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47
제 47화
18장. 헤일, 마하트 – 2화
엘라가 물었다.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니? 오늘이 초면이라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
이자벨은 답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줄곧 엘라의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엘라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자벨은 속마음을 숨긴 채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말을 해야 알 것 아니야? 그래야 내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라도 하지. 안 그래?”
“됐어요. 그냥 가죠.”
“아니, 너나 나나 피차 영지의 손님이잖아. 서로 인사를 하는 건 당연한 예의 아니야? 뭐, 예의도 밥 말아 먹은 사람이라면 할 말은 없다만…….”
그 말에 정곡을 찔린 이자벨이 억지로 악수를 청했다.
상황이 순식간에 이 정도로 얼어붙을 것이라고는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가슴속의 앙금이 있는 듯, 엘라와 악수를 나누며 넌지시 물었다.
“자레드와 무슨 사이죠?”
그 질문이 나오는 순간, 클로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 싸늘한 한기의 원인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레드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이자벨이 엘라를 견제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애초에 끼어들어 봤자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클로이는 아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자신도 한 성격 하지만, 스승인 엘라도 성깔 하나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엘라가 달리 말이 없자, 이자벨이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자레드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저예요.”
“글쎄, 자레드는 여자친구가 없다고 하던데? 혼자 짝사랑이라도 하는 거야?”
엘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이자벨의 목소리와 표현도 그전보다 더 날카로워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줌마는 싫으니까 관심 끊어요.”
“관심 끊게 하고 싶으면 네 힘으로 사랑을 쟁취해. 애먼 데서 시비 걸지 말고.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니?”
“쳇…….”
이자벨은 얼굴을 붉히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엘라에게 아무 잘못도 없고, 그녀와 자레드가 별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히 심통이 났다.
그간 자레드를 본 것은 지하실 수련 때가 전부였다.
그때를 제외하면 자레드는 늘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빴고, 제대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서운함이 별것 아닌 감정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골이 깊어졌다.
이자벨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레드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항상 웃고 자신을 공주처럼 대접해 주는 헤이즈에게는 궂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도 자신처럼 자레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자레드와 대화가 잦아진 엘라에게 그만 분풀이를 해 버렸다.
‘엘라는 자레드가 모셔 온 손님이잖아. 방해를 해선 안 돼.’
다행히도 이자벨은 이성을 재빨리 되찾았다.
진즉에 이성을 놓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엎질러진 물을 아직 퍼 담을 시간은 되는 것 같았다.
이자벨이 엘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낯 뜨겁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사과라고 생각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을 심하게 한 것 같네요.”
“사과가 빠르구나?”
“뭐를 잘못했는지 아니까요.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이자벨의 사과에 엘라의 표정도 살짝 풀렸다. 그녀는 속에 담아 두는 성격이 아니기에 금방 털어 냈다.
“이자벨, 사랑은 말이야. 그 사람을 갖고 싶다고 애원하고 매달리기만 해서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고 말아.”
정곡을 찌르는 엘라의 말에 이자벨은 침묵했다.
“…….”
“곁에 두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봐. 상대가 없으면 안 되는 나 말고,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상대를 만들어 보라는 얘기야.”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상대.”
“선택받는 사랑 말고, 선택하는 사랑을 하라는 얘기야.”
방금 전의 말싸움 탓인지 엘라의 목소리가 높기는 했지만, 하나하나가 옳은 말이었다.
깨달은 바가 있는지, 옆에 앉아 있던 클로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이자벨도 순간, 번쩍 정신이 들며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눈빛의 변화를 읽었는지, 엘라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스스로에게 충실해 봐. 그럼 나 같은 여자는 신경도 안 쓰일 정도로 매력 있는 여자가 될 테니까. 솔직히 너, 내가 보기에 지금도 정말 예쁘거든.”
급 훈훈해지는 분위기에 어색해진 이자벨이 얼굴을 다시 붉히며, 창문의 커튼 사이로 얼굴을 숨겼다.
엘라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하고 웃고는 한마디를 더했다.
“이래서 잘생긴 남자는 피곤해. 주변에 경쟁자가 많다니깐? 그렇지, 클로이?”
“네? 뭐 그렇다고는 생각합니다만…….”
클로이는 말끝을 흐렸다.
맞는 말이긴 한데, 왠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 * *
5월 9일, 아침.
나와 이자벨, 그리고 엘라와 클로이. 이렇게 넷은 마하트 3세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지난밤에 세 사람이 도착했을 때, 무덤에 대한 얘기는 끝내 두었다.
공략법은 내 머릿속에 있었고, 비상시에 탈출할 경로도 알고 있었으며, 공략에 성공할 경우 어떤 보상을 얻을 수 있는지까지 말이다.
이자벨은 예전부터 내가 즐겨 사용하던 ‘동방 대륙’ 핑계를 이제 거의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네가 또 어디서 그런 지식을 주워들었겠구나, 하는 식이었다.
클로이도 별말은 없었다.
대신 한 가지를 내게 물어봤다.
“이자벨 언니는 주술사고, 스승님은 유능한 검사이시니까 두 분이 계셔야 하는 이유는 알겠어요. 하지만 영주님, 저는 왜?”
클로이는 왜 자기처럼 실력이 아직 부족한 사람을 이런 유적 – 무덤 – 을 공략하기 위해 불렀는지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불만이라기보다는 겸손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말을 이어 붙였다.
“제가 짐이 될 것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요.”
“필요해. 네가 가진 위장술이 공략에 반드시 필요하거든. 엘라 님께 듣기를 네가 만드는 가면은 정말 감쪽같다고 들었어.”
“정교하게 공들여서 제작하기는 합니다만. 정확히 어떤 위장을?”
“토우(土偶) 병사들의 모습을 닮은 얼굴을 만들어 주면 돼. 이 그림처럼 말이야.”
클로이에게 헤이즈가 그린 그림을 내밀었다.
무덤 입구를 탐색하면서 헤이즈가 단시간에 빠르게 기억에 담아내어 그린 그림이었다.
“꽤 자세하게 그려져 있네요.”
“응. 이 얼굴로 외형을 위장하면 되고, 냄새나 기척을 없애는 방법은 내게 있어.”
“시간이 걸립니다. 2시간 정도.”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야. 영지 일도 다 떠넘겨 놓고 왔거든!”
나는 진심을 담은 환한 미소로 응답했다. 정말이었다.
율리안이 일처리를 잘해 주고 있는 덕분에 영지의 돌아가는 상황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평범한 관리라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의 많은 일을 맡겼지만, 율리안은 저녁 시간이 남는다고 했다.
덕분에 개인 집무실에 매일같이 각양각색의 춘화가 쌓여 가고 있다나 뭐라나.
조만간 춘화 모음집을 팔고 싶다며 넌지시 말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아키를 통해서 춘화를 수집하는 고객 – 목적은 알고 싶지도 않다. – 을 알아보는 게 최선이지 싶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적당한 평지를 찾은 클로이가 바로 짐을 풀고, 가면 제작에 들어갔다.
이어서 이자벨이 물었다.
“자레드! 나보고 흑체 소환술을 좀 더 가다듬으라고 했지?”
“응, 지하 무덤에서 그 주술이 가장 많이 필요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도 필요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은 계속했는데. 마침 공터가 넓으니, 여기서 연습할게. 오케이?”
“좋아. 그렇게 해.”
그렇게 두 사람이 흩어지고.
엘라가 넌지시 말했다.
“자레드, 이티마 제국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는 거 알아요?”
“뭐죠?”
“지평선 아래의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결코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다. 단지 탐사나 할 생각으로 무덤을 가는 게 아니라, 레벨업과 아티팩트 그리고 칭호까지 쓸어 담으려고 가는 길이니까.
단지 혼자서 절대 공략할 수 없는 곳이라서 동행을 데려갈 뿐.
1인 클리어가 가능했으면,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헤이즈나 이자벨 같은 내 측근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마도국과 암흑 교단의 핏줄들을 혐오해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당신이 어둠의 힘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무덤을 가는 것은 아니었으면 해요. 그런 기색이 보인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과 싸울 수도 있거든요.”
“단언컨대 아닙니다. 단지 그곳에 있는 아티팩트에 관심이 있을 뿐, 어둠의 힘은 관심 없습니다.”
“저는 이자벨, 클로이를 지키는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거죠?”
“나머지는 제게 맡기시면 됩니다. 딱…… 수고비만큼만 도움을 요청하는 거니까요.”
“깔끔하네요. 눈치껏 도와 달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엘라 씨에게는 눈치도 돈이라는 것을 잘 아니까요.”
“호호, 맞아요. 좋아요. 그렇게 하죠.”
최종 조율은 끝났다.
엘라에게는 지하 무덤 공략에서 호위 기사의 역할을 부탁했고, 그만큼의 보수를 지급했다.
그리고 함께 참여하게 된 이자벨과 클로이는 ‘마하트 3세’에게서 드롭 될 아티팩트를 제외한 모든 전리품을 가지라고 했다.
십중팔구 전리품은 마정석이다. 등급은 최하급이나 하급 정도로 값어치가 아주 높지는 않다.
나머지는 내가 독식하기로.
얘기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공략뿐!
* * *
휘이이. 휘이이이.
입구를 통해 들어온 마하트 3세의 무덤, 즉 고대 무덤의 분위기는 역시 음침했다.
어둑어둑한 안쪽의 어딘가에서 계속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는데, 그 안은 참을 수 없는 악취로 가득했다.
“이자벨.”
“응.”
자레드는 사전에 약속한 신호를 이자벨에게 보냈다. 그러자 그녀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좌우를 살폈다.
그러자 눈알 없이 뻥 뚫린 눈으로 내부를 순찰 중인 네 명의 토우가 한눈에 들어왔다.
“후.”
이자벨은 짧게 숨을 토해 낸 뒤, 흑체 소환술을 전개했다.
그러자 검은 고무공처럼 생긴 구체가 생겨나며, 그녀의 손 위에서 통통 튀기 시작했다.
‘강제 어그로 고정 버그.’
자레드가 노린 것은 어그로 고정이었다.
에서 자레드가 마하트 3세의 무덤을 공략했을 때.
저주의 기운과 유사한 힘을 가진 플레이어가 먼저 선공을 가하면, 해당 캐릭터에 어그로가 고정되는 버그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이게 가능한 직업군은 흑마법사와 주술사로 유일했는데, 그래서 이 무덤에서는 특히 두 직업군 유저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통! 토통! 통! 통!
이윽고 이자벨의 흑체가 토우 넷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깔짝이듯이 때리자,
쿠오앗! 쿠옷!
이자벨의 공격에 반응한 토우들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일찌감치 자레드는 토우의 움직임을 보고 수인을 맺고 있었다.
이윽고 이자벨이 자레드의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뒤를 따라온 토우들 역시 자연스럽게 자레드의 앞을 지나갔다.
‘정말이네.’
‘토우들이 바로 앞에 있는 자레드를 못 보는 건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클로이와 엘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레드가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화염 구체를 준비하고 있는데도, 토우들의 관심은 온통 이자벨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리고.
화르르륵! 화르르륵!
“그륵.”
“으르륵.”
순식간에 타오른 불길에 토우 넷이 그 자리에서 열화와 같은 불길에 휩싸여 절명해 버렸다.
툭. 투툭.
이내 떨어진 하급 마정석 둘.
“잘됐네. 이자벨이랑 클로이가 하나씩 챙기면 되겠다. 자, 가자.”
자레드가 웃으며 앞장섰다.
그러고는 클로이가 만든 가면을 자연스럽게 얼굴에 쓰며, 등 뒤로 동그라미 표시를 보냈다.
약속된 신호, 위장을 하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모두가 토우의 모습을 쏙 빼닮은 얼굴 가면을 썼다.
이어서 자레드가 지하 무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모래들을 몸에 잔뜩 묻히기 시작했다.
나머지 셋도 똑같이 따라 했다.
앞서 무덤에 들어오기 전의 사전 브리핑에서 이미 끝났던 얘기였으니까.
이윽고 좁은 통로를 지난 뒤, 다시 넓게 펼쳐지는 거대한 지하실에 들어섰다.
바로 그때.
“…….”
자레드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크우우우우.”
아까처럼 토우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가 너무 많았다. 어림잡아 계산해도 천 명은 족히 넘을 정도로.
도대체 이 지하 무덤에 이런 토우들이 왜 이렇게 많이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워낙에 수가 많아 싸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물론 자레드는 애초부터 이 녀석들과는 싸울 필요도 없다고 했지만.
자레드가 먼저 앞장섰다.
그렇게 토우들 사이를 성큼성큼 헤쳐 나가며 걷다가, 지하실의 중앙쯤에 다다랐을 무렵.
험상궂은 인상을 하고 있는 토우 대장 하나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더니,
덥석!
이내 자레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순간, 모두가 긴장했다.
엘라는 여차하면 보이는 족족 남김없이 벨 요량으로 검집에서 검을 뽑을 준비를 마쳤다.
그 순간, 토우 대장이 자레드에게 말했다.
“그룩, 그루룩, 그극.”
동료들은 이 말의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레드는 씨익 웃으며, 준비된 멘트를 토우 대장에게 던졌다.
“헤일, 마하트(마하트, 만세).”
그러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토우 병사와 대장이 일제히 양옆으로 물러서며, 지하실을 관통하는 대로를 열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자동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