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51
제 251화
81장. 창궐(猖獗) – 3화
그 시각.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생이 많았소. 진즉에 이런 자리를 마련해야 했는데…… 짐의 불찰이오.”
“아니옵니다, 폐하! 이 연회에 초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신들은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크리비아 제국 황도의 황궁에서는 자레드의 주최로 열린 연회가 한창 펼쳐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나스 대미궁 공략에 참석했던 10인의 동료들은 없었다.
모두 황궁으로 복귀하기 무섭게 별도로 마련된 회복실로 가서는 거의 반쯤 뻗었기 때문이다.
다들 내색을 안 했다 뿐이지, 누적된 피로가 상당해 체력 좋은 라키스도 1분 만에 곯아떨어졌다.
어쨌든 그래서 이 자리에는 그들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이 있었다. 애초에 그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기도 했고.
쪼르르르.
자레드가 가장 먼저 와인을 따라 주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발데스였다.
선전 장관 발데스.
그는 묵묵히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자레드를 최고의 군주로 만들고 있었다.
물론 과장은 없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나름 거짓도 섞을까 생각했던 발데스였지만,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자레드가 그간 세워 온 공적과 업적들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실만을 늘어놓아도 부족할 정도였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칭송할 수는 없으니, 시즌을 나누어 다뤄야 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제 제국민들의 문화생활로 자리 잡은 영화 상영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일반 상업 영화도 있었으나, 자레드의 공적을 기리는 기록 영화도 꽤 많았다.
의외로 제국민들은 전자보다 후자에 더 열광했는데, 그것은 무한히 뻗어 나가는 제국의 영광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발데스 장관, 그간 정말 고생이 많았소.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내 조만간 공식적인 휴일을 만들어 주리다.”
“아닙니다, 폐하. 누구도 강요한 것이 아니옵니다. 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니, 절대 말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한잔합시다.”
“황공합니다, 폐하. 그리고 영광이옵니다. 폐하의 충직한 신하로서 전력을 다하겠나이다.”
“고맙소.”
발데스와 건배를 마치고, 와인을 비운 자레드가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발데스 덕분에 제국민들의 충성심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다.
정말 쉬지 않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황제인 자신을 노출시킴으로써, 심리적 거리감을 크게 좁혔기 때문이다.
물론 자레드의 허용 아래 이뤄진 정책이긴 했지만, 어쨌든 크리비아 제국의 모든 백성들은 자레드를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선을 넘는 비난이나 황제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는 자들은 벌을 받았다.
물론 적당히 손만 봐주고(?) 황제 폐하의 자비라는 이유 아래 훈방 조치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자레드의 발걸음이 바로 옆 사람에게로 향했다.
이 연회장에 중요하지 않은 신하가 어디 있겠냐마는, 발데스만큼이나 소중한 신하.
바로 율리안이었다.
“행정 장관 율리안 경.”
“예, 폐하. 신 율리안, 오랜만에 인사드리옵니다.”
“참……. 같은 황도에 있으면서도 이리 얼굴 보기가 힘들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소?”
“신은 차라리 그것이 잘된 일이라 생각하옵니다. 그만큼 제국의 수많은 현안이 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요즘도…… 춘화 그리오?”
“예. 남는 시간을 쪼개 그리고 있는데, 이바니바 님께서 더 자극적으로 그려 달라고 성화이십니다.”
“여전하군.”
“여전하지요…….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솜씨가 좋은 율리안의 실력 때문에 고블린 로드 이바니바가 춘화를 끊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힘든 점은 없소?”
“이제는 제 일을 보조할 차관과 실무자들을 대거 확보하여, 일 처리에 아무 문제가 없사옵니다. 게을러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
“걱정 마십시오. 폐하께서 행정에 마음을 쓰실 일 없도록, 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겠습니다.”
“믿겠소.”
“예, 폐하!”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자레드는 한 잔의 와인을 꼭 비웠다.
이미 연회 초반부터 와인을 제법 들이켠 터라 취기가 제법 올라 있었지만, 그래도 유쾌했다.
뭐랄까, 신하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겨 주지 못한 것에 대한 감사를 꼭 표하고 싶었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애정을 듬뿍 담아 와인을 따라 주었고, 그때마다 잔을 남김없이 비웠다.
그다음, 자레드의 시선이 향한 곳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두 장인이었다.
바로 아세로와 모이즐.
아세로는 켈디아 무기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상태였다. 아울러 모이즐 역시 보급형 아티팩트 생산 체계를 거의 구축했다.
서로 분야는 달랐지만, 교집합이 많아 다양한 의견 교환이 가능한 장인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얼굴에 숯검정조차 제대로 지우지 못한 채로 연회에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도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륙에서 두 손가락에 꼽히는 야장(冶匠)을 이리 소홀히 모신 짐의 불찰을 용서하시오.”
“아니옵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레드의 때아닌 자아비판에 당황한 모이즐과 아세로가 황망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 누구보다 자레드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두 사람이었다.
별 볼 일 없는 대장장이였던 자신에게 큰 소임을 맡긴 것도 모자라, 대규모 공방을 설치해 준 것이 그였기 때문이다.
아세로와 모이즐의 공방은 단순 투자 예산만 해도 총 이백만 골드, 자레드 전생의 가치에 비교하면 2조 원이 투입된 공방이었다.
그것도 초창기 예산이 그렇다는 소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제국의 예산 다수가 공방에 투입되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와도 공방 인근은 늘 낮처럼 밝게 빛난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만큼 제국에서 중요한 시설이었고, 이곳은 아그레시오 기사단이 직접 지키는 곳 중 하나이기도 했다.
유사시 적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큰 시설이어서였다. 기반시설이기도 하고.
“앞으로 우리 제국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큰 전쟁에 돌입하게 될 것이기에 두 분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오.”
“이를 말씀이옵니까. 신들에게 맡겨 주소서. 영혼을 불살라서라도 지옥에서 최고의 무기를 가져오겠나이다!”
언뜻 살벌하게 들리는 아세로의 멘트였지만, 자레드는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께서 신경을 써 주신 덕분에 최고의 재료들을 엄선하여 아티팩트를 제작 중입니다. 신이 폐하께 꼭 진상하고자 하는 것이 있사오니…… 기대해 주십시오.”
“짐을 위한 것이오?”
“예, 폐하. 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만드는 역작(力作)이옵니다.”
“역작이라……!”
자레드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이즐의 역작!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훗날 당대 최고의 대장장이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그가 공들여 만들고 있는 아티팩트라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다.
아울러 그는 블랙 드래곤 카스트로의 제자가 아니던가?
드래곤의 지식을 갖고 있다면, 예측 불가능한 아티팩트가 제작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자레드가 그래도 될 만큼 아세로와 모이즐에게 전방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폐하와 제국을 위하여!”
묵직하게 결의를 표현하는 모이즐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레드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역시.
빠르게 와인 두 잔을 비웠다.
제법 알코올 도수가 높은 와인이다 보니 취기가 꾸역꾸역 밀고 올라왔지만, 오늘의 소중한 자리를 일찍 파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자리는 계속 무르익어 갔다.
* * *
나는 이어서 마룬, 마리 남매와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나레 성지에 종합 병원을 열어 둔 뒤로 남매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 봉사 중이었다.
물론 라디우스 시국과 대신전의 지원도 제법 받기는 했지만, 어쨌든 최고의 무상 의료를 제공해 백성들을 돕고 있었다.
일전에 ‘다이어트 시연’ 이후 계속 적정 체중을 유지 중인 마룬은 완벽한 훈남이 되어 있었다.
이어서 상업, 재무 담당으로서 여전히 고생 중인 아빌라 역시 치하를 마쳤다.
워낙에 말수가 적은 아빌라라서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눈빛은 깊고 강하게 오갔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빌라는 바렛 자작, 그러니까 선대 영주 시절부터 충성을 바쳐 온 가신이라……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폐하, 걱정 마십시오.”
아빌라는 딱 한 마디 했을 뿐이지만,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다음.
“…….”
마지막 인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폐하.”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은 오브렌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오브렌을 느낄 수 있었지만……. 유독 오늘은 그 사실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일전에 과로로 한 번 쓰러진 이후, 확실히 많이 상한 오브렌의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푹 쉬라는 나의 권고를 따르는 척 저녁이 되면 논밭을 떠났다가 밤에 몰래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경비병과 직속 보좌관이 “이러다가 저희 모두 폐하의 엄벌에 목이 날아갈 겁니다!” 하고 통사정을 했을까?
그 정도로 오브렌은 워커홀릭이었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식과 부인도 못 말리는 일꾼이었다.
“고생이 참 많소, 오브렌 경.”
자연스럽게 오브렌의 고목 같은 양손을 잡았다.
거짓 하나 없이 정말 오래된 나무껍질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 전체는 굳은살이 가득했고, 세월을 피하지 못한 자글자글한 주름 역시 가득했다.
“곧 카타라가 양산에 들어갈 수 있을 듯싶습니다. 최종 검증만 끝나면 됩니다, 폐하.”
“정말이오?”
“하하, 신이 어찌 폐하의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다른 이는 몰라도 폐하의 앞에서 신은 오로지 진실만을 아뢸 뿐이지요.”
“또! 또 무리했구려. 그러니 예정보다 훨씬 앞당겨서 개발을 끝낸 것이잖소?”
“하하, 하하하.”
오브렌이 멋쩍은 듯 웃기만 했다. 올해로 일흔셋이 되는 오브렌은 고령의 나이였다.
이곳은 향상된 의료 기술을 양껏 누리던 전생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여전히 의학적인 부분에서 발전이 미흡한 세상이기에, 평균수명도 60세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 점에서 전생을 기준으로 봤을 때, 오브렌은 여든을 훌쩍 넘긴 고령자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논밭에서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여생을 편히 쉬기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브렌은 몇 차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늘 현장에 나가 있었다.
그것은 사실 선대 영주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오브렌의 철칙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오브렌이 과거에 내게 보냈던 서신의 마지막 문구를 기억하고 있다.
이 문구를 보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오브렌 경…….”
“폐하. 신, 아직 쌩쌩하옵니다.”
그래서일까.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오브렌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애달프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