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38
제 138화
51장. 다이어트 붐은 온다! – 2화
나와 아키는 꽤 긴 시간 동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충격까지 받지는 않았다.
그래도 많이 놀랐다.
내가 에서 멋지고 와일드한 남자다움의 대명사라고 생각했던 아키가 사실은 여자였다니!
심지어 스토리에서 아키는 군왕의 자리에도 오른 적이 있었다.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말이다.
‘그래, 알게 모르게 금녀(禁女)의 구역으로 불리는 세계가 있지. 상단도 크게 다르진 않아. 구성원 정도면 몰라도, 상단주가 여자인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아키가 남장을 선택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아울러 여자임을 숨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목소리가 미성(美聲)이라는 생각은 늘 했는데, 그게 그녀가 숨기지 못한 유일한 흔적인 듯했다.
“죄송해요, 폐하.”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그동안 힘들었을 네 노력을 알아봐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다.”
“남장은 계속할 생각이에요. 냉정하고 칼 같은 선택이 필요한 상인의 세계에서는 남성성을 어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이해해. 그나저나 아키, 생각해 보니 너…….”
“네?”
“전에 목욕탕에서 그럼 온몸을 수건으로 둘둘 말고 있었던 것도?”
“네! 당연히…… 보여 드릴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가렸죠! 정말 힘들었어요!”
“야, 그런데 너는 내 알몸을 당당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봤단 말이야?”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요…….”
말끝을 힘없이 흐리는데, 아키의 입꼬리는 실컷 올라가 있었다.
뭐 남다른 몸인 것도 아니고, 딱히 불쾌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 몸뚱이라는 게 다 똑같다. 있을 거 있고, 없을 건 없고, 적당할 건 적당하고.
“오늘의 일은 우리 둘의 비밀로 하자. 나와 둘만 있는 자리에선 위장할 필요 없어. 어디 보자…….”
나는 텔레키네시스 마법을 이용해 지하실의 문을 꽉 잠갔다.
그리고 주섬주섬 붕대를 챙겨, 다시 가슴을 압박하려는 아키를 제지했다.
“괜찮다니까.”
“폐하, 하나 고백할 게 있어요.”
“뭔데?”
“음……. 아니에요!”
뭐야, 김빠지게.
“말해. 명령이다.”
“제가 연구해 온 패션 트렌드는 결코 제가 여자라서 일부러 맞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이제는 알고 계시죠? 제법 귀족가에서 혼성 복장이 유행하고 있어요!”
“그건 인정한다. 내가 네 안목을 몰라봤던 것을 사과하지.”
“헤헷, 인정해 주시니 기뻐요.”
환하게 미소를 짓는 아키에게서 물씬 여인의 향기가 묻어났다.
나와 포옹하거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거나 했을 때, 왜 얼굴을 붉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남장 여자라니.
영지에 반대로 여장 남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헤이즈부터 쭉 여성들을 떠올려 봤는데, 수상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아키.”
“네?”
“남작의 작위를 네게 내리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나는 왕위에 오른 직후,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작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평민에게 재량껏 수여할 수 있는 작위는 보통 남작이 최대다.
그 위의 자작부터는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적이 필요하다.
물론 왕명을 핑계로 더 높은 작위를 수여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나, 형평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실제로 에서는 과도한 신분 상승이 발생할 경우, 신분제를 숭상하는 가신들의 충성도가 대폭 낮아지는 일이 많았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구시대적 사고관’을 가진 가신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이 세계는 현실이다.
다양한 가신들의 마음을 데이터 쪼가리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다룰 수 없기에 늘 신중해야 했다.
“괜찮아요, 폐하. 저는 지금의 위치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이미 왕국을 대표할 대상단의 상단주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제 평생의 꿈은 이뤘답니다.”
“몇 년이나 살았다고 평생의 꿈 타령이야?”
“아얏!”
나는 어이가 없어, 아키의 옆구리를 푹 찔러 버렸다.
올해로 스물둘인 녀석이다.
물론 장사 수완과 화술이 매우 뛰어나 나이 차이가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 나는 상단주도 압도할 정도로 실력 발휘를 하고 있었다.
“작위 받아. 반대로 생각해야 해. 왕국을 대표할 대상단의 상단주라면, 최소한 귀족 신분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알아. 이게 틀에 박힌, 막힌 생각이라는 것을. 아키, 하지만 세상은 말이야. 모두 열린 사고만 하는 사람들이 살지는 않거든.”
“……맞아요.”
짙은 한숨을 토해 내는 아키에게서 그간의 고충이 느껴졌다.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가 평민 출신의 상단주이기에 부딪혔을 고난이 보였다.
“작위가 무기라고 생각해. 그 무기를 가지고, 나를 대신해서 상단의 이름을 더 열심히 드날려 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네! 알겠어요!”
“대륙 전체를 휩쓸어버릴 수 있는 대상단을 만들어 봐. 공격적인 상단 합병도 좋아! 뒤에서 내가 항상 든든하게 있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임하길 바라.”
“네! 알겠어요! 폐하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 보겠어요!”
“너도 라키스 경을 쏙 닮아 가는구나. 왜 다들 이렇게 날 위해서 목숨도, 능력도 다 불태운다고 하는지……. 하하하.”
진심으로 기쁜 웃음이 나왔다.
나를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
진심 어린 속마음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둘도 없는 주인공이 됐다는 생각을 했다.
“폐하, 그럼 지금부터 브리핑을 시작할까요? 칼라카스 꽃잎 판매에 대한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이제 폐하께서 허락만 하시면, 나스 대륙 전체에 거대한 바람이 불 겁니다!”
“좋아.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하게 브리핑해 봐. 경청하도록 하지!”
“네, 그럼 시작합니다!”
아키의 브리핑이 시작됐다.
저녁부터 시작한 것이 새벽을 훌쩍 넘겨, 이른 아침까지 이어질 정도의 마라톤 브리핑이었다.
기나긴 브리핑의 결과.
나는 아키와 함께 이 계획을 구상한 1년 전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데이터가 쌓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강한 확신이 들었다.
나스 대륙에 다이어트 붐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칼라카스 꽃잎은 나스 대륙력 1417년부터 각광 받기 시작하여, 대륙의 모든 비만인의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예전에 내가 칼라카스 꽃잎을 처음 봤을 때, 기억 속에서 떠올린 툴팁이었다.
이것보다 일 년 빠르게, 확실하게 치고 나갈 생각이었다.
내게는 남들에게 없는 미래 지식이 있으니까.
더 많은 꿀을 빨기 위해서 미래 지식을 이용한 ‘선점(先占)’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그렇게 회의를 마친 뒤.
나는 아키에게 물었다.
“쇼케이스(Showcase)에 참석할 상인들은 충분히 모았지?”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경비를 제공해서라도 모두 모이게 했어요. 정말 성대한 쇼케이스가 될 거예요.”
“좋아. 시연은 내게 맡겨. 그다음의 판매와 협상은 네가 맡고.”
“네, 폐하. 맡겨만 주세요!”
계획은 치밀했고,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대륙 전역에서 몰려든 대상인들 앞에서 칼라카스 꽃잎의 효과를 목청껏 알리는 것!
그것뿐이었다.
* * *
점심을 막 지난 시간.
크리비아 왕국의 중앙 대광장에 마련된 특설 무대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몰리고 있었다.
모두가 아르케네스 상단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상단주와 상단의 관계자들이었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다이어트 전용 재료를 판다는 소식에 상인들의 관심은 매우 컸다.
지금껏 나스 대륙에서 가장 효과적인 다이어트 방법은 딱 두 가지로 알려져 왔다.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는 운동.
그리고 대신관이나 대사제로부터 받을 수 있는 ‘고난의 축복’이라는 기도가 전부였다.
문제는 고난의 축복이 엄청난 신성력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에, 한 명의 대신관이 하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희소성으로 인해 기도의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었는데, 최소 호가가 100골드였다.
그것마저도 대륙 전역에서 예약이 밀려 어디를 가도 6개월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문제는 다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인 운동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먹는’ 다이어트에 관심이 높은 귀족 고객층은 아이러니하게도 구슬땀을 꾸준히 흘려야 하는 운동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먹으면서 빼고 싶다!
그것이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다이어트의 최적 조건이었다.
하지만 실현할 방법이 없어 아쉬워하던 차에 아르케네스 상단에서 획기적인 상품을 내놓은 것이다.
그 때문에 쇼케이스에는 귀족가의 여인들도 꽤 많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자레드는 칼라카스 꽃잎의 감량 효과를 실험체(?)로 소화해 줄 마룬과 함께 무대 뒤에 있었다.
마룬과 마리 남매는 사나레 성지에 자레드가 지어 준 종합병원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을 정성을 들여 돌보고 있었다.
환자를 돌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아무것이나 막 먹은 탓인지.
마룬의 몸은 불과 몇 개월 전에 비해 두 배 수준으로 살이 실하게 올라 있었다.
“후우, 후우.”
“마룬, 많이 긴장 돼?”
“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 보는 것이 처음이라…….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만 믿어. 오늘부로 두툼한 살집이 가득한 몸에서 벗어나 제법 날씬해진 몸을 가질 수 있게 될 거야.”
“사실 저도 예전에 몇몇 상단에서 파는 다이어트 약을 먹어 본 적이 있었지만,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폐하, 정말로 말씀하신 대로 극적인 변화가 가능한 것입니까?”
“원래대로라면 먹고 나서 시간이 좀 걸리지. 순환을 촉진시키면서 체중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하는 절대 시간이 있거든.”
“한데 폐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응. 내게는 아무나 할 수 없을, 초고속 다이어트의 꼼수가 있지.”
자레드가 잔뜩 긴장한 마룬의 어깨를 살살 주물러 주며, 안심하라는 제스처를 끊임없이 보냈다.
의 가속 버그.
사실 버그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시스템에 위협적 변화가 일어나는 가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몬스터 따위가 갑자기 죽는 가속 버그라면 문제가 됐겠지만, 일부 음용물에 한정된 버그였다.
그저 약물이나 음식 효과가 살짝 빨리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었기에 별다른 이슈가 되지 않았다.
다이어트 관련 제품들도 마찬가지.
상점에서 파는 커스터마이징 전용 약물로 1초 만에 뚝딱 날씬한 외형을 바꿀 수 있는 유저들에게 이 버그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계는 다르다.
극적인 변화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 줄 수 있었다.
다만 대전제가 하나 있다.
가속 버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마력이 2만은 족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룬에게 자레드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자신만의 꼼수가 있다고 얘기한 것이다.
“마룬, 가자. 네게 오늘 세상에서 가장 극적이고 의미 있는 날을 만들어 줄게.”
자레드가 마룬의 손을 꼭 붙잡고, 수많은 관람객이 기다리고 있을 특설 무대로 향했다.
나스 대륙 역사상 전례가 없는!
국왕이 직접 나서는 상품 판매 쇼케이스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