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02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일그러진 관문은 나에게 익숙한 느낌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내가 중원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던 순간, 내 몸을 감쌌던 정체 모를 빛과 똑같은 느낌을.
‘중원으로 통하는 관문인가? 아냐, 그렇다면 좀 더 익숙한 동식물이 넘어왔겠지.’
관문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은 중원에서 온 나에게도 생소한 것들뿐이었다.
‘중원이 아니면 설마 또 다른 세계? 섣불리 가까이 가면 안 되겠군.’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이자벨라와 카심도 이 관문이 평범한 공간이동 마법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고, 그만큼 흥분해서 연구를 진행하려 했다.
태생은 암혈의 뱀파이어지만, 이제는 마법에 매달리는 두 흡혈귀에게 정체 모를 마법진은 금광보다 더 큰 발견이었다.
“각하가 보기에는 어때요? 각하는 광휘를 다루는 기사지만, 특이하게 마력에도 민감하잖아요. 뭔가 느껴지는 게 없어요?”
“내 생각에 이건 아마도…….”
내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순간.
피잉! 탁!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내 얼굴 앞에서 멈췄다. 손에 잡힌 화살 꼬리는 아직도 힘이 남아 파르르 떨렸다.
‘독화살……?’
화살촉에 녹색 점액이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나는 즉시 운해비영을 펼쳐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쇄도했다.
“@@@@!”
알아들을 수 없는 고성과 함께 수풀이 마구 흔들리고 녹색 괴물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들을 따라잡아 운철묵검을 검집째 휘둘렀다.
퍽! 퍼퍽!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녹색 괴물 몇 명이 발목과 뒤통수를 얻어맞고 바닥에 엎어졌다. 그러자 도망치던 다른 괴물들도 주춤하며 도주를 멈췄다.
“잠깐, 취익, 살려 달라!”
“……말을 해?”
바닥에 쓰러진 암컷 녹인은 놀랍게도 사람 말을 했다.
동족이 위험에 처하자 도주를 멈춘 것도 그렇고, 어쩐지 지금까지 보아 온 녹인들과 분위기가 다른 놈들이었다.
카심과 이자벨라도 전투태세에 돌입했다가, 괴물이 말을 하자 허공에 우뚝 멈췄다.
하반신만 피의 안개로 변한 채 멍청한 표정으로 괴물을 쳐다보는 모습이 우스웠다.
“너희는 섬을 장악했던 녹인 군대의 잔당이군. 목숨을 건졌으면 천운으로 알고 섬을 떠날 것이지, 감히 나를 암살하려 하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화살은 쏜 건, 취익, 미안하다! 취익, 하지만 우리도, 취익!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사정?”
단칼에 목을 베어도 상관없지만, 나는 일단 녹인의 말을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카심과 이자벨라도 같은 마음인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옆에 와서 섰다.
“우리는, 취익, ‘차원 관문’을 지키고 있었다.”
“차원 관문? 저 일그러진 마법 통로를 말하는 거냐?”
“취익, 그렇다!”
내가 암컷 녹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기미를 보이자, 다른 녹인들도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앞서 싸웠던 멧돼지 기수들과 달리 다소 마른 몸에 무장도 형편없었다.
대신 다양한 장신구와 장식 천을 몸에 두르고 있었는데, 마치 인간 귀족이나 사제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오크’다! 취익,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온, 취익, 종족이다!”
그들의 사정을 들어 보니 이러했다.
섬에 나타난 녹인들은 다른 세계에서 살던 오크라는 종족인데, 일족의 주술사가 금지된 비술을 시도하던 중 큰 폭발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눈을 떠 보니 너희 부족 전체가 이곳 오덴세섬으로 이동한 상태였다고?”
“그렇다. 취익,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본래 오크가 살던 고향은 척박한 화산 지대였고,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오덴세섬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전사들은 당장 신세계를 정벌하겠다며 설쳐 댔고, 주술사들과 말다툼을 벌였다.
“멍청한 전사들은, 취익, 이 땅이 조상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취익, 그들은 ‘호그’를 타고 섬을 정복할 생각에 흥분했다.”
‘그 커다란 멧돼지 품종이 호그였군.’
오크 사회는 전사와 주술사, 두 집단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데, 주술사의 실수로 사고가 일어났고, 낯선 환경에 추락하자 전사들의 발언권이 훨씬 강해졌다.
게다가 고위 주술사는 마력 폭풍에 휘말려 대다수가 사망했지만, 고위 전사 계층인 ‘호그 라이더’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우리 주술사들은, 취익, 이 세계에서 함부로 우리 존재를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취익. 이곳에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모르니까.”
위험한 곳을 언급하며 나를 흘겨보는 오크 주술사. 그녀는 콧바람을 내뿜으며 어렵게 인간의 언어로 대화를 이어 갔다.
“우리는 차원 관문을 통해, 취익,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취익, 저 관문으로 들어간다고, 취익, 다시 고향에 도착한다는 확신이 없었다.”
내 생각에도 저 차원 관문이라는 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게 옳은 선택이다.
애초에 오크들이 이곳으로 넘어온 것도 사고였고, 차원 관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딱 봐도 왔던 곳으로 곱게 돌려보내 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재수 없으면 곧장 지옥으로 보내 줄지도 모르겠군.’
오크 주술사들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관문만 지키고 있었다.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할 주술사들이 뭉그적거리고 있으니, 결국 전사들은 섬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덴세섬에는 무장 병력이 거의 없었고, 호그 라이더를 포함해 뛰어난 전력을 보유한 오크들은 손쉽게 섬을 장악했다.
그렇게 수년 동안 오덴세섬을 지배했지만, 결국 뒤늦게 도착한 내 칼에 죄다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다.
“놀랍군요. 차원 관문이라니…….”
“차원 관문은 아닐 것 같은데. 대륙의 머나먼 변방에서 초장거리 공간이동을 한 것이겠지. 저 오크란 놈들이 우물 안 개구리라서 아예 다른 세상이라고 믿는 것뿐이야.”
카심은 오크 주술사의 주장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장거리 공간이동도 부활한 용 정도는 되어야 쓸 수 있는 마법인데, 한술 더 떠서 차원이동을 했다고 주장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반면, 나는 오크 주술사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 나부터도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인간이었으니까.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생각보다 빨리 찾게 될지도 모르겠군.’
오크들의 사정을 대강 듣고 나니 질문할 게 산더미 같았다.
이자벨라와 카심도 이종족의 주술이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우리를 죽이지 마라. 취익, 우리는 전사들과 다르다. 취익, 싸움은 원치 않는다.”
“사람 면상을 향해 독화살을 쏜 주제에 뻔뻔하구나.”
“미안하다. 취익, 네가 관문을 훼손하는 줄 알고 그랬다. 취익, 맞서 싸우기엔 두려워서, 취익, 몰래 숨어서 화살을 쏘았다.”
오크 주술사들은 나름대로 관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두루뭉술하고 추측에 불과한 것도 많았지만, 최소한 이자벨라나 카심보다는 훨씬 아는 게 많았다.
“각하, 이 녀석들은 살려 주시면 안 돼요?”
“안 된다. 저놈들을 내가 몇 마리나 죽였는지 잊었어? 언젠가 기회만 있으면 내게 복수할 놈들이야.”
“그럼 당분간만 살려 두시는 게 어때요? 저와 카심이 근거리에서 감시할게요. 저들에게서 얻어 낼 지식이 많아서 그래요.”
이자벨라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허락했다.
내가 보기에도 저 초록색 주술사 떨거지들에게 당장 반란을 일으킬 만큼의 여력은 없어 보였다.
“좋다. 다만, 한 가지 안전 조치를 해 두지.”
나는 모든 오크 주술사에게 흡성대법을 시전해 마력을 회수했다.
주술사라고 자칭하던 그들은 의외로 마력이 형편없었다. 흡수한 마력은 딱히 운기조식도 필요 없을 정도의 미량에 불과했다.
“우리는, 취익, 마법진과 토템을 이용한 주술을 사용한다. 취익, 도구에 미리 마법을 담아 두니, 취익 체내에 많은 마력을 쌓아 둘 필요가 없지.”
“도구에 마력을 담아 둔다고? 그 토템이란 걸 당장 가져와라.”
“지금은 없다. 취익, 전사들이 우리 토템을 몽땅 빼앗아 부쉈다.”
“진짜 없어? 뒤져서 나오면 토템 한 개당…….”
“각하, 체통 좀 지킬 수 없어요?”
나도 모르게 나온 사파식 화법에 이자벨라가 질색했다.
혹시 마정석처럼 토템이란 것도 마력을 흡수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이미 주술사들은 모든 토템을 빼앗긴 상태였다.
‘아쉽군.’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긴 이르다.
나는 오크 주술사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토템이란 걸 만들어서 내게 가지고 와라. 복잡한 마법은 필요 없으니, 마력만 최대한 많이 담아서 가지고 오면 돼.”
“마법도 아니고, 취익, 그냥 마력만 담으면 되나?”
“그래, 너희를 죽일지 살릴지는 그 토템이란 걸 실제로 보고 나서 정하겠다.”
오크들의 설명대로면 토템이란 건 마정석과 스크롤을 합쳐 놓은 효용의 물건일 터. 어쩌면 내공 수급에 새로운 활로가 열릴 수도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보다 내공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더 급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불청객
하루가 지났다.
결과적으로, 나는 오크들을 살려 두기로 했다.
오크 주술사들은 오크 전사들과 달리 호전적이지도 않았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
게다가 차원 관문도 연구할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오크들이 가져온 토템만으로도 그들을 살려 둘 이유는 충분했다.
‘역시……!’
토템에는 마나가 담겨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극소량에 불과했지만, 마정석처럼 흡수가 가능한 형태로 담겨 있었다.
“시일이 촉박하고 재료도 없어서, 취익, 그 정도가 최선이다, 취익.”
“시간과 재료를 더 주면 더 많은 마력이 담긴 토템도 만들 수 있나?”
“물론이다, 취익. 시간과 재료가 충분하다면, 취익,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필요한 재료는 다양했다. 광물부터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질이 필요했고, 오크들이 원래 살던 세계와 달라서 대체제를 찾기 위한 이런저런 실험이 필요했다.
나는 즉시 오크들에게 토템 제작 연구를 명했다. 그들을 살려 주는 대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크들이 얼마나 빨리 토템을 생산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대한 여건을 보장해 줄 셈이었다.
그들의 감시는 카심과 이자벨라가 맡았다. 두 뱀파이어는 어차피 마을에서 지내기 곤란한 상황이 되었으니, 아예 오크들과 함께 지내며 관문을 연구하겠다고 했다.
‘일이 술술 풀리는군.’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오크들은 나를 위해 마력 토템을 생산할 것이고, 내년부터는 영지에서 농작물도 거둘 수 있다. 게다가 잿바위 드워프들이 광맥이라도 하나 터뜨리면 돈방석에 앉을 수도 있다.
‘이제는 마정석을 찾아 암시장을 기웃거릴 필요도 없지. 토템 제작에 필요한 재료만 알아내면 그걸 있는 대로 구입해서 오크 주술사들에게 제공하면 돼.’
내가 가진 황금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는데, 다행히 돈이 떨어지기 전에 영지가 먼저 생산 기반을 갖췄다. 이제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 * *
시간은 강물처럼 흘렀다.
이미 계절은 가을에 접어들었고, 백성들은 뒤늦게 개간한 땅에 물을 대고 밭농사를 짓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붉은 모루 부족은 쉴 틈 없이 새 건물을 짓고 도구를 생산했다.
잿바위 부족도 지지 않겠다는 듯 광맥 탐사를 계속했다. 최근에는 작은 철 광맥과 구리 광맥을 발견해 생산성 평가에 들어갔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머무는 장원도 번듯하게 지어져 제법 귀족의 거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각하, 이제 영지도 안정됐으니, 슬슬 서부로 출발하는 게 어때요?”
요즘 이자벨라는 틈만 나면 나를 찾아와 서부로 가자고 보챘다.
한동안 오크들과 쑥덕거리느라 복수도 잊은 줄 알았더니, 차원 관문 연구가 지지부진하자 다시 적혈 사냥에 나서고 싶은 모양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사실 이쯤 되어서 생각해 보니 내가 굳이 서부로 갈 필요가 있나 싶었다.
비록 올해 농사는 늦었지만, 넓은 땅을 개간해 놓았으니 내년부터는 풍작이 기대된다. 광산 수익도 기대해 볼 만했다.
오크들의 연구도 진척이 있어서 토템의 재료도 거의 파악이 끝났다.
보석 등 고가의 재료가 다량으로 필요하긴 했지만, 돈만 생기면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내년에 벌어들일 돈으로 재료만 사다 주면 오크들이 제대로 된 토템을 만들어 올 것이다.
‘서부로 가는 데만 몇 주가 걸린다. 게다가 서부에 도착한다고 끝이 아니지. 거기서 또 적혈의 뱀파이어를 찾고, 기회를 노려 놈들을 사냥하려면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릴지도 몰라.’
게다가 혈마법을 사용하는 적혈의 뱀파이어와 싸우려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