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00
제 300화
94장. 마왕 강림 – 2화
쏴아아아.
폭우는 여전했다.
성마 대전 6일 차로 접어드는 새벽녘이 되었음에도, 빗줄기는 오히려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
자레드는 아직 덜 파손되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별궁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품에는 오랜 시간 함께했었지만, 제대로 신경을 써 줄 수 없었던 고양이 데리가 안겨 있었다.
-오랜만인 거 같당. 매번 바쁘다 해서 헤이즈에게 맨날 맡기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냥?
“음…….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불길한 얘기는 사절이당.
“너도 좋은 말 할 때 대피소로 가 있어. 거기에 네 친구들 많이 모아 놨다며.”
-그렇당. 이 근처에 있는 고양이들은 죄다 등 따스하게 배 깔고 자고 있을 거당.
“근데 넌 왜 여기에 있는데?”
-그냥. 자레드가 외로울 거 같아서 와 봤당. 마침 여기 와 있기도 했공.
자레드가 부드러운 손길로 데리의 양미간 사이를 살살 쓸어내려 주었다.
품에 안긴 데리는 따뜻한 자레드의 손길을 느끼며,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
자레드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재점검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스킬과 칭호, 가호와 상태창들……. 1414년 1월 1일, 현생에 눈을 뜬 이후로 쌓아 올린 업적들이었다.
특히 스탯과 관련된 상태창을 유심히 보게 됐다. 그간의 성과를 증명하는 단적인 증거여서다.
[자레드 – Lv. 989] [근력 : 1,025][체력 : 1,099] [마력 : 231,004] [지혜 : 3,624] [민첩 : 744][매력 : 712] [물방 : 3,611][마방 : 7,201] [신성력 : 1,550] [잔여 스탯 : 0]‘왠지 레크나트를 죽이고 나면, 딱 레벨 999가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진정한 의미의 만렙?’
에서 불가능한 벽이라고 여겨졌던 999레벨이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간 부단히 레벨을 올리고, 아티팩트를 착용하며 올려 왔던 스탯들이 헛되지 않았다.
누군가와 스탯을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했다. 압도적으로 높았으니까.
‘이론적으로 만들어 둔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개발진에서 최고 레벨 달성 시에도 보상이 있다고는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없네.’
자레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개발자의 서신’에서는 분명 만렙 보상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일반 보상과는 차원이 다른 만렙 플레이어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보상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보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개발자의 서신이 적힐 시점에 레벨이 가장 높았던 플레이어가 겨우 레벨 200대의 초반이었기 때문이다.
단순 계산으로도 십수 년은 걸려야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 개발진도 일단 말만 해 뒀던 모양.
하지만 현생에서 의 시스템을 누리게 된 자레드는 기어이 그 끝을 보기 직전이었다.
‘훗, 어떻게든 되겠지.’
자레드가 조용히 웃어넘겼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의 마법 수준에 대해 평가하는 상태창이었다.
하나의 누락도 없이, 모두 Ex.
모든 계열의 마법에서 완벽하게 Ex의 경지에 올랐다.
그간 정말 많은 마법을 혼신의 힘을 다해 썼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레크나트와 싸우기 전에 완벽한 준비를 끝내서 다행이야.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정말 모든 것이 뜬구름을 잡는 듯했는데.’
자레드가 5년 전에 처음 접했던 자신의 상태창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초고도 비만의 몸으로 시작해서 수명이 대폭 단축된 것은 물론, 마력도 겨우 4클래스 마법 두 번 쓰면 고갈될 수준이었다.
그때는 마법 하나를 시전하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이젠 정말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됐다.
[심안 업그레이드] [심안 : 데큐플(Decuple)]심안은 후반기에 들어 획득 과정에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열 가지의 특성을 모두 획득했다.
시각 방해 보정, 약점 분석, 투시, 직관화, 생체 신호 감지, 진실의 눈, 환상 차단.
이렇게 일곱 가지가 기존에 획득해 두었던 심안의 능력이었고.
지난 1년 동안 추가로 획득한 세 가지 특성은 다음과 같았다.
[암흑의 관찰자 : 마기, 암흑 기를 사용하는 존재의 흔적을 쫓을 수 있습니다.] [다중 연산 추적 : 수많은 마법의 이동 경로를 동시에 예측할 수 있습니다.] [치명적 일격 : 체력 3% 미만으로 떨어진 상대에 한정해 확실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약점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이미 앞서의 전투에서 쏠쏠하게 재미를 봤지만, 레크나트와 상대할 때 더욱 필요한 능력이기도 했다.
‘레크나트가 마법계인지 검술계인지 육체계인지 혹은 그 외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니까.’
그나마 유사한 사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마족 아카로프트와는 달리.
자레드에게도 레크나트는 미지의 세계였다.
앞서 나스 대미궁에서 레크나트의 사전 연습이라는 ‘파라디소’를 만나 전투를 치르기는 했다.
하지만 파라디소는 자신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흉내 냈던, 일종의 도플갱어와 같았던 존재였다.
“설마……?”
불현듯, 괜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파라디소의 모든 보스 몬스터에게는 그 존재 가치와 이유가 존재합니다.] [특히 나스 대미궁은 저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하나의 역작이라고 자화자찬할 수 있습니다.]개발진이 했던 말과 비교해 볼 때, 분명 나스 대미궁은 성마 대전의 축소판이었다.
그렇다면 파라디소와 레크나트를 따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는 없었다.
단지 마왕이기에 앞서 상대했던 마족들처럼 근육질의 악마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완전체일지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능력을 혼합하여 아우르는 존재.
자레드는 마왕 레크나트가 충분히 그런 존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의미의 올라운더.
‘어쨌든 죽지 않으면, 처절하게 싸울 뿐이다.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이내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했다.
고민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결국 실전이니까.
바로 그때.
빠지지직!
정말 시공간을 단숨에 찢어 버리듯, 먹구름 짙은 하늘을 절반으로 가르는 거대한 번개가 쳤다.
그것은 앞서 수도 없이 쳤던 천둥 번개와는 차원이 다른, 아주 위력적인 번개였다.
다음 순간.
“크윽……!”
통증에 둔감해진 자레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두통이 그의 머리 전체를 짓눌렀다.
-자레드! 자레드, 괜찮냥?
“데리, 대피소로 가. 이제 더 이상 황궁은 안전하지 않아.”
자레드가 데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누가 알려 준 것도 아니지만, 이 두통의 원인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왕 레크나트의 현신.
방금 보았던 번개는 바로 그의 현신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나의 군단을 무참히 짓밟고, 헛된 희망을 품고 있을 자레드. 네놈을 전력을 다해 부수겠다.
이어서 염(念)을 통해 전달되는 듯한 레크나트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직접 말을 걸었다기보다는 레크나트가 속으로 되뇌는 말이 그대로 자레드에게 전달되는 듯했다.
-자레드……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당. 다시 만날 때는 나 좀 많이 챙겨 줘랑.
“걱정 마. 곧 갈게.”
자레드는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을 말을 데리에게 건네고는 녀석을 쭉 밀어냈다.
데리는 한참 동안 아쉬운 표정으로 자레드를 지켜보다가 홀연히 황궁을 떠났다.
구르르릉. 구르르릉.
이윽고 천둥소리와 함께 밤하늘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종말을 앞둔 세상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칠흑 같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 *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온몸을 불살라 바닥으로 떨어진 마왕군의 명예를 되찾겠…….”
쇄애액!
투욱. 투욱.
두 마족의 목숨을 거두는 데에는 단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레크나트는 자신의 앞에서 간곡하게 목숨을 구걸하던 마족 둘의 목을 그대로 베어 버렸다.
마검 부르고사.
선대 마왕이었던 부르고스가 남긴 유산으로 다재다능한 레크나트의 검술을 보조하는 병기였다.
“정말 구역질을 참을 수 없는 더러운 향기다.”
레크나트가 비바람에 스며들어 오는 인간계 특유의 공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불결하고 불쾌했다.
게다가 현신 직후에 듣고 확인한 소식이 마왕군의 패배 소식밖에 없으니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
“무라스카, 아카로프트, 제터가 죽었다 이건가……. 자레드 놈이 강한 건가, 아니면 그 머저리 같은 놈들이 방심한 것인가?”
레크나트도 이것만큼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눈을 떴을 때, 최상위 서열의 마족들이 줄줄이 죽어 있는 것을 알고 경악했을 뿐.
한편.
“왕이시여, 제물이 될 인간들을 모두 포박하여 대령하였나이다.”
오랫동안 레크나트의 손발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서열 39위의 마족, 조르카가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뒤로는 포승줄에 묶여 마수들에게 줄줄이 끌려온 5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 온 포로들로 죄 없고 힘없는 나약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녀석들로 내 분노를 달랠 수 있을 성싶으냐?”
“아주 사소한 장난이라 생각하소서.”
“저런 잔챙이들로는 내 작은 관심도 끌 수 없다.”
쇄액!
레크나트가 무심히 들고 있던 부르고사를 휘둘렀다.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가르는 듯한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서걱! 서걱! 사악!
투웅! 투웅!
레크나트의 검이 만든 검풍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사람들의 목이 힘없이 뚝뚝 떨어졌다.
딱 한 번 검을 휘둘렀지만.
그 한 번이 5백 명이라는 목숨을 동시에 앗아가 버렸다.
“후우…….”
레크나트가 죽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자.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탁하고 어두운 기운이 순식간에 레크나트에게 흡수되었다.
이것이 바로 생체의 목숨을 매개체로 삼아 암흑 기를 흡수하여 보충하는 레크나트의 방식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물이 잔뜩 고인 진흙탕의 지면 위를 걸으며, 레크나트가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나스 대륙 남쪽의 어딘가였다.
이미 마왕군에게 모든 것이 짓밟힌, 폐허가 된 전선의 한가운데이기도 했다.
“이제 내 손으로 모든 것을 끝낼 때가 된 것 같군. 하찮은 것들과의 전투라고 해도 발악은 어쩔 수 없다는 건가.”
화르륵!
레크나트가 왼손 위로 이글거리는 암흑의 화염구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헬파이어 마법과 흡사한 특유의 ‘암흑 마법’이었다.
스파아앗!
이윽고 오른손에 든 마검 부르고사의 끝에서 흑자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날카롭게 피어올랐다.
이 역시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와 흡사한 특유의 ‘암흑 검기’였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 완벽한 존재이자, 필연의 결정체다.”
이어진 레크나트의 말.
그 말에 그의 오만함과 자신감의 근원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성마 대전의 피로 얼룩진 나스 대륙에 기어이…… 레크나트의 현신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