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06
장원을 벗어나자마자 운잠홍을 펼쳤다. 기척을 숨기고 향한 곳은 차원 관문이 있는 협곡.
한참을 달려 도착해 보니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협곡 분지는 본래 차원 관문과 그것을 둘러싼 비석 마법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는데, 지금은 통나무집 여러 채가 들어서서 제법 그럴싸한 마을이 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우물도 파 놓았고, 닭이나 집토끼 따위의 소동물도 가축으로 기르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크촌을 만들어 놓았네.’
화살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들던 호그 라이더들과 달리, 오크 주술사들은 고적하고 차분한 환경을 선호했다.
처음에는 마법사와 비슷하게 음침하고 수상한 족속이라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그들의 생활양식은 마법사보다 건전한 수도사에 더 가까웠다.
“카심, 이자벨라!”
마을에 들어서며 두 뱀파이어부터 호출했다. 오전의 휴식을 즐기던 오크 주술사들이 황급히 달려 나와 나를 마중했다.
“백작 각하, 갑자기, 취익 무슨 일로 우리 마을에…….”
“관문 연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뭔가 새로운 것 좀 알아냈나?”
“송구하다, 각하. 취익, 아직 이렇다 할 연구 성과는 없다.”
“토템 제작은? 여전히 쉽지 않은가?”
“그렇다. 취익, 재료를 확보하기 전에는, 취익, 상등품은 만들 수 없다.”
토템 제작도, 차원 관문 연구도 예상대로 지지부진했다.
재료나 제반 여건도 불비했을뿐더러, 오크 주술사들의 기질 자체가 빠릿빠릿한 유형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간략한 보고를 듣는 동안 카심과 이자벨라도 밖으로 나왔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짐 싸라. 서부로 간다.”
“네? 언제요?”
“지금, 당장.”
이자벨라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가 손꼽아 기다리던 적혈의 뱀파이어 사냥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반면, 카심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출발할 이유가 있나? 한창 진행 중인 연구가 있는데……. 이것만 마무리하고 가면 안 되나?”
“카심, 무슨 소리예요? 서부 원정이 먼저지! 빨리 준비해요!”
카심은 이자벨라처럼 복수에 불타오르는 성격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안전한 협곡 분지에서 혈마법이나 연구하는 것이었다.
카심은 지금 영위하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차원 관문에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물질과 생명체가 시시때때로 튀어나오고, 이 세계의 마법과 궤를 달리하는 오크 주술까지 공부하다 보니, 그의 혈마법 수준도 급상승하고 있던 차였다.
“짐 싸라고요! 영감, 귀먹었어요?!”
하지만 의욕 없는 카심도 이자벨라의 닦달에는 별수가 없었다.
카심과 달리 복수가 최우선인 이자벨라. 그녀는 당분간 오덴세섬에 머문다던 내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는지 묻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 짐을 챙겨 나왔다.
심지어 짐을 미리 꾸려 놓은 듯, 단출한 가방 하나만 들고나오더니 ‘준비 끝!’을 외쳤다.
반면 카심은 구시렁거리며 한참이나 이것저것 챙기며 시간을 끌었는데, 그 모습에 답답해진 내가 한 소리 했다.
“이사 가냐? 가방에 뭘 그렇게 잔뜩 넣어? 간소하게 꼭 필요한 것만 챙겨. 이번에는 뚱보를 안 데리고 갈 테니, 짐이 무거우면 들고 다니기 힘들 거야. ”
“이런 젠장, 뚱보를 두고 간다고? 허드렛일을 해 줄 몸종도 없이 서부까지 간단 말인가?”
뚱보가 없으면 짐도 각자 들어야 하고, 야영 시 천막 설치나 식사 준비 따위의 잡일도 전부 직접 해야 한다.
그럼에도 뚱보를 두고 가는 이유는, 녀석의 걸음이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이번 서부 원정은 기동성이 중요해. 오비데우스가 내 소재를 파악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혈마법사를 사냥하고, 혹시 놈과 마주치면 재빨리 도망쳐야 하니까.’
카심이 투덜대며 봇짐을 꾸리는 동안, 나는 옆에 시립한 오크 주술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곳에서 계속 토템을 생산하며 관문을 연구해라. 나는 잠시 섬을 떠나지만, 섬에 있는 사제와 병사 들에게 언제든 연락이 가능하니,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명심하겠다, 취익.”
오크 주술사들을 섬에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게 불안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당장 서부로 가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놈들을 불구로 만들거나 다 죽여 버리기에는 앞으로 만들어 낼 토템이 너무 아까웠다.
‘영지에 병사들뿐만 아니라 사제들도 있으니, 설마 반란을 꿈꾸지는 못하겠지.’
오덴세섬은 인구 대비 사제의 숫자가 많다. 아무래도 내 명성이 대부분 신앙과 연관되어 있다 보니, 여러 지역에서 나를 흠모한 사제들이 몰려든 탓이다.
‘오크의 주술이 아무리 생소하고 뛰어나도 섬에 상주하는 수십 명의 사제를 어찌하진 못할 테지. 사제들과 함께 싸울 사자갈기 용병단도 있으니까.’
“걱정 마라, 취익. 우리는 지금 처우에, 취익, 만족하고 있다.”
“각하가 돌아올 때까지, 취익, 시킨 일을 하며 얌전히, 취익, 기다리겠다.”
내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난 것일까? 오크 주술사들이 묻지도 않은 말을 지껄였다.
실제로 지금 오크들의 삶은 괜찮은 편이었다.
나는 오크들에게 독자적인 영역을 제공해 주었고, 그 안에서 경작이나 사냥, 차원 관문 연구 등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했다.
용암 지대에서 살던 오크들에게 오덴세섬의 풍족한 물과 시원한 바람은 살 만하다 못해 행복한 환경이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내 손에 죽은 동족이 수백 마리이니, 언제라도 딴마음을 품을 수 있지.’
복수심은 때때로 이성을 마비시킨다.
나는 섬을 떠나기 전, 카심과 이자벨라에게 지시해 협곡 분지 외곽에 마법 결계를 설치했다. 출입을 차단하는 강력한 결계는 아니고, 단순한 경보 마법이었다.
“다 됐네. 오크 주술사들이 영역을 벗어나면 이 수정이 진동할 테니, 즉시 알 수 있지.”
카심과 이자벨라 모두 경보 마법에는 조예가 깊었다. 적혈의 추적을 피해 은신처를 만들며 쌓은 실전 경험은 역시 대단했다.
나는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불안을 지우고, 두 뱀파이어와 함께 섬의 서쪽 해안으로 향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서부 도착
[조르가드.]해안에 도착해 혜광심어로 조르가드를 불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수룡왕이 그 위엄 넘치는 모습을 드러냈다.
조르가드는 오랜만에 불러 주어 반갑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아양을 떨었다.
[잘 지냈느냐?]그르르-.
조르가드가 눈을 깜빡이며 거품 끓는 소리를 길게 냈다. 사람 손에 길러진 개가 외출에서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것 같았다.
[섬을 떠나 서부로 가야겠다. 나와 두 흡혈귀를 태우고 서쪽으로 헤엄쳐 다오.]한데 어째서인지 조르가드가 머리를 내리지 않았다. 나만 보면 등에 타라며 재촉하던 평소의 모습과 달랐다.
그런 조르가드의 옆으로 녀석의 축소판 같은 작은 바다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조르가드 옆에 있어서 작은 바다뱀으로 보이는 거지, 이놈도 몸길이가 족히 일 장은 넘을 것 같았다.
[……설마 새끼를 낳은 게냐?]조르가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녀석은 뒤늦은 짝짓기에 성공해 어느새 자식까지 둔 상태였다.
‘나도 아직 자식이 없거늘…….’
어쩐지 입맛이 씁쓸한 건 왜일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축하한다. 한데 일단 서부로 가자니까.]내 말에 조르가드가 우쭐대며 머리를 들썩였지만, 여전히 나를 태울 기미가 없었다. 녀석의 눈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반짝였다.
[내가 네 새끼의 이름이라도 지어 주랴?]그르르르!
조르가드는 기다렸던 대답이 나온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커다란 수룡왕의 몸통이 흔들리며 물살을 일으켰다.
‘나 참, 진짜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인가? 살다 살다 이무기 이름을 짓는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조르가드의 별명이 수룡왕이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녀석의 이름을 결정했다.
[성은 왕이요, 이름은 용수로 하자.]수룡왕을 거꾸로 읽으면 왕용수다.
그야말로 무성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작명이지만, 조르가드는 크게 만족한 듯 몸을 떨었다. 녀석은 그제야 머리를 납작 엎드려 나를 태웠다.
“가자, 서부로!”
그르르르!
거대한 수룡왕 조르가드가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며 서쪽으로 헤엄쳤다. 그 뒤로 앙증맞은 용수가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조르가드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나는 두 뱀파이어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주된 주제는 적혈의 뱀파이어였다.
“적혈의 뱀파이어들은 ‘파라쿨라 성채’라는 곳에 모여 살아요. 바위산 지하 깊은 곳에 자리한 데다, 주변 광야에는 몬스터가 득시글해서 아직도 인간이 범접하지 못하는 곳이죠. 서부의 인간들은 성채의 존재 자체도 몰라요.”
“흡혈귀들의 입장에서는 행운이군. 위치를 들키면 당장 교회의 성직자들이나 영주의 군대가 들이닥칠 텐데.”
“그렇지도 않네. 설령 인간들이 파라쿨라 성채의 위치를 알아내도, 당장 침공하거나 고립시키긴 어려울 거야. 성채에 상주하는 혈마법사나 적혈의 하수인들 숫자도 상당하거든.”
“카심의 말이 맞아요. 게다가 서부의 인간들은 북부와 달리 강대한 국가를 이루지 않았거든요.”
모처럼 카심과 이자벨라의 의견이 일치했다. 적혈을 미워하는 두 뱀파이어조차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파라쿨라 성채의 전력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한데, 매번 적혈의 뱀파이어[vampire of red-blood]라고 불러야 해? 발음도 어려운데, 그냥 짧게 적혈귀[red-vampire]라고 부르는 게 어때?”
“으음, 그건 좀…….”
두 뱀파이어는 적혈의 명칭을 줄여 부르는 데 부정적이었다.
현실적이고 생존주의가 팽배한 암혈의 뱀파이어들도 의외로 호칭 따위에 예민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름이란 곧 존재의 증명 같은 것이네. 인간과 달리 신앙도 없고, 가족 관계를 철저히 따지지 않는 뱀파이어에게 종족 호칭은 중요한 문제지. 동족을 하나로 묶는 매개니까.”
“다른 종족의 이름을 멋대로 줄여 부르다니, 누가 인간 아니랄까 봐 각하도 간단한 걸 참 좋아하시네요.”
카심은 진중하게 반대하고, 이자벨라는 비아냥거렸지만, 나는 둘 다 무시했다.
“그냥 적혈귀라고 불러. 너희는 이제 암혈귀다. 훨씬 간단하잖아?”
“…….”
존재의 증명이고 나발이고, 당장 눈앞에 주먹 센 놈이 하는 말이 옳은 말이다. 더구나 그놈이 주먹을 아끼지 않는 놈이라면 더더욱.
노회한 카심은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젊은 이자벨라는 주둥이를 삐죽거렸다.
“그나저나, 파라쿨라 성채까지 가려면 서부에 상륙해서 또 몇 주씩이나 걸어야 하나?”
“그건 아니에요. 파라쿨라 성채는 서부의 초입에 있으니까, 해안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도착할 수 있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목적지가 가깝다는 건 기꺼운 일이다. 게다가 서부는 내륙으로 갈수록 햇살이 뜨겁고 건조해진다고 하니, 가능하면 동쪽에 머무는 게 좋다.
애초에 적혈귀들도 서부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그나마 해가 짧은 초입에 자리를 잡았으리라.
“그렇다고 서부에 도착하자마자 적혈귀를 사냥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아무리 각하의 무력이 뛰어나도, 수백 명의 뱀파이어가 우글거리는 파라쿨라 성채에 단신으로 쳐들어갈 순 없으니까요.”
이자벨라의 말이 옳다.
내가 아무리 화경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고 용을 사냥한 기사라지만, 수백 명의 혈마법사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온갖 기기묘묘한 사술을 부리는 마법사들과 난전을 벌이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일 터.
파라쿨라 성채에 난입하기보다는 밖에서 돌아다니는 소수의 적혈귀를 기습해 사냥하는 게 상책이다.
적혈 측에서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대대적인 수색이나 반격에 나서기 전까지 최대한 놈들을 잡아먹는 게 이번 서부 원정의 목표다.
‘목표 내공은…… 삼 갑자 정도로 잡을까?’
내공은 많을수록 좋고, 꿈은 높을수록 좋다고 했던가.
삼 갑자면 무려 180년 동안 축기해야 쌓을 수 있는 내공이니, 참 멀고도 높은 꿈이다.
그렇다고 중원에 삼 갑자의 내공을 지닌 고수가 없는 건 아니다.
고도로 발달한 무림의 내공심법은 축기에 필요한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였고, 상승의 심법을 익히면 백 세 이전에 삼 갑자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옥심귀일공처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환골탈태를 거친 화경의 노고수는 보통 이 갑자, 많으면 삼 갑자 정도의 내공을 보유하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삼 갑자 내공이면 강기공을 오십 초식 이상 펼칠 수 있겠지.’
화경에 도달한 뒤, 강기를 사용해 키르케네스를 죽이는 데 딱 칠 초식이 필요했다.
오비데우스는 그보다 훨씬 강하고 날렵해 보이니, 적어도 삼십 초식 정도는 펼칠 내공을 확보해야 마음이 놓일 터다.
한데 오십 초식이면? 오비데우스가 제아무리 날고 기는 실력이라도 목을 내놓지 않고는 버틸 수 없으리라.
‘강기공 오십 초식이면 오비데우스가 아니라 오비데우스 할아비가 와도 내가 이긴다. 일대일 승부라면 말이지.’
“그나저나, 각하는 갑옷 안 벗어요?”
“굳이 벗을 필요 있나? 시원하고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