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 the ghost munchkin! RAW novel - Chapter 76
76화
비도 삼형제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새벽,
덕팔이 몸을 일으킨 후 가장 먼저 비도를 불렀으나 비도들은 반응하지 못했다. 그에게 일격을 먹어주었으니 비도의 역할은 다한 것이었지만 아쉬웠다. 덕팔의 눈에 아쉬움이 남아 있자 어혜화가 물었다.
[비도 때문인가요?]“어르신께서 주신 귀한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괘념치 말아요. 그 아이들은 자신의 몫을 다하였답니다.]“어제 밤, 현신을 해주셔서 혹시 모를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습니다.”
[처음 하는 현신이었지만 괜찮았죠? 산동네에서는 현신해본들 누가 봐주는 이가 없어 할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이젠 종종 현신해야겠어요. 호호호]“즐거운 삶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마워요.]어혜화가 웃으며 스르륵 사라졌다. 밤새 현신을 하고 있었으니 신력 소모가 대단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신령수는 아직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분명히 이중고가 있었을 것인데 어혜화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제가 고맙습니다. 어르신.”
덕팔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 새로운 대본이 나온다고 했으니 촬영장에 가야 했다.
“가지 말아요. 드라마는 그를 불러들이는 수단에 불과했잖아요. 몸도 안 좋은데 쉬도록 해요.”
“약속인데, 제 목적을 다했다고 하여 헌신짝처럼 약속을 저버리면 저는 신뢰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적어도 이 드라마까지는 마무리해 줘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제가 운전해 줄게요. 이대로는 불안해서 못 보내겠어요.”
그때, 방문이 열리고 한유리와 아영이 들어왔다.
“운전은 제가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두 분은 여기서 담소나 나누시죠.”
한유리가 아영에게 윙크를 해 보이며 덕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분명히 에스코트하는 것 같았는데 뒤에서 보는 모습은 덕팔이 한유리에게 연행이 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언니.. 얘기를 해줘요.”
아영이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서두를 꺼내 놓자 은혜가 수결을 맺었다.
“밀!”
**
새로운 대본 때문이었을까? 촬영장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호출을 받고 세트장으로 온 배성우의 얼굴은 똥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고 무술 감독인 박 감독은 액션씬이 많아졌다며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어서 와라. 덕팔이.”
“편히 쉬셨습니까?”
“우리 덕팔이는 인사성도 밝아.”
현장에 들어오는 내내 스텝들에게 인사를 하는 덕팔을 보았는지 감독이 덕팔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칭찬을 하였다.
“새 대본이야. 일단 읽어야겠지? 촬영은 두 시간 후부터 진행할 거고, 첫 촬영은 덕팔이 너부터야. NG 없이 쭉쭉 가자고. 액션 씬이 늘어서 자칫 잘못하면 결방 사태가 나게 생겼어.”
덕팔이 대본 두 개를 들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덕팔이 내민 대본을 바라보던 한유리가 크게 웃었다.
“비중이 확 줄었네.”
아마도 남주의 비중을 말하는 듯했다.
“근데.. 내 비중도 덩달아 줄어들었네?”
한유리가 덕팔을 흘겨보았다.
“기껏 키워놨더니 날 잡아먹네.”
“… 그럴 리가 있겠어요?”
“대본을 봐요. 대본을..”
한유리가 한껏 토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지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키스신의 상대가 바뀌었다는 걸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동안 대본을 정독한 덕팔이 물었다.
“왜 제게 키스 씬이 있는 겁니까?”
“있으면 안 돼요?”
“저는 단역이고 한유리씨는 주연인데, 남자 주인공을 두고 왜 제가 한유리씨랑 키스를 해야 하는 겁니까?”
“후후.. 누가 단역이에요. 이 대본 분량으로만 보면 덕팔씨가 주인공이구먼. 애휴. 원톱은 또 물 건너갔군. 대사나 맞춰봐요. 큐 사인 들어간 후에 버벅이지 말고.”
남은 한 시간 동안 서로의 대사를 맞춰준 두 사람이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 의상 준비까지 끝난 상태였다.
“유리야, 오늘부터 대기실 쓸 수 있데. 공사 끝났나 봐.”
“한겨울에 난방공사라니.. 쯧”
“어쩌겠어. 외주 제작인데..”
이성미가 한유리가 입을 의상을 들고 대기실로 걸어갔다. 덕팔이 멀뚱히 서 있자 이성미가 덕팔을 불렀다.
“덕팔씨, 뭐해요?”
“예? 저는 여기서 대기..”
“대기실에 가야죠. 의상도 갈아입고.. 유리 옆방으로 잡혔어요.”
“단역한테 대기실을요?”
“뭐래는 거야. 누가 봐도 주인공급인데..”
이성미가 웃었다.
**
형사 역할이라고 청바지에 가죽 자킷을 입어야 한다는 편견은 21세기에도 만연하고 있었다. 덕팔이 생전 처음 입어보는 가죽 자킷이 어색했는지 자꾸 몸을 비틀었다.
“잘 어울리네요. 잠깐 있어 봐요.”
이성미가 덕팔의 옷매무새를 잡아주더니 양손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우리 덕팔씨, 아주 멋지네. 역시 주연 잡아먹은 엑스트라답다니까?”
마침 전직 남주이자 현직 애매한 남주인 배성우가 덕팔의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씬은 덕팔의 취조 장면이었다.
“민한성씨, 증거는 충분합니다. 당신의 자백은 그저 형식에 불과하죠.”
“저는 진짜 아니에요.”
“그럼 누굽니까?”
“그.. 그게..”
쾅!
“범인은 당신입니다. 모든 증거가 당신이 범인이라고 가리키고 있어요.”
단호한 목소리로 범인을 옥죈 덕팔이 빠르게 쏟아냈던 대사의 완급을 조절하며 말꼬리를 늘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한 번쯤 당신의 말을 듣고 싶군요. 당신이 생각하는 범인은 누굽니까?”
“오케이. 컷! 강 선배 표정 좋았어.”
“그래?”
범인 역으로 나오는 단골 배우가 덕팔에게 악수를 청했다. 덕팔이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자 단골 배우가 기분이 좋았는지 웃으며 덕담을 건넸다.
“잘하네. 처음이라면서.. 종종 보자고.”
“강 선배, 다음 씬. NG없이 오케이?”
“이 사람아, 내가 NG 내는 거 봤어?”
단역이었지만 수십 년간 연기로 먹고 산 사람의 내공은 대단했다. 그의 표정, 그의 손짓 하나하나가 불안과 초조를 나타냈다. 덕팔은 연기를 하면서 상대의 연기를 배우고 있었다. 덕팔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문에 없는 행동이었다. 감독이 대본을 확인하며 컷을 외칠까 하다가 그냥 한번 두고 보기로 했다.
일초, 이초, 삼초.. 오초가 넘어가면 무조건 컷이었다. 감독이 컷을 외치려고 할 때, 덕팔의 입이 열렸다.
“역시 범인은 당신이네.”
잠깐의 공백이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었고 그 분위기가 덕팔의 대사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범인이 움찔거렸다. 덕팔의 에드립을 받아 준 것이었다.
“아..아니라고 내가 아니고 그놈..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그놈! 그래 그놈이지. 돌아가도 좋습니다.”
“뭐.. 네?”
남자가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자 덕팔이 부드럽게 웃었다.
“목격자를 범인 취급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그 범인은 제가 잡죠. 약속드리겠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봄바람이 불었다.
“오케이, 컷!”
“어이, 문 감독. 이 친구 잘하는데? 깜짝 놀랬어.”
“강 선배, 제 보물입니다. 하하.. 자자 이대로 쭉쭉 다음 씬.”
촬영이 물 흐르듯 흘렀다. 덕팔이 세트장에서 촬영할 분량은 모두 끝났다. 한유리의 촬영분이 조금 남아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어이, 오 배우. 왜 거기 서 있어?”
“네?”
“저기 의자 있잖아.”
캠핑용 의자에 ‘오덕팔’이라는 이름 석 자가 박혀있었다.
“앉아서 봐.”
“다른 분들도 다 서 계시는데..”
“저 사람들이야 일을 하느라 서 있는 거고. 배우가 잘해야 스텝이 편해. 표정들 보라고 NG없이 쭉쭉 가니까 다들 표정이 좋잖아. 그래서 놓인 의자야. 특별대접이 아니라고. 알았어?”
“…. 감독님.”
조명감독이 윙크해주며 덕팔을 지나쳐 갔다. 덕팔이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으려 할 때, 이성미가 의자 등받이에 수건을 걸어주었다. 교묘하게 덕팔이라는 이름이 딱 가려졌다.
“정말, 예명 안 쓸 거예요.”
“네..”
“하이구, 고집은 참..”
며칠째 배정환과 한유리가 예명을 쓰자고 설득하였지만 덕팔은 요지부동이었다. 덕팔이 한유리의 연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연극판에서 십수 년을 굴러먹다가 얼마 전부터 드라마에 얼굴을 보이기 시작한 배우의 연기였다.
정확한 발음에 정확한 톤,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을 소리에 싣는 능력이 탁월해 보였다.
“아무래도, 이 드라마를 무사히 끝내려면 연극을 많이 봐야 할 것 같아.”
강 선배라고 불린 배우도, 저 배우도 모두 연극판에서 기초를 탄탄히 다져 놓은 준비된 배우들이었다. 단순한 소질만으로 그들의 연기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 덕팔의 판단이었다.
**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배성우다. 그는 아이돌 출신으로 꽤 성공한 배우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몇 년째 늘지 않았고, 그의 팬들은 그저 아이돌인 그를 사랑했다. 그는 자만했고, 조금씩 도태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그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수정된 대본을 받아 들며 느낀 굴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튀어나와 자신의 비중을 다 갉아 먹었다. 자신뿐이 아니었다. 원톱이라 불렸던 한유리 조차도 비중이 줄어들었다.
그런 놈을 야외 촬영에서 처음 상대역으로 만나게 되었다. 멋진 연기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오늘 씬은 그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는 장면. 왜 이런 장면이 필요한지 작가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소속사와 작가와의 관계를 잘 알았기에, 작가에게 자신은 철저한 을이었기에 이유조차 묻지 못하고 그놈에게 수갑이 채워지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이봐.”
그놈이 날 부른다.
“컷!”
“성우씨, 대사.. 자, 대본 다시 확인하고 힘내서 한 번에 갑시다. 오늘 찍을 거 많아요.”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언젠가부터 NG를 내도 아무도 질책을 하는 이가 없었는데 이 현장은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저놈이 등장한 다음부터 스텝들의 눈이 사나워졌다.
‘빌어먹을 새끼들, 나 같은 배우가 없으면 노가다나 뛰어야 할 것들이..’
“다시 갑니다. 스텐바이.. 액션!”
“이봐”
덕팔이 성우의 손에 수갑을 채우며 그를 불렀다.
“왜..왜?”
“10년을 갈망하던 여자가 내 앞에 있다. 그녀를 도운 남자도 내 앞에 있고. 나는 그를 잡아야 하지만 오늘은… 누군가의 손에 수갑을 채우기엔 날씨가 너무 좋아.”
덕팔이 배성우의 손에 채웠던 수갑을 풀어주자 배성우가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을 쳤다. 그때 멀리서 한유리가 달려왔다.
“그를 왜 풀어준 거지?”
“그냥.. 사랑에 대한 의리라고 나 할까?”
한유리가 차가운 얼굴로 돌아서며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시말서 쓸 각오해.”
“널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든지 쓸 각오가 되어 있어.”
“오케이 컷. 유리씨 표정 좋다. 가슴이 설랬어.”
“감독님도 농담은..”
한유리가 웃었다. 하지만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숨길 수가 없었다.
**
배성우의 출연분이 줄어들면서 5일 만에 2회분 촬영이 무사히 끝이 났다. 한유리 대신 추격 씬을 책임진 덕팔 덕에 야외촬영도 수월하게 끝이 났다. 단지, 한유리가 갈망하던 덕팔과의 키스신은 허그 신으로 대체되었다. 너무 이르다는 작가의 판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