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44
제 44화
17장. 영주님은 다르십니까? -2화
콰아앙!
한 무리의 병사들을 이끌고 도착한 라키스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발로 걷어차며 들어왔다. 이어서 자레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와…….”
“엄청나군. 화끈한데!”
“모두 조용히 하라!”
들어온 자레드와 라키스, 치안대를 반긴 것은 여기저기 보란 듯이 붙어 있는 춘화들이었다.
다 큰 성인이 보기에도 민망한 그림들이 무척 많았으며, 심지어 어떤 그림은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여성의 모습을 모사하여 그린 춘화도 많았다.
한마디로 보면 볼수록 얼굴이 화끈거려지는 내용물들이었다.
“음, 누구신지?”
그때, 집무실 의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행정관의 보직에 있고, 응당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네가 율리안이렷다!”
라키스가 소리쳤다.
이미 그에 대한 악명을 영지민들에게서 전부 듣고 온 터라,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무시하는 건지, 모르는 건지 율리안은 태연했다.
“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가……!”
“라키스 경, 잠시 멈춰 보시오. 내가 말하지.”
라키스가 호통을 치려던 찰나, 자레드가 그를 제지했다.
처음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율리안을 그저 능력 없는 타락한 관리 정도로 생각했던 자레드였다.
그래서 그를 보는 즉시 직위를 해제시키고, 영지법에 따라 엄히 처벌할 생각이었다.
한데 그의 얼굴을 보고, 심안으로 직접 스탯을 파악한 뒤.
자레드의 생각이 바뀌었다.
‘이 사람, 무슨 생각인 거지?’
궁금해졌다.
심안으로 보기 전까지만 해도 능력 없는 놈의 흔해 빠진 태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분명히 능력이 있다. 그런데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율리안 – Lv. 65] [근력 : 17][체력 : 28] [마력 : 13][지혜 : 301] [민첩 : 11][매력 : 29] [물리 방어력 : 3] [마법 방어력 : 3] [특수 성향 : 행정 전문가 S / 경영의 묘수 A / 다중 업무 처리 A] [일반 성향 : 출세, 돈, 술] [특수 성향의 강력한 시너지효과로 지혜 스탯이 대폭 상승하였습니다.]‘행정 전문가, 경영의 묘수, 다중 업무 처리까지? 게다가 특수 성향의 시너지효과까지 발생했네. 이 정도면 완전 내정 올라운더인데?’
자레드가 놀란 표정으로 율리안의 면면을 살폈다.
다른 스탯이 낮아 마법이나 이런 쪽의 재능은 부족하지만, 행정 쪽으로는 정말 뛰어난 인재임이 틀림없었다.
‘어느 분야에 배치해도 능히 일을 처리할 수 있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센스까지 겸비. 이 정도면 최소 B급 인재고, 각성 여부에 따라 A급까지도 오를 수 있어!’
확실히 인재였다.
특히 마요르카 영지를 새로이 편입하면서 생긴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인재상이었다.
자레드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말해 보라. 왜 그동안 마을을 돌보지 않았나? 놀고 마시라고 봉급을 받는 것은 아닐 텐데?”
“이번에 새로 오신 영주님이시군요. 일단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이런 하찮은 일이 아니었던 터라.”
율리안의 대답은 날카로웠다.
바로 앞에 영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눅 들기는커녕, 오히려 힘주어 말하는 모습이었다.
“하찮은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네, 제 그릇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이런 한직에 있을 몸이 아닙니다.”
“아니, 이놈이 어디서 보자, 보자 하니 돼먹지 않은 소리를……!”
스릉!
참다 기어이 폭발한 라키스가 검을 꺼내 들었다.
자레드가 바로 말리지 않았더라면, 정말 즉각 목을 쳐 날렸을 정도로 분노한 모습이었다.
“경은 내가 별도로 지시하기 전까지 나가 있으시오.”
“예, 영주님. 죄송합니다. 말을 듣다 보니 기가 차서 그만.”
“내가 처리하지.”
“옛.”
라키스가 바로 치안대 병사들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이윽고 자리에는 자레드와 율리안, 두 사람만이 남았다.
“율리안.”
“예, 영주님.”
“하찮은 일을 원치 않았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그 하찮은 일은 하기 싫은 건가, 못 하는 건가?”
“하기 싫은 겁니다.”
“증명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이런 작은 마을의 일쯤은 반나절이면 떡을 치죠. 괜찮으시다면 지켜보시겠습니까?”
“그러지. 조용히 지켜보도록 할 테니 그 말을 증명해 보게.”
“예. 밖에 누구 없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율리안이 부하를 불렀다.
자레드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서는 집무실의 한구석에 놓여 있는 자리에 앉았다.
“예, 행정관님.”
“지금부터 밀린 공무를 보도록 하겠다. 마을 전체에 일러 모두 모이라고 해라. 작은 송사부터 해서 전부 처리할 테니까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영주님, 괜찮으시면 이 춘화들 좀 함께 떼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려서 붙이다 보니 너무 많아서 말이죠. 하하하.”
“이 정도 그림 솜씨면 화가를 해도 됐을 것이오. 좋은 그림을 막 뜯을 수는 없으니, 내 조심하도록 하지.”
자레드가 웃으며 율리안과 함께 벽면 가득 붙어 있는 춘화들을 떼어 내기 시작했다.
‘시시콜콜하게 격식 같은 것을 따지지도 않고, 생각은 또한 상당히 열려 있는 사람이군. 나를 보고도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여유롭게 대화를 하고 말이야.’
율리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대하고 있는 자레드의 모습에 놀랐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르구스가 보낸 부하에게 한차례 매타작을 당했던 율리안이었다.
물론 영지의 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할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날 이후로 영지를 떠날까 고민하던 차였다.
율리안은 자신의 능력을 크게 써 줄 사람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출신이 평민이다 보니, 수많은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다.
제국이나 왕국에서 주최하는 관리 시험은 최고의 정답을 써내도 평민이라서 탈락하기가 일쑤였고.
웬만한 영지에서는 율리안과 대화를 하고 나면, 허영심만 가득한 놈이라며 푸대접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구르고 굴러, 대륙 북부의 한지까지 떠밀려 오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놓고 말하자면 전임 영주는 쓰레기였다.
영지 경영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었고, 마음 같아서는 직접 매질을 하면서 가르치고 싶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영주는 달랐다.
영지를 접수하자마자 바로 치안을 안정시켰고, 이어서 행정관들의 시찰에 들어갔다.
영지를 확실하게 운영할 줄 아는 사람의 행보인 것이다.
새벽부터 율리안이 대놓고 술판을 벌인 것도, 사실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자레드의 귀에 흘러들어가기를 바라서였다.
두다다다! 두다다다!
업무가 재개되기가 무섭게 수많은 송사를 들고 오는 영지민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자레드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율리안에게 향했다.
“…….”
그는 묵묵히 두 눈을 감은 채, 업무를 시작하면 사용할 만년필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꼭 《삼국지연의》속에서 유비가 방통을 만나던 그때가 생각나네.’
자레드는 자신과 율리안 사이에 벌어진 일을 되짚으며, 어렸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방통을 얻었듯, 자신도 유능한 가신을 또 한 명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기대하면서.
* * *
눈 호강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나는 물 흐르듯 마을의 일을 척척 처리하는 율리안의 모습에 매우 놀랐다.
꽤 골머리를 아프게 할 법한 사건들이 속속 들어왔지만, 율리안은 막힘없이 결론을 냈다.
더 놀라운 것은 송사에서 원고가 되었든, 피고가 되었든 율리안의 판결에는 일체 이의를 달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만족했고, 종종 반문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율리안이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 모두가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의 소출(所出)을 영주 성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들도 암산을 이용해 손쉽게 계산해 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유실된 곡식들이 있음을 알아차렸고, 바로 책임자를 불러와 감옥에 가뒀다.
중간 과정에서 유실이 발생했는데, 이를 관리하는 사람은 책임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율리안의 공언대로 마을에 산적해 있던 현안들은 반나절 만에 끝이 났다.
어림짐작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넘겨짚었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만하다고 보일 수도 있는 자신감에는 다 이유가 있었어.’
두 눈으로 본 이상, 그의 실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는 함께 지켜본 라키스도 마찬가지여서, 연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흔한 갈등 하나 없이 물 흐르듯 마을의 일을 술술 처리한 모습에서 감명을 받은 것이다.
‘적임자다!’
새로운 인재를 구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잠룡(潛龍)이 내 곁에 있었던 것이다.
* * *
얼마 후.
꽉 막힌 집무실이 아닌 마을로 나온 자레드와 율리안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둘만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군. 잘 보았소.”
“그간 마을 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먹고 처리하면 오래 걸리지 않을 현안이었기 때문에, 단지 미뤄 두고 있었을 뿐입니다.”
“분명 위중하고 중대한 현안은 없었지.”
“예, 영주님.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고, 누군가의 뇌물을 받아 비위를 맞춰야만 하는 밥버러지 관리가 아니라면…… 사실 어렵지 않은 일들입니다.”
“그만큼 그대가 객관적이라는 뜻이겠지?”
“저를 회유하고 구워삶을 수 있는 사람은 제 자신뿐입니다. 그 누구의 이익도 대변하지 않으며, 지켜 주지도 않지요.”
“좋은 말이군. 율리안.”
“예?”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시오. 어떤 자리를 원하오?”
먼저 수를 던진 것은 자레드였다. 율리안은 행정관으로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재였다.
행정 전문가 S만 달고 있어도, 대영지의 행정까지는 말끔하게 처리해 낼 수 있다.
하물며 관리할 곳이 소영지 두 곳뿐이라면, 일처리는 누워서 떡 먹기만큼 쉬울 것이다.
자레드의 물음에 율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가 거꾸로 여쭙겠습니다. 영주님은 다르십니까?”
간결한 질문이지만 시사하는 바는 컸다. 그저 흔해 빠진 영주들과 같을 바 없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말하라는 것이다.
“내 입으로 다르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달라지려고 노력하고 있지. 끊임없이 내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내 영지에도 마찬가지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소.”
“좋습니다. 그렇다면 영주님의 힘으로 제가 말하는 것을 이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역량이 닿는다면 얼마든지.”
자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율리안 정도의 실력이면 대영지 다섯까지는 너끈히 관리할 수 있겠지 싶었다.
이런 인재를 눈앞에서 보고도 놓친다면, 분해서 평생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자레드는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율리안이라는 용을 힘껏 날아오르게 하고 싶었다.
“영주님, 영주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제게 들려주시지요.”
대뜸 율리안이 꿈을 물었다.
물론 늘상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질문이기는 했지만, 타인에게서 같은 질문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있었다. 항상 목표와 꿈은 머릿속에 각인해 두고 있었으니까.
“나스 대륙의 주인공이 될 것이오. 지방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이름 없는 영주가 아니라, 세상의 주인공.”
자레드는 의 주인공을 뛰어넘는 진(眞)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허언은 아니시겠지요?”
“후후,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하지만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적은 없소.”
“영주님, 제 능력을 널리 사용하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럼 제게 하나를 꼭 약속해 주십시오.”
“무엇이오?”
“저는 제가 항상 우러러보며, 진심으로 경외할 수 있는 분을 원합니다. 가신에게 무시를 받는 영주가 있다면, 그것은 가신의 잘못이 아니라 영주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이군.”
“올해가 끝나기 전까지 반드시 백작의 자리에 올라 주십시오. 아니면 소영지를 하나 더 정복하여 통합된 중영지를 만들어 주십시오. 실패하신다면, 저는 미련 없이 영지를 떠날 것입니다.”
“백작 혹은 중영지라…….”
“저는 꿈을 크게 펼칠 수 있는 주인을 모시고 싶습니다. 더러운 암흑가의 돈에 손을 벌리거나, 허례허식에 찌들어 신분의 귀천을 논하는 주인은 원치 않습니다.”
율리안의 말 하나하나가 가슴속을 깊이 후벼 팠다. 사회를 향한 따끔한 일침처럼 들리기도 했다.
“좋소, 약속하지.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이루겠다고. 실현하면,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오?”
“존경심을 꾸준히 자극할 수 있는 영주님의 곁을 떠날 이유는 당연히 없겠지요. 아울러 제 곳간도 풍성해질 것이고 말입니다. 그만큼 늘어난 일을 주실 테니, 당연히 봉급도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율리안의 솔직한 말에 자레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욕망을 내비쳐 주니, 이야기하기 수월했다.
속으로 꿍해서 음모를 꾸미는 것보다, 차라리 직설적인 이런 모습이 더 나았다.
아마 율리안이라면!
자레드 자신에게 언제든 직언을 아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아. 그대를 마요르카 영지의 전체 내정을 관장하는 총행정관으로 임명하지. 단.”
“제 능력을 다른 가신분들에게 검증받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이군요?”
“눈치가 빠르군. 오늘 내게 보여 준 대로, 가신과 영지민들에게도 증명해 보시오. 그대가 입만 산 이론가인지, 아니면 실무에 능한 전문 행정가인지를 보여 줄 좋은 기회니까.”
“예, 알겠습니다. 일주일의 수습 기간이면 충분합니다. 제 능력을 증명하든가, 아니면 깨끗이 영지를 떠나겠습니다.”
“기대해 보겠소.”
“저 역시 영주님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영주님이 되시길.”
말이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율리안이 자레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영주님께 제 능력을 모두 베팅한 겁니다? 부디 좋은 배당금으로 돌아오길 기원하며.”
“반드시 내 곁을 떠날 수 없도록 능력으로 유혹하겠다고 약속하지.”
자레드가 엄지손가락을 맞세워 보였다.
이제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인재를 잃지 않기 위해 방심하지 않고 노력해야만 하는 확실한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