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11
제 211화
72장. 치명적인 일격 – 1화
트란퀼루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클로이에게 몇 가지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그중에 가장 특이했던 것은 그레이 엘프 특유의 가왕(假王)제도였다.
그레이 엘프는 선대에 이어 왕위를 승계하더라도, 5년간의 임시 기간이 있다고 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왕의 발언권이 정확히 50%로 제한되는데, 나머지 50%의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대장로 회의라고 한다.
현재 그레이 엘프족은 그러한 가왕의 제도에 따라 트란퀼루스가 즉위한 상태였다.
일종의 적응 기간이기에 정식 대관식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정확히 5년을 채워야만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그레이 엘프의 터전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엘프들이 나타났다.
‘트란퀼루스.’
나는 한눈에 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과연 트란퀼루스는 소문대로 조각같이 생긴 미남이었다.
외모라면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인데, 트란퀼루스는 그 이상이었다.
“오셨군요, 대왕.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뵙는군요. 대왕.”
트란퀼루스와 인사를 나눴다.
공식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우리나 그쪽이나 서로 어색한 분위기가 오갔다.
“오라버니.”
“클로이, 어서 오거라! 모두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한달음에 오빠인 트란퀼루스에게 달려간 클로이가 그의 품에 꼭 안겼다.
우애 깊은 남매의 모습은 보기에도 훈훈한 광경이었기에 바라보는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다만 특이점이 있다면, 트란퀼루스를 위시한 다른 일행의 몸에 제법 핏자국이 많다는 점이었다.
내 시선이 유독 핏자국에 머물러 있음을 알았는지, 트란퀼루스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블랙 오크와의 교전이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 블랙 오크의 국경 침범이 잦다 보니…… 흔한 일입니다. 지금은 모두 진압되었으니, 안심하고 따라오시지요.”
우리는 트란퀼루스의 안내에 따라 그들의 궁전으로 향했다.
“어머니, 잘 지내셨죠?”
그사이, 클로이는 그녀의 어머니의 곁으로 가 있었다.
가족의 사랑이란, 종족도 초월한 생명체 공통의 것이 아니던가?
클로이가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를 꼭 끌어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 * *
첫 행사는 대대적인 환영식과 함께한 오찬(午餐)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와 내 신하, 동료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레이 엘프도 똑같았다.
꽤 많은 대장로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100살은 족히 넘긴 존재들이었다.
오브렌이 만약 이 자리에 참석했다면, 그 역시 대장로들에게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았을 듯했다.
그렇게 1차 환영 행사를 마친 뒤, 이어서 2차 환영 행사가 별궁에서 이뤄졌다.
다만 그 자리에는 세 사람이 참여하지 않았다. 나와 클로이, 그리고 트란퀼루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트란퀼루스가 먼저 비공식 회담을 청했기 때문이다.
그레이 엘프와의 관계 강화 및 수교를 위해 온 자리였기에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2차 환영 행사는 라키스가 나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전담토록 하고, 자리를 잡았다.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조용한 회담장에서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의 대화가 시작됐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트란퀼루스였다.
“얼마 전에 움브라 교단을 완전히 궤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교주의 목까지 직접 베셨다지요?”
“그랬지요. 공식적으로 움브라 교단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제단도 모두 무너져 버렸지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암흑 교단은 우리 그레이 엘프도 껄끄러워하는 존재들. 대장로들이 앞을 다퉈 대왕을 칭송하더군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사실 최근에 암흑 교단의 일원들이 다녀간 적이 있었습니다.”
“최근에요?”
“그렇습니다. 대뜸 다수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는 교단과의 전략적 동맹 관계를 제안하더군요.”
“오라버니, 승낙하셨어요?”
“미쳤느냐? 악마와 손을 잡느니, 차라리 그 손을 자르고 말지.”
트란퀼루스의 대답은 명쾌하면서도 단호했다. 그 말에 안심했는지, 클로이도 웃었다.
“그들이 어떤 동맹 관계를 원하던가요?”
“일단 일차적으로 상호 불가침을 맺길 원했습니다. 그것도 피의 의식으로 말이죠.”
“절대 어길 수 없는 맹약 말이군요.”
“미친X들, 그레이 엘프를 뭐로 생각하는 건지…….”
트란퀼루스가 이를 갈았다.
감정 표현을 좀처럼 하지 않는 클로이와 달리, 트란퀼루스는 표현이 시원시원했다.
얘기를 좀 더 해 봐야 알겠지만, 트란퀼루스와의 대화가 꽤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눈치를 보며 간을 보는 대화라면 영양가가 별로 없기 마련인데, 그의 성격상 그런 대화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대왕, 우선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모자란 클로이를 데리고 참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고요?”
“가르침이랄 것까지야.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클로이가 그저 순풍을 탈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겸손하게 답했다.
진심이기도 했다.
클로이는 그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엘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포르미도를 한 트럭을 갖다 놨어도, 절대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 세계를 경험한다며 엘라 님과 나섰을 때, 어찌나 말렸었는지…… 아직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머니는 울면서 말리셨죠.”
클로이가 덤덤하게 말했다.
다만 눈빛이 떨리는 것으로 봐서는 그때 나름대로 굳은 결심으로 박차고 나섰던 듯했다.
“처음에는 대왕에 대한 의심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인간 남자라는 게…… 아무래도 여성 엘프라고 하면 그릇된 마음을 품기 쉬우니까요.”
“이해합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십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엘프에게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은 선망과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지만, 일부는 그릇된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호색한들.
그들은 엄청난 돈을 들여서라도 엘프를 자신의 노예로 삼고자 했다. 정확히는 성노예로.
그래서 용병들 중에는 목숨 걸고, 그레이 엘프나 다크 엘프를 납치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상당히 큰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켜보니 대왕은 정말 다른 사람이더군요. 제 여동생을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해 주시고, 잠재된 가능성을 만개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클로이가 편지로 얘기하더군요. 허락한다면, 크리비아 제국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고요.”
“오라버니! 그건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하셨…….”
“하하, 그랬었나? 이를 어쩌나. 이미 다 말해 버렸는걸?”
“오라버니……!”
클로이의 질책에 트란퀼루스가 익살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오랜 기간 대왕의 행보를 지켜보았고, 저는 전적으로 대왕을 신뢰하게 됐습니다.”
기분이 참 좋았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클로이가 나를 칭찬하고, 제국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아울러 그런 클로이의 모습을 보고, 트란퀼루스가 내게 신뢰를 가졌다는 사실도 고마웠다.
“절대 호감을 얻기 위해 어쭙잖은 수작 따위를 부린 것은 아닙니다. 클로이에게 보인 제 마음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클로이는 대륙 최고의 어쌔신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아이에게 억지로 활을 쥐여 주고, 궁술을 연습시키려 했으니……! 못난 저의 어리석음을 탓해야겠지요. 하하하.”
“좋은 여동생을 두신 겁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녀석이 저보다 먼저 태어났더라면, 왕위에 진즉에 올랐을 것인데…….”
트란퀼루스의 시선이 왕궁 한옆에 걸린 선대 왕들의 초상화로 향했다.
가장 마지막 자리에 위치한 초상화는 트란퀼루스와 클로이의 부왕(父王)이었다.
“아직 모자란 것이 많은 왕이라서 홀로 헤쳐 나갈 힘이 부족합니다. 대왕, 클로이에게 보여 주신 그 신뢰, 우리 그레이 엘프족에게도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트란퀼루스의 물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속마음을 단번에 털어놓는 과감함도 있었다.
나는 대환영이었다.
축복받은 그레이 엘프의 땅.
그리고 그들이 가진 뛰어난 전투 기술과 문물들은 성마 대전에 최적화되어 있다.
특히 정령술과 연계해서 펼치는 그레이 엘프 특유의 궁마법은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었다.
“저 역시도 그 말을 하고 싶어, 클로이를 통해 만남을 청한 것입니다. 크리비아의 모든 명예와 이름을 걸고, 그레이 엘프와의 협력을 약속하겠습니다.”
짝짝짝.
지켜보던 클로이가 수줍게 박수를 쳤다. 타이밍이 뭔가 생뚱맞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를 내보이고 싶었는지, 트란퀼루스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최근 블랙 오크의 국경 침입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볼 점은 블랙 오크들이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특이점이 있습니까?”
“이중, 삼중의 교차 가공을 거친 듯하지만…… 데스먼드 제국의 대장장이들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블랙 오크의 뒤를 데스먼드 제국이 봐주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타 지역의 오크나 트롤과 같은 개체에게 유입된 무기가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지원하고 있군요. 나서기 껄끄러운 지역에서 대신 활동해 줄 꼭두각시를 구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다수의 흑마법사들도 함께 유입된 것 같습니다. 협력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요.”
“…….”
협력 이상의 ‘무언가’라는 말에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암흑 제단을 떠올렸다.
제단은 저장고 같은 개념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사악한 마기를 쌓고 쌓아, 성마 대전에서 마수들의 에너지원으로 쓰이게 한다.
지금껏 대외 행보가 거의 없었던 데스먼드 제국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은, 대척점에 있는 내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대왕, 제 생각에는.”
그렇게 트란퀼루스의 말에 내 의견을 개진하려던 바로 그때!
“……?”
나는 내 눈을 의심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트란퀼루스가 앉아 있는 의자, 바로 그 뒤에서 열린 차원문을 본 것이다.
디멘션 도어 마법으로 열린 소형 차원문이 아니라, 아웃브레이크와 유사한 형태로 열린 대형 차원문이었다.
“대왕!”
“오라버니!”
나와 클로이의 외침이 섞였다.
나는 단거리 텔레포트, 클로이는 재빠른 이동으로 빠르게 트란퀼루스에게로 붙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차원문 안에서 뛰쳐나온 ‘무언가’의 움직임이 반박자 빨랐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
손을 제대로 쓸 틈도 없이, ‘무언가’가 내지른 장창(長槍)이 트란퀼루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클클클.”
동시에 적의 정체가 드러났다.
마수였다.
그레이 엘프의 신성한 터전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절대 나와서는 안 될 괴물의 등장이었다.
“크윽…….”
두 눈을 부릅뜬 트란퀼루스의 눈빛에 가득했던 생명의 불씨가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즉사였다.
트란퀼루스가 죽은 것이다.
환희의 찬미나 대회복을 쓸 틈도 없이 벌어진…… 사고였다.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