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33
제 233화
78장. 다섯 번째 변곡점 – 3화
[자레드 – Lv. 399] [근력 : 935][체력 : 900] [마력 : 61,927][지혜 : 2,035] [민첩 : 590][매력 : 580] [물방 : 2,055][마방 : 3,408] [신성력 : 1,550] [잔여 스탯 : 0]“이제 남은 건…… 나스 대미궁 공략인가. 첫 번째 세이브 포인트가 있는 50층까지는 가야겠지?”
나는 새벽의 어둠이 짙게 깔린 옛 렌투스 제국의 황궁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지평선 너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데스먼드 제국의 영토가 있다.
이제는 우리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닿게 된 곳이자, 암흑 교단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알짜배기 땅을 점령한 데스먼드 제국군은 삼중으로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때문에 쉽게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어쨌든 렌투스 제국까지 병합하는 데 성공한 나는 모든 전력을 내치에 쏟아부었다.
전쟁도 좋지만, 이러다가는 국력이 휘청거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쟁은 천문학적인 자금과 식량을 필요로 하는 엄청난 일이었다.
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나라들이 큰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와 동시에 몰락했는지 체감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우선 나는 대기근에 빠진 상태였던 렌투스 제국 전역에 소트라스를 널리 보급했다.
오브렌은 데스먼드 제국 등으로 작물이 유출되는 것을 우려했지만, 나는 상관없다고 했다.
손도 쓰지 못하고 백성들이 굶어 죽으면, 성마 대전은 둘째 치고 국가의 운영 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소트라스는 놀라운 자생력을 바탕으로 여기저기 뿌리를 내리고, 빠르게 열매를 맺었다.
대기근의 공포를 온몸으로 실감하며 두려워하던 백성들은 환호했다. 먹을 것이 생겼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었을 테니까.
덕분에 새로이 합병된 옛 렌투스 제국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나에 대한 충성도가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맞물려 나는 그동안 아껴 왔던 영지(영토) 관련 퀘스트들을 단숨에 실행했다.
이를테면 현지 지도, 대민 봉사, 대중 연설과 같은 것들이었다.
제국의 백성을 상대로 한 이벤트야 종종 있었지만, 이번에는 영지 단위로 잘게 쪼개어 진행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小)황금기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현재 ‘크리비아 제국’의 내정 수치가 적용되고 있는 영토에는 합병된 렌투스 제국은 없었다.
내가 통합을 의도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만약 시스템상으로 합병을 시행하면, 황제 등극으로 시작된 황금기가 강제로 끊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통합 제국이지만, 내가 관리하는 시스템상으로는 별개의 국가인 것처럼 조작(?)을 해 두었다.
그리고 렌투스 제국의 옛 땅들을 각각 대충 이름을 지어, 영지로 분류를 해 뒀다.
이를테면 1번 영지, 2번 영지, 이런 식으로.
그다음에는 영지를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이벤트를 진행한 것이다.
그러자 손쉽게 충성도 최대치를 찍을 수 있었고, 각각의 ‘가짜 영지’마다 황금기가 발동됐다.
덕분에 옛 렌투스 제국의 땅은 빠르게 예전의 생기와 생산력을 확보하며, 전후 복구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실제였다면 불가능했을, 의 시스템 적용을 받는 나이기에 가능한 전략이기도 했다.
일단 안정화를 위한 내치의 기반은 확실히 다져 두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신들이 조용하다는 것?”
나는 렌투스 제국이 멸망하면 많은 신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거나, 가호를 내릴 줄 알았다.
하지만 마치 작정하고 ‘잠수’라도 탄 것처럼, 너무 조용했다.
반응이 너무 없어서, 내가 메시지를 놓쳤나 싶었을 정도였다.
확인해 본 결과.
정말 조용한 것이 맞았다.
그들에게 렌투스 제국의 합병은 그리 큰 이슈가 아니었던 듯했다.
“벌써 시간이…….”
어느덧 새벽 2시.
약속의 시간이 됐다.
오늘은 이즈엘이 지정한 별장에서 대화를 나누기로 한 날이었다.
낮이나 저녁이 아닌, 새벽에 대화를 하자고 요청한 것은 내가 아닌 이즈엘 쪽이었다.
뭔가 좀 더 은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달빛마저 사라진 시간이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한 듯했다.
“복잡하겠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나는 복잡하기 그지없을 이즈엘의 심경을 예측할 수 있었다.
렌투스 제국이 합병되면서, 신데르스 왕국은 사면이 우리 제국에 둘러싸이게 됐다.
육지 속의 섬.
이것이 작금의 신데르스 왕국을 상징하는 정확한 말이었다.
하다못해 대외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제국의 국경을 어디든 통과해야 했고.
그것은 수입도 마찬가지였다.
자급자족을 할 수 없다면 외부에서 들여와야 하는데, 모든 육로가 크리비아 제국의 관할이었다.
이것은 왕국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치명적인 상황일 터.
나는 그 부분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지만, 먼저 화제로 삼지는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이즈엘이 드디어 답을 낸 것 같았다.
* * *
그 시각.
신데르스 왕국의 외곽에 위치한 이즈엘의 별궁.
그곳에서 이즈엘은 초조한 마음으로 자레드를 기다리며, 여동생 마이라와 함께 앉아 있었다.
“오라버니, 왜 이리 불안해하세요?”
“모르겠구나. 이제는 함부로 가까이할 수도, 친근하게 여길 수도 없는 사람을 만나는 듯해서 말이다.”
“비약하실 필요 없어요. 지금도 여전히 오라버니와 자레드 황제는 최고의 동료잖아요.”
“내가 내린 결정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선왕께서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참담해하실지…….”
“오라버니가 없었다면, 우리 왕국은 진즉에 암흑 교단의 손에 넘어갔을 거예요. 그럼 지금쯤 데스먼드 제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겠죠.”
힘주어 말하는 마이라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즈엘은 자신으로 인해 신데르스 왕국이 작금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경제, 군사, 무역 할 것 없이 사실상 크리비아 제국에 종속되어 버린 지금의 상황 말이다.
하지만 마이라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지금의 이 모습이 가장 최선이라고 여겼다.
이즈엘이 아닌 프탈린이나 제스가 왕위에 올랐다면, 지금쯤 왕국은 지옥의 불바다가 됐을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이 왕국을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홀로 맞서기에는 크리비아 제국이 너무 크다.”
“잃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라버니의 꿈이 백성들의 평안과 풍요로움이라면……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 오셨으니까요.”
“……아앗.”
이즈엘이 눈시울을 붉히려던 그때, 자레드의 텔레포트를 알리는 소환음이 거칠게 들렸다.
이윽고 두 사람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도 예절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힘의 논리에 의해 학습된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이 반응했다.
“대왕, 오셨습니까.”
이즈엘이 먼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고, 자레드가 멋쩍은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예를 갖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사이에 인사 정도야 가볍게 대신해도 되는 것을요.”
“하하, 이제 그러기에는 대왕이 너무 큰 태양이 되어 버리셨지요. 존경하고 경외할 따름입니다.”
“음…….”
자레드가 침음성을 냈다.
예전부터 이즈엘은 자신에 대해서 줄곧 깍듯하게 예를 갖춰 오기는 했다.
그가 국왕이고, 자신이 공작이었던 시절에도 둘과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크게 우위를 보이지 않은 채 대등한 편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균형의 추가 급격하게 자신에게로 기우는 듯하더니.
지금은 아예 천장과 저 아래 바닥에 위치한 상하 관계로서, 자신을 높이 대하는 듯했다.
“오늘은 별궁 안이 아니라, 밖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대왕, 괜찮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좋습니다.”
자레드가 응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즈엘과의 진지한 대화는 언제든 좋았다.
“마이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주변을 호위해 줬으면 좋겠구나. 어차피 대왕의 뮤트 마법으로 음성은 차단되겠지마는.”
“예, 폐하. 호위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맡겠습니다.”
무장한 상태인 마이라가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는 자레드와 이즈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은하게 횃불이 밝혀진 별궁 외곽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자레드와 이즈엘의 거짓 없는 솔직한 대화가 시작됐다.
* * *
“지난번 렌투스 제국의 기습으로 인해 본국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대왕과 크리비아 제국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을요.”
“사실…… 현재 본국은 크리비아 제국에 많은 것이 종속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종속…… 이라는 단어보다는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표현 정도가 좋겠군요.”
나는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물론 이즈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세로 일관하는 이즈엘의 반응이 내심 불편하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어쨌든 렌투스 제국과의 전쟁 이후로 많은 것을 고민했습니다. 과연 국왕으로서, 주체적으로 이 나라를 지킬 힘이 있는가 하고.”
“음…….”
“정말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현실을 직시할수록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국이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그릇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대왕.”
“이미 많은 신하들과 오랜 시간 논의를 거쳤고, 백성들의 반응도 충분히 살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즈엘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내용을 말하는 것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모든 정리가 끝나 홀가분하게 말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만감이 교차한 채 이 말을 하고 있을 이즈엘의 속마음이 느껴져 그만 입술을 질끈 깨물어 버렸다.
내가 현생에서 새 삶을 살게 된 뒤, 인생의 변곡점을 만들도록 도와준 존재가 바로 이즈엘이었기에.
그가 내게 각별한 존재로 느껴지는 만큼, 더욱 여실히 느끼게 되는 복합적인 감정이기도 했다.
나는 침묵을 지켰다.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이즈엘이 그의 입으로 속마음을 내게 후련하게 토해 내길 바랐기 때문이다.
“……신데르스 왕국의 옥새와 왕좌를 바치오니, 부디 크리비아 제국은 본국의 항복을 받아 주십시오.”
“…….”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사실 이렇게 될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드러내어 신데르스 왕국과 이즈엘을 압박하지는 않았다.
내게는 강압으로 얻어 낸 수동적인 항복보다, 마음으로 얻어 낸 능동적인 항복이 더 필요해서였다.
그래야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이기가 훨씬 수월했다.
아울러 새로운 군주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반감도 대폭 감소시킬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사전 작업을 이즈엘이 알아서 하기를 바랐고……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신이시여,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한 저를 영리하다 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간악하다 욕하실 것입니까?’
나는 자조 섞인 질문을 하늘 어딘가로 던졌다. 하지만 그것은 감정적인 죄책감일 뿐이었다.
이성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참 잘했다고.
신데르스 왕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이를 그야말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만든 것이라고!
그렇게 칭찬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