를 지구 궤도에 안착시켰다.
마침내 인류가 우주마저 전장으로 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