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05
“설마 어딘가 편찮으신 겁니까?”
봉신이 주군의 소집에 불응할 때 흔히 쓰는 핑계가 꾀병이다. 그 때문에 귀족 사회에서 꾀병은 서약 철회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했다.
전령도 진심으로 내 건강을 염려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혹시 내가 다른 마음을 품었는지 에둘러 물어보는 것이다.
“혹시 각하께서 병이라도 나셨는지……?”
“이런 건방진 자를 보았나! 용살의 기사이자 빛의 집행자이신 백작 각하를 뭘로 보고! 어떤 병마도 감히 각하의 강체를 넘보지 못한다!”
전령의 말에 카라예프가 끼어들어 호통을 쳤다.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의 과잉 충성을 말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건강은 멀쩡하다. 다만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겨 불참하는 것이지. 내가 직접 가지는 못해도 축하 사절단을 꾸려 북부로 보낼 테니 그리 알라.”
예전 같으면 그냥 안 간다고 뻗댔을 텐데, 이제는 나름대로 변명까지 해 가며 달래고 있다. 이 정도면 나도 많이 점잖아진 것이었다.
하지만 전령은 여전히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하오나 각하, 대공 전하께서 각하에게 쏟는 애정이 각별한데, 그런 애매모호한 이유로 소집에 불응하시면 봉신 계약을 어기는 셈입니다.”
전령의 입장에서는 목이 떨어질 각오를 하고 내뱉은 소신 발언이었다.
그의 용기에 감탄한 것인지, 아니면 그 말에 일리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카라예프도 끼어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핑계가 필요하겠군.’
내가 대관식에 불참한다고 보론초바 대공이 즉각 군사를 이끌고 오덴세섬으로 쳐들어오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영지를 하사받은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주군과 각을 세우는 꼴을 보이는 것도 좋지 않았다. 영지민들에게 신의 없는 인물로 비칠 수 있으니까.
“불참하는 이유는 비밀로 할 셈이었는데,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사실대로 말해 줘야겠군.”
“……?”
내 말에 전령은 물론이고 섬의 요인들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대관식에 불참할 명분 따위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명분이란 만들기 마련이고, 나는 세간에 알려진 명예로운 칭호와 달리 거짓말에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난밤, 꿈을 통해 아도나이의 부름을 받았다.”
“오오!”
“신, 신의 계시를?!”
좌중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다. 개중에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거나 자세를 바르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역시 귀족의 부름을 거절하는 데는 신앙만 한 핑계가 없었다.
“어젯밤 아도나이께서 나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서쪽의 악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으니 빛나는 검으로 서둘러 도려내라.’라고 하셨다.”
“이런 시급한 계시라니!”
“하면 각하께서는 북부가 아닌 서부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생각보다 위험한 신탁에 좌중의 반응이 격했다. 특히 사제들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부릅뜨고 침을 튀기며 물었다.
“물론이다. 신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말을 모는 것이 기사의 본분 아니겠는가?”
“화려한 연회가 기다리는 북부를 단호히 외면하고, 독버섯 같은 악이 도사리는 서부로 고민 없이 향하시다니! 과연 각하십니다!”
감격한 사제들이 속사포처럼 칭송을 쏟아 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양팔을 살짝 벌린 채 그 칭송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캬, 나도 정치인이 다 됐어.’
내가 생각해도 끝내주는 명분이었다. 어차피 서부에 가서 할 일이란 게 흡혈귀 사냥이니,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악을 처단한다는 게 거짓말도 아니었다.
영지를 다스리며 한창 물이 오른 연기력까지 더해지자 누구도 이견을 내지 못했다.
“그런 이유라면 대공 전하께서도 납득하실 겁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각하!”
“암, 그래야지. 이해해야 하고말고.”
전령도 더 이상 말대꾸하지 않고 내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공 전하께서도 각하의 서부 원정에 도움을 주실 겁니다. 분명 성기사단을 파견하시겠지요.”
“음?”
선을 넘는 전령의 말에 당황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사자갈기 용병단도 각하와 함께 가겠습니다. 당장 서부로 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도 성직자를 지원하겠습니다. 책임 사제인 제가 직접 나서지요. 각하와 함께라면 못 갈 곳이 어디겠습니까!”
“아니, 그건 좀…….”
같이 가긴 어딜 같이 간단 말인가?
적혈의 뱀파이어를 빠르게 추적해 사냥하기 위해서는 이자벨라와 카심이 계속 동행해야 하는데, 성직자들이 함께하다니 안 될 말이었다.
“그대들의 충성과 용기는 잘 알겠으나, 서부에는 나 혼자 가겠다.”
“어째서…….”
“아도나이께서 이르시기를, ‘이것은 네가 홀로 짊어질 싸움’이라고 하셨다.”
거짓말을 포장하려다 보니 또 다른 거짓말이 꼬리를 물었다.
이번에는 사제들도 의구심을 품는 표정이었다. 상식적으로 서부에 악이 자라고 있는데, 굳이 백작 혼자 가서 싸우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
“아도나이께서 왜 그런 신탁을…….”
“신의 뜻을 미천한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마는…….”
특히 신학에 능통한 고위 사제일수록 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놓고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최근 나의 업적과 명성이 너무도 창창했으니까.
‘아슬아슬했다. 앞으로는 신탁 팔이도 정도껏 해야겠군.’
다음번 거짓말은 좀 더 그럴싸하게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나였다. 일단 다른 의견이 나오기 전에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나는 오늘 당장 떠나겠다.”
“각하, 하루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 위험한 원정에 나서는데, 사제들의 축복은 받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까지 거절할 명분은 없었고, 결국 서부로 출발하는 건 내일로 미뤄졌다.
* * *
다음 날, 내가 서부로 떠나기 직전 사람들의 의심을 불식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각하,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교회에 새로운 신탁이……!”
“무어냐?”
이 시점에 새로운 신탁이라니? 신탁으로 실컷 거짓부렁을 지껄인 마당이라 내심 불안했지만, 짐짓 의연한 척하며 물었다.
“‘서쪽으로 뻗은 길은 외로운 길이니, 피 맺힌 이별에도 소녀는 계속 걸어갈지어다.’라는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과연 나의 꿈과 일맥상통하는구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나는 속으로 크게 놀란 상태였다.
오덴세 교회에 내려온 신탁은 내가 지어낸 가짜 신탁과 내용이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마침 서부로 출발할 예정이고 사제들에게 나 혼자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기가 막힌 시점에 서쪽이니, 외로운 길이니 하는 신탁이 내려온 것이다.
아니, 단지 뜻이 통할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가려는 나를 콕 집어서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한데, 피 맺힌 이별과 소녀는 무슨 뜻이지?’
앞 문장과 달리, 뒤 문장은 해석하기 어려웠다.
뒤 문장에 골치가 아픈 건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흉조와 길조가 공존하는 신탁 탓에 사제들끼리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각하, 피 맺힌 이별이란 누군가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원정은 일단 미루시는 게…….”
“아닙니다, 각하. 그럼에도 소녀는 계속 걸어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소녀’란 ‘어린 양’처럼 신의 자식을 뜻하는 관용어가 분명합니다. 각하께서는 꿋꿋하게 걸어가셔야 합니다.”
사제들의 의견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지만,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서부로 떠나야 하고, 신탁이란 결국 내 입맛에 맞게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면 그만이니까.
“오늘 서부로 가는 계획은 변함이 없다. 피 맺힌 이별이란 아도나이께서 내게 주실 시련이겠지. 독버섯 같은 악을 도려낼 수 있다면 고난이 대수랴, 나 테온 크로우는 가시밭길을 기꺼이 걷겠다.”
“가, 각하……!”
“흑흑,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각하!”
결연하게 말하자 사제들이 눈물을 흘리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사파에서 온 용사
사양하고 싶은 관심
사제란 참 모순된 족속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학문을 배우고 익혔으면서 고작 몇 마디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곤 하니까.
지닌 학식에 비해 세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다가도, 또 가만 보면 다른 사람보다 경험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사제들은 순례와 포교 등 여러 이유로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녔고, 대부분의 인간들이 태어난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사는 이 세계에서 용병, 무역상과 더불어 가장 식견이 높은 부류였다.
‘뭐, 내 입장에서는 이놈들이 순진한 게 잘된 일이지.’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갈등은 사제만 잘 구워삶으면 해결할 수 있다.
특히 정치적 갈등은 거의 명분 싸움인데, 이 세계의 명분이란 결국 교회가 손을 들어 주는 쪽이 가져가기 마련이다.
‘흐흐, 내가 바로 빛의 사랑을 받는 기사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하든, 신의 뜻으로 포장하면 그 누가 의심하랴.’
하다 하다 봉신이 주군의 대관식에 불참하는 명분까지 만들어 주는 것이 신탁이고, 그 신탁을 보증해 주는 존재가 바로 사제다.
사제들이 나를 열렬히 지지하는 한, 북부의 대공이라도 내 행보를 제약할 수 없을 터다.
다만, 나를 향한 빛의 사랑이 사제들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지난번 북부 예언도 그렇고, 설마 정말 아도나이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가?’
윈스크 교구에 내려왔던 신탁 중 ‘얼어붙은 땅 위에 피는 세 송이 꽃’이라는 구절은 내가 화경에 도달하며 피워 낸 삼화취정으로 현실이 되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아도나이는 나를 염두에 두고 신탁을 내린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 내려온 신탁은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사제들을 떼어 놓고 서부로 가고 싶은 와중에 ‘서쪽으로 뻗은 길은 외로운 길’이라니, 아도나이가 직접 나서서 ‘크로우 백작 혼자서 가야 한다’고 거들어 주는 모양새다.
사제들은 내가 신의 눈길을 받는 기사라며 떠받들었지만, 정작 아도나이를 향한 신앙이 없는 나에게는 불편한 현상이다.
‘정말 아도나이가 나를 눈여겨보고 있는 건가? 그런 초월적인 존재가 왜 나를……?’
신이 나를 눈여겨보다니? 백번 거절하고 싶은 관심이다.
처음에는 이곳의 신앙을 엉터리 미신으로 치부했지만, 여러 사제와 성기사를 접한 뒤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도나이는 실존한다. 모든 게 거짓말 같은 이 세계에서,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제들은 아무런 수련 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신성력을 펑펑 쏟아 냈고, 성기사들은 내공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용기와 확신만 가지고 광휘의 검을 뽑아냈다.
‘신성력은 일종의 파사진언(破邪眞言)이고, 광휘의 검은 침투경(浸透勁)이다. 내공도 없이 이런 기술을 쓴다는 건, 누군가 힘을 빌려주고 있다는 뜻인데…….’
무림에도 이와 비슷한 기술을 쓰는 놈들이 있었다. 일월신교(日月神敎), 속칭 마교(魔敎)다.
마교의 호교법사들은 평생 무공을 익히지 않고 오직 자기네 경전만 달달 외우는데, 신기하게도 싸움에 나서면 마기(魔氣)를 펑펑 쏟아 냈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하냐면, 한평생 강맹한 불가진기를 쌓아 올린 소림사 땡중도 마교의 호교법사와 내력 대결은 피할 정도였다.
호교법사들은 기도를 통해 초대천마(初代天魔)의 힘을 빌려 오기 때문에, 내력 대결로는 이길 방법이 없다나 뭐라나.
‘초대천마는 실존 인물이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마선(魔仙)이 된 존재다. 아도나이도 비슷한 부류일 테지.’
나는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아도나이가 이 세계의 창조주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아도나이가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며, 초대천마처럼 이 세계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그가 신선인지 마선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외천의 존재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아도나이는 내가 자기 이름을 팔아서 단물을 쪽쪽 빨고 있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을 터. 괜스레 뒤통수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씨팔, 될 대로 돼라. 꼬우면 천벌이라도 내리든지.’
어차피 꼬일 대로 꼬인 인생, 업보를 걱정하기에는 이미 지은 죄가 많다.
좌우지간, ‘외로운 길’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신탁이 내려와서인지, 사제들은 내가 홀로 서부 원정을 떠나는 것에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새롭게 내려온 신탁을 보니, 각하의 서부 원정은 저희가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사명인가 봅니다.”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각하. 밤낮으로 각하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대들의 염려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무사히 다녀올 테니 그때까지 영지 관리를 부탁하지.”
“맡겨 주십시오, 각하. 오덴세섬을 그 어느 영지보다 은혜롭고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겠습니다.”
장원을 떠나는 나를 보며 사제를 포함한 영지의 요인들이 한마디씩 축복을 건넸다.
나는 일부러 출정식도 열지 않았다. 행사를 준비한답시고 며칠을 더 지체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배웅하러 나온 소수의 인물들에게 영지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홀로 장원을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