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53
제 153화
55장. 암흑 교단의 마수 – 1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충격 같은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덤덤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이자벨의 모습에서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내가 싫어?”
농담이었다.
가라앉은 이자벨의 기분을 띄워 주고자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나는 농담을 건넸지만, 이자벨은 더 진지하게 내 말을 받았다.
“아니, 네가 더 높은 세계로 달려갈 수 있도록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싶어. 남녀의 관계가 아닌, 정말 군신의 관계로.”
“이자벨, 네가 있어 늘 감사함을 느껴. 그리고 네게서 얻은 심안은 정말 유용하게 쓰고 있어.”
“처음에는 내 심안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그렇게 분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잘됐다고 생각해. 너는 평범한 사람이 절대로 아냐. 이 시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을 타고났어!”
힘주어 말하는 이자벨의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나를 인정해 줬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이자벨, 정말 그렇게 보여?”
“2년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는지 생각해 봐. 6클래스 마법사가 됐고, 한 나라의 왕이 되었으며, 드넓은 영토와 대륙 최고의 성지까지 가지게 됐어.”
“그렇지.”
“이건 그저 운이 좋았다는 말 따위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냐.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너는 내게 새로운 몸을 얻게 해 준 은인이야. 그래서 더욱 네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 늘 같은 자리에서 널 비춰 줄 수 있는 별빛이 되고 싶어.”
“별빛…….”
이자벨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해 봤기에 그 마음을 접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아마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이자벨은 수많은 고민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을 것이다.
여기서 구구절절 말을 이어 간다면, 이자벨에게 큰 실례가 된다.
“그래, 이자벨. 우리 앞으로도 잘해 보자. 드레자 주술단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게.”
“응, 나 역시 나와 너, 그리고 왕국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이 없도록 최고의 조직으로 키워 내겠어!”
“잘 부탁해.”
이자벨과 악수를 나눴다.
그러자 이자벨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말해 줄 것이 있어.”
“뭔데?”
“이 몸의 원래 주인. 그 아이의 가족을 찾은 것 같아.”
“정말?”
“응. 실제로 가족들을 한 번 만났고…… 설명도 자세하게 해 드렸어. 시간이 좀 걸렸지만, 모두 이제는 받아들였지.”
“가족이 생긴 거네?”
“그런 셈이지. 엄밀히 말하면 내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언제든 모시고 와. 책임지고 네 가족은 내가 극진히 모실 테니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가족이라는 말이 너무 어색하지만, 그래도 다시 잘 적응해 보려고 해.”
“좋아. 잘됐다. 네 마음속 한구석에 있던 미안함도 조금은 덜어 낼 수 있겠네.”
이자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녀와의 대화는 끝났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는지, 대화가 끝나자마자 이자벨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던 모든 것을 털어 낸 듯한 후련함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뒤로 5일간.
나는 드레자 타워에 머물며, 주술단의 훈련을 이자벨과 함께 주관했다.
연계하는 공격 전술을 연습하기 위함이었다.
일전에 카슨을 유인해서 일격에 제거했던 것처럼, 다가올 전쟁에서도 적의 주요 무장이나 마법사를 ‘골라내어’ 제거할 계획이었다.
국왕인 내가 직접 훈련을 주관하자, 드레자 주술단의 사기도 크게 올랐다.
전생에서 뉴스를 볼 때, 왜 지도자들이 현지 시찰이나 지도를 나가는지 늘 궁금했었는데.
주술사들의 반응을 보니 이해가 갔다. 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더 열정적으로 움직였고, 사기가 높아졌다.
시간차를 두고 들어오는 나에 대한 충성도 최대 달성과 1차 각성의 알림 메시지는 덤이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드레자 주술단은 우리 왕국의 둘도 없는 비밀 병기가 될 거야.’
그런 확신과 근거는 충분했다.
사람들이 천시하고 무시했던 주술사들의 부활.
그들이 우리 왕국에서 조용하지만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 * *
마지막 훈련일.
구슬땀을 흘려 가며 훈련에 매진한 나와 주술사들의 호흡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나를 포함한 백 명이 넘는 인원들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조화를 이뤘다.
마법이나 검술은 사람의 수가 늘어나도 시너지효과를 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술은 다르다.
호흡만 잘 맞으면, 인원은 다다익선이다.
강제 소환 주술이나 강제 무력화 주술은 늘어난 인원만큼 화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훈련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휴식을 취했다.
“후우. 후우.”
“고생했어. 땀 좀 닦지?”
“아이고, 친절도 하셔라. 하지만 손수건 있으니까 됐거든?”
“너무 쌀쌀맞은 것 아니냐?”
“혼자서도 잘하니까 걱정 마.”
이자벨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구슬땀을 닦아 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한데 바로 그때.
지잉! 지이이잉!
이자벨이 끼고 있었던 목걸이의 펜던트에서 격렬한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은 원석.
그것이 쉴 새 없이 떨리며, 붉은 기운을 끊임없이 방출하고 있었다.
“침입자가 있군.”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머물고 있는 별궁과 주요 시설인 드레자 타워 주변은 이중의 보안 체계가 가동되고 있다.
첫 번째 보안 체계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알람 마법진이다.
특정 지역에서 10kg 이상의 물체가 스치거나 밟고 지나가면, 즉각 알람 마법이 작동된다.
때문에 소형 동물이나 어린아이의 움직임에는 반응하지 않으나, 성인이 지나간다면 바로 감지가 가능했다.
문제는…….
“알람 마법진은 전혀 반응을 안 했다는 거지.”
내가 가지고 있는 알람 감지용 아티팩트에는 아무런 신호가 없었다.
그것은 즉, 침입자들이 알람 마법진을 눈치챘거나 이를 무력화하는 수단을 썼음을 뜻했다.
“주술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네.”
“그런 것 같군.”
이자벨이 바로 원석을 어루만지며, 별궁에 설계된 주술진의 위치를 확대해 보였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보안 체계이자 알람 마법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주술진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듯해서 미리 대비해 뒀는데, 역시 안배를 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서른.”
침입자의 수를 파악했다.
확실한 것은 제법 깊숙하게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알람 마법진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
덕분에 경각심도 들었다.
마법에 모든 것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으니 말이다.
“최정예만 불러와 줘.”
“경비대나 기사단은?”
“왁자지껄하게 할 필요 없어. 인원이 늘어나면, 그만큼 신경 써야 할 아군의 수도 늘어.”
나는 냉정하고 침착하게 답했다.
인원이 많다고 능사는 아니다. 특히나 상대가 정체불명이라면 리스크는 더욱 높아진다.
여차하면 나는 자리를 바로 이탈할 다수의 마법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드레자 주술단의 최정예 전력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잠깐, 자레드.”
“응?”
“암흑 교단의 단원들이야. 주술진이 놈들 특유의 마기를 감지했어.”
“드디어 올 것이 왔군. 클루제 이후로 너무 조용하다 했어.”
그들이 나를 노릴 것이라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다.
대놓고 라디우스 교단의 선봉장 노릇을 해 온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교단의 반응은 늦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클루제를 조기에 처단한 것에 대한 학습 효과일 것이다.
자칫 내게 잘못 걸렸다가는 클루제의 전철을 밟을 수 있는 만큼…… 다들 조심하는 거겠지.
“준비할게.”
“응, 여긴 내게 맡기고 도착하더라도 합류할 때를 기다려. 처음부터 드러낼 것 없어.”
“알겠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었지만, 되레 우리는 침착했다.
나는 일단 어떻게 싸워도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이자벨은 나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했다.
스으윽.
이내 이자벨의 모습이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나는 아공간에서 소환한 타넥스에 곧바로 인비저빌리티 마법을 걸었다.
투명화는 공격 행위를 하기 전까지는 풀리지 않기에, 타넥스를 적절한 곳에 숨겨 둘 작정이었다.
“음.”
그리고 주변을 쓱 훑었다.
간격이 좀 멀기는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횃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건은 이 정도면 충분해.’
몇 가지로 나뉜 전투 계획을 치밀하고 빠르게 머릿속에 세운 뒤.
“랄랄라. 음음음.”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주변은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저 멀리 담 너머에서 경비병이 기침을 하는 소리까지 들렸을 정도니까.
바로 그때.
“…….”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내 목이나 등을 노리고 암기 따위를 날릴 준비를 하고 있음을.
침입자의 등장과 동시에 미리 주변에 두텁게 마력을 뿌려 둔 것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예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마법사는 엄두도 못 낼 5천에 가까운 마력을 주변에 뿌려 놓아 보지 않고도 그들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음 순간.
푸슉!
뭔가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목 뒤에서 따끔한 느낌이 났고, 안에 있던 액체가 주르륵 흘러들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안 봐도 뻔해. 독침이겠지.’
독, 그리고 침.
가장 손쉬운 제압 수단이 아니던가?
특히 암흑 교단에게 독은 마법사의 마법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체내에서 뭔가 기분 나쁜 기운이 퍼지는 것이 느껴진다. 100% 독의 기운이다.
하지만 느낌만 있을 뿐,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하나도 없었다.
만독불침지체가 괜히 사기가 아니다! 모든 독에 면역이니까.
그래서 망자의 정원을 공략하고 돌아온 뒤, 내가 아끼는 동료들에게도 모두 작업을 해 둔 것이다.
물론 덕분에 헤이즈부터 시작해서 모든 동료들의 더럽고 추한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는 했지만! 다행히 트라우마는 없었다.
왜냐고?
나도 라키스의 앞에서 볼꼴 못 볼꼴 다 보여 줬으니까.
어차피 사람은 모두 트림하고, 방구 뀌고, 똥 싸고 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아서다.
제아무리 예쁜 여자도, 잘생긴 남자라도 생리 활동은 무조건 한다. 안 하면 죽는데 할 수밖에.
“끄윽.”
나는 그럴듯하게 침으로 만든 거품까지 토해 내며,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그러고는 한동안 몸을 부르르 떨며, 확실하게 중독된 리액션을 보여 줬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투욱.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녀석들 중 한 명이 담을 넘어서는, 지면에 사뿐히 안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람의 흐름을 따라 빠르게 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차가운 손길이 내 몸에 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