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culus of Joseon RAW novel - Chapter 87
87화 김시민
김시민 역시 곽재우 못지않게 기골이 장대했으며,
긴 얼굴에 날렵하게 생긴 눈매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이전부터 진주판관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저를요?”
“판관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거든요?”
“저에 대한 소문이요? 어떤……?”
“판관님은 8살에 가축을 해치는 큰 뱀을 활을 쏴서 죽인 일이 있지 않았나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까도 말했듯이 제가 소문이나 소식, 정보에 아주 밝아서 말이지요.”
당연히 역사서를 뒤져 봤었으니까 알고 있지.
이제 이쯤이면 다들 뭐든 알고 있는 내가 신기해 보일 것이다.
도사나 산신령처럼 보이지 않을까?
약간 위험하긴 했지만…….
적절히 분위기를 장악하는 정도로 역사 지식을 활용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어릴 적부터 무인에 대한 기질을 보여주신 분이라, 이광악 곤양군수님과 더불어 꼭 뵙고 싶었습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저도 무인의 피가 흐르거든요. 그리고 직접적인 교전에 관한 논의도 해보고 싶었고요.”
“직접적인 교전이라면 무엇을 말하시는지요?”
“습진, 전술에 관한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전투 준비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부와 함께요.”
그 말에 김시민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김시민은 자신의 의견을 줄줄 꺼내기 시작했다.
마치 그동안 굶주리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였다.
김시민이 ‘니탕개의 난’ 때 참전했다고는 하나, 일본과의 전투는 완전히 전무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김시민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들려오는 전장 상황을 토대로 나름 많은 생각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1584년 선조 17년에 무과 별시에 을과 3위이자 전체 4등으로 급제한 김시민.
을과 3위의 높은 순위로 급제했기에 곧바로 종6품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로 임명된다.
하지만 병조판서에게 건의한 내용이 채택되지 않자, 화가 난다고 벼슬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현대로 이야기하면 소위나 중위가 국방부 장관한테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안 먹혔다고, 국방부에 가서 깽판을 부렸다는 건데…….
어지간히 한 성깔 하는 성격인 듯 했다.
이렇듯 입바른 소리만 골라 하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긴 하지만, 본디 이런 사람들은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생각을 해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가 있다.
또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충분히 납득이 될 때까지 질문을 하여, 본인 스스로 모순이 있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것은 율근 과학고 재직 시절에 많이 겪어 본 일이었기에, 난 조용히 김시민의 이야기를 모조리 귀담아 들었다.
“…… 하여 왜군의 진출 경로는 병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낙동강을 따라 수송을 할 것으로 생각되고, 이후 역시 병사님 말씀대로 전라도 방향으로 진출할 겁니다. 이때 전라도 진출 경로로 중요한 거점이 경상도 진주(晉州)와 충청도 금산(錦山)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렇더라도 김시민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김시민은 연신 생각했던 바를 하나하나 줄줄이 말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김수, 김성일, 김면, 정인홍, 이광악, 손인갑, 전현룡, 장지현, 장효현은 하나같이 김시민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심지어 금방이라도 일어서 나가려 했던 곽재우마저 제대로 고쳐 앉아 김시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거, 대단한 친구일세…….”
김시민의 말이 모두 끝나자, 제일 먼저 곽재우가 혀를 차며 감탄했다. 곽재우뿐만이 아니었다. 김수, 김성일, 김면, 정인홍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원래 내 계획은 모두에게 김시민이 식견이 높고 용맹하여 종5품 판관보다 훨씬 높은 직책의 일을 맡겨야 된다고 설득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김시민은 가만 놔둬도 알아서 드러낼 만한 인재였다.
“모두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김 판관은 보통 분이 아닙니다.”
“병사님은 인재를 알아보는 특별한 눈을 갖고 계신가보군요. 허허허.”
김성일이 연신 좋아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제대로 인재를 물어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 그러면 제가 낮에 말한 그대로 이광악 곤양군수님이 중군장이 되고, 김시민 진주판관님이 돌격장이 되어 경상도 남쪽의 수복과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아 주시기 바랍니다.”
다들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주의 전초 지역인 의령과 함안은 곽 처사와 유숭인 함안군수가 맡아 지켜주십시오. 김성일 경상우병사님께서는 이에 대한 군령장을 작성하여 함안군수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네. 그리하지요.”
김성일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는 정말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이나 보다.
“또한 황간부터 진주 북쪽까지의 경상우도는 김면 의병도대장님을 중심으로 향병과 의병을 모집, 규합하여 훈련시켜 주십시오. 이후 성주 공략을 시작으로 경상좌도를 되찾겠습니다.”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김면도 자신 있게 대답했다.
상주를 시작으로 경상우도와 좌도 사이는 김태허와 이지시가.
경상우도 북쪽과 충청도, 전라도 사이는 이유의와 김종례가.
경상우도 중부는 김면과 정인홍이.
경상우도 남쪽은 김시민과 이광악이.
경상우도 동쪽과 낙동강은 곽재우와 유숭인이.
전라병마절도사 최원은 전라도에서 예비 지원군으로.
전라도 남쪽 바다에서는 이순신과 이억기가.
충청도에서는 신익과 이옥이.
충청 북쪽과 경기도 사이에서는 권율이.
상주와 각 고을은 김각을 비롯한 의병들이…….
자, 이제 모든 라인업이 완성된 건가?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적을 압도할 만한 기술력으로 승부하면 된다.
그러려면…….
“김시민 진주판관님이 오셨다면, 경상우병사님께서는 제가 말했던 군관 정평구도 함께 데리고 왔나요?”
“군관 정평구라면 데리고 왔습니다. 병사님 말대로 지리산에 있더군요.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이희춘, 노함, 최윤 교위가 그 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긴히 상의할 것이 있다면서요.”
김성일이 그렇게 대답하며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김성일은 아마도 이희춘, 노함, 최윤이 정평구를 끌고 간 일이 의문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어제 말씀드렸었죠? 화약 제조 공정과 무기와 장비 개발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 있다고요.”
“그럼 설마……?”
“네, 예상하신 그대로입니다. 제가 말한 자들이 바로 이희춘, 노함, 최윤 교위입니다. 장담컨대 그 세 사람은 무예 실력보다도 그런 기술 개발에 더 역량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 말에 김성일의 눈이 정말 크게 동그래졌다.
“허……. 세상에 이런 일이……. 그 세 사람의 무예 실력도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인데……. 그런 숨은 재능까지 갖고 있었다니……. 아무래도 우리 조선이 다시 살아날 가망이 있나봅니다.”
김성일은 연신 감탄했다.
김성일은 이희춘, 노함, 최윤의 이공학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감히 알기나 하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하긴…… 곧 보겠지.
그 세 사람은 과학고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수재였으니까.
그때 장지현이 나서며 말했다.
“병사님. 화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제 밤에 김태허 장군에게 군기시 화포장 이장손을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들었습니다.”
“아! 그렇지. 그건 어찌 되고 있소?”
“안 그래도 군관 배설이 이장손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답니다. 금일 아침에 명을 전하러 갔으니, 어디쯤인지 곧 소식이 도착할 겁니다. 또한 이희춘 교위가 병사님의 명이 있었다면서, 배 군관에게 화약 5천 근과 승자총통(勝字銃筒) 등의 화기 일부를 이쪽으로 운반하라는 명을 전했습니다. 그러니 이장손이란 자는 배 군관과 함께 이쪽으로 올 겁니다.”
“정말 잘 됐군요!”
난 한껏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제 이희춘에게 다연장포를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곧바로 현대의 화기처럼 높은 수준의 무기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지금 시대의 수준으로 만들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수준의 무기를 만들 수는 있다.
인재 배치도 끝났고,
화약과 무기 생산 준비도 지시했고,
무기를 개발할 준비도 곧 끝나고…….
이제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난 셈인가?
마지막 정리만 하면 되겠군.
“곽 처사님. 경상감사(김수)님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고, 엊그제 전투를 벌일 적에는 군관과 병졸들을 모조리 보내주셨습니다. 하여 곽 처사께서는 내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패주만 했다는 말을 거두어 주시고, 김 감사님에 대한 오해를 푸십시오.”
“…….”
곽재우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이번에는 김수를 돌아보았다.
“경상감사님. 곽 처사께서는 앞으로 목숨 걸고 왜군과 싸우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몸소 전장에 뛰어들어 성과를 내신다고 약조하셨으니, 이 어찌 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화 풀고 더는 곽 처사님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김수는 뽀로통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그들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자, 그럼은 김 감사님과 곽 처사께서는 더는 싸우지 않고 화해하시는 겁니다. 전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아시겠죠?”
난 조용히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두 사람은 모두 고개를 돌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제가 모두 앞에서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더는 싸우지 마십시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상당히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자,
곽재우부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뒤이어 김수도 대답했다.
“네……. 그리 하겠습니다.”
난 다시 한 번 웃으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자, 이제는 각자의 임무로 돌아갑시다. 아! 그 전에 오늘 밤 상주성을 어떻게 공략하는지 구경 좀 하다가 가십시오.”
그 말에 다들 어리벙벙한 얼굴을 했다.
“아니, 병사님! 병사님은 공격을 수행할 장수들과 회의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전과 다르게 어찌 이리 허술하게…….”
“전 그들을 믿습니다.”
“네……?”
“그러니 구경이나 해보시라는 겁니다. 정 겁이 나면 예비대를 편성해 뒤에서 대기하다가 여차하면 뛰어 들어가셔도 됩니다.”
난 모두를 둘러보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졌다.
그렇지만 황간 동헌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나를 비롯하여 김세빈, 김사종, 김태허, 이지시, 이수광, 김각의 회의를 지켜보았다.
“…… 이상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렇게 하면 상주성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혹여 보완 사항이나 병사님의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수광은 마지막 작전 보고를 하며, 내게 의견을 물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난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수광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고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들으십시오. 상주와 그 인근에서 창의하신 모든 분들과 현감, 군관들은 전부 김각 의병장님을 필두로 정경세, 김광복, 이봉, 이축, 윤림, 정벌, 정월, 채유종, 채유희를 따라 주십시오. 차후 여러분들의 부대명은 상의군(尙義軍)이라 칭하겠습니다. 오늘 밤을 기점으로 상주를 되찾는데 온 힘을 다해 주시고, 두 번 다시 성을 잃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 네! ―
그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얼굴로 힘차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