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04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파블로의 마법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당시에는 내가 겪은 최강의 마법사였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오비데우스에 비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 수준이었다.
‘게다가 용의 모습으로 변한 뒤에는 아예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오비데우스는 씨익 웃더니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용의 진정한 힘은 마법에서 나온다. 태초의 마법사이자 마법의 원류가 바로 용이지. 마법을 잃은 용은 더 이상 용이 아냐. 네가 죽인 건 커다란 극지 도마뱀이지, 용이 아니란 말이다.”
오비데우스는 파블로가 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몇 가지 늘어놓았다.
흑마법으로 사체에 빙의한 탓에 살아 있는 용의 거체보다 육체적으로 약했고, 마법도 쓸 수 없었던 파블로.
게다가 부활 자체도 예정보다 급히 추진한 탓에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키르케네스 정도는 눈 깜빡할 사이에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어.”
오비데우스가 우쭐대며 말했다. 그는 자기 힘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다 못해 넘치고 있었다.
“그렇게 강한데 왜 서부에 처박혀서 살지?”
“음?”
내 말에 시종 여유롭던 오비데우스의 표정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다.
짧게 스쳐 간 불쾌감이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오비데우스는 심적으로 흔들릴 때 말이 많아졌고, 나는 그의 정보가 더 필요했다.
“그렇게 강하면 온 세상을 발아래에 놓고 살 수도 있잖아? 왜 굳이 정체를 숨기고 서부에 갇혀 사느냔 말이다.”
“숨어 살긴 누가 숨어 산다는 말이냐?”
“나도 눈치라는 게 있다. 오르샤바의 가야르도 백작은 너를 배신하고 중간 지대로 도망쳤지? 하지만 너는 그를 잡아 죽이지 못하고 있어.”
“…….”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서부를 벗어날 순 있는 모양인데, 오르샤바까지 갈 여력은 없는 거야. 남이 모르는 모종의 이유로 서부 근처에 묶여 버린 거지. 마치 지박령처럼……. 내 말이 틀렸나?”
오비데우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분명 방금 전과 달라졌다. 흉흉하고 날 선 기파가 금방이라도 장원을 불태워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절대적인 존재다. 마음만 먹으면 대륙 전체를 불태워 버릴 수도 있어.”
“근데 왜 그러지 않지? 네 성품을 보니, 진짜 그럴 능력이 있다면 진작에 저질렀어야 하는데.”
“후후, 잿더미 위에 홀로 선 왕이 되란 말이냐? 그런 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 말을 끝으로 오비데우스는 사라졌다. 바람에 불꽃이 흩날리듯 그의 몸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새끼……. 그냥 인정하면 될 걸 끝까지 아닌 척하네.”
오비데우스는 마지막까지 부정했지만, 사실 그의 태도는 인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서는 서부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용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관찰당할 순 없어.’
용은 베일에 싸인 존재다. 반면 나는 한 지역의 영주로서 일거수일투족이 훤히 드러난 상태. 이대로는 용의 위협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붉은 용 오비데우스와의 만남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화경에 오른 무공으로도 섣불리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상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대가 내 존재를 알고 심지어 언제든 나를 찾아올 수 있다는 건 웃어넘길 수 없는 불안 요소였다.
‘키르케네스의 복수 따위에는 관심 없다고? 그런 건 그냥 덧없는 말일 뿐이다. 오비데우스는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나를 향해 불덩이를 쏟아 낼 놈이야.’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비데우스의 성품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대화를 나눴다.
붉은 용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비데우스는 키르케네스보다 훨씬 자아도취적이고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고작 도마뱀의 변덕이 두려워 전전긍긍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일각노괴 능태오가?’
분하지만 어쩌겠는가? 놈이 마법을 시전하는 속도를 보니 창룡후로 차단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오비데우스도 내 검강을 막아 낼 방법은 없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무척이나 불편한 사실이었다.
‘……서부로 가야겠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
서부의 붉은 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면 서부로 가야 한다.
‘내공도 대폭 늘려야겠어. 급하다.’
그동안 미뤄 왔던 적혈 사냥에 나설 때가 된 것이다.
본래 오덴세섬에 머물며 천천히 토템으로 내공을 늘릴 계획이었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기다리기에는 오비데우스의 위협이 피부에 와닿았다.
하루라도 빨리 서부로 건너가 적혈의 뱀파이어를 닥치는 대로 사냥하며 내공을 늘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라프카스산맥의 붉은 모루 부족에게서 전령과 화물이 도착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딱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물건이 도착한 것이다.
“각하, 이 갑옷을 각하에게 보여 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감히 지상 최고의 갑옷이라 자부합니다!”
붉은 모루 드워프들이 호들갑을 떨며 갑옷을 소개했다.
장원에 모인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붉은 모루 드워프를 무시하던 잿바위 드워프들도 눈을 떼지 못하고 구경했다.
빠각!
갑옷이 담긴 나무 상자를 뜯어내자, 그 안에 담긴 은백색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재료는 전혀 쓰지 않고, 오직 용린과 용골만 사용해서 만든 갑옷이었다.
“갑옷의 이름은 ‘북부 백룡의 찢어지는 절규’라고 지었습니다.”
“…….”
내 표정이 떨떠름해서일까? 드워프들이 눈치를 보더니 말을 바꿨다.
“각하께서는 짧은 이름을 선호하시니, 백룡갑(白龍鉀)이라 불러도 좋겠습니다.”
“좋은 이름이군. 이 갑옷의 이름은 백룡갑으로 하겠다.”
드워프의 얼굴에 또 한 번 감동이 물결쳤다. 야심 차게 준비한 ‘북부 백룡의 찢어지는 절규’는 반려당했지만, 어쨌거나 자기들이 준비한 이름으로 갑옷이 불리게 된 것이다.
나는 사실 갑옷에 이름까지 붙여야 하나 싶었다. 어느새 나의 애검이 된 운철묵검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냥 운철묵검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래도 백룡갑 정도면 괜찮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드워프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갑옷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판금 갑옷 형태로 제작하려고 했습니다만, 각하의 폭발적이고 독창적인 움직임을 살리기 위해 찰갑(札甲)으로 결정했습니다.”
“훌륭하다.”
드워프에게서 갑옷을 넘겨받아 천천히 살폈다.
갑옷은 소찰(小札, 작은 미늘 조각)을 줄에 꿰어 이어 붙인 형태였는데, 일반적인 가죽끈 대신 용린 아래에 붙어 있던 힘줄을 써서 만들었다.
“바로 한번 입어 보시지요. 각하께서는 종자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시니, 혼자서도 입고 벗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보통의 찰갑이 펑퍼짐한 도롱이 형태로 만들어져 몸에 걸치면 커다란 물고기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백룡갑은 몸에 딱 맞게 품을 수선해 입고 나면 마치 용인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슥슥-.
백룡갑을 입고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는데, 착용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옐란치노 주교에게 받은 축복의 망토보다 백룡갑이 더 가벼운 것 같았다.
“용의 힘줄은 의외로 부드럽더군요. 움직이기 편하실 겁니다. 여기, 투구도 있습니다.”
투구까지 쓰자 내 몸은 완전한 은백색 갑옷으로 둘러싸였다. 용의 형상을 본뜬 투구에 용린으로 만든 찰갑까지 입자, 용살의 기사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옐란치노 주교가 준 축복의 망토는 오늘따라 더 밝게 빛났다.
‘용린에 반응하는 건가?’
망토에 흐르는 신성은 용의 기운과 상극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망토가 묘하게 펄럭이며 평소보다 선명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조금 눈에 띄는군.’
나한테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지켜보는 드워프들은 꿈이라도 꾸는 표정이었다.
만족스럽다 못해 황홀한 그들의 표정에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각하, 너무나 멋지십니다……!”
“각하의 품격에 걸맞은 갑옷입니다!”
사자갈기 용병단이나 주민 대표들은 대놓고 아첨을 늘어놓았다.
“잡동사니나 만드는 녀석들이 이번엔 꽤 그럴싸한 물건을 가져왔군.”
심지어 잿바위 드워프들조차 백룡갑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드워프들의 찬사를 받으며 갑옷 표면을 쓰다듬었다. 여러 가공 과정을 거쳤어도 용린에는 여전히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사파에서 온 용사
꿈을 꾸었노라
“백룡갑은 표면에 냉기가 흐릅니다. 하지만 정작 갑옷을 착용한 사람은 추위나 더위를 거의 느끼지 못하지요. 저희가 그렇게 만든 건 아니고, 재료가 가진 고유의 성질 같습니다.”
“잘됐군. 마침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이자벨라에게 들으니 서부는 기후가 온난하고 건습지가 뒤섞인 환경이라고 했다.
축복의 망토는 추위를 막아 주는 효능은 뛰어나지만 더운 곳에서는 오히려 불편할 수 있는데, 백룡갑을 입으면 서부에서도 더위로 고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소찰 표면에 무늬를 새길까 고민했습니다만, 그냥 두었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화려한 모습인데, 미늘 하나하나 장식 세공을 하면 너무 과할 것 같아서요.”
“잘 생각했다.”
외관이 과한 건 상관없지만, 그랬다가는 제작 기간이 훨씬 길어졌을 것이다.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군. 역시 붉은 모루 부족이다.”
“과찬이십니다, 각하. 저희야말로 전설로만 들어 본 용린을 다룰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나는 드워프들에게 술과 금화를 내리고 장원에서 원하는 만큼 쉬다 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 * *
갑옷을 받은 다음 날, 나는 서부로 떠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짐을 꾸렸다.
오덴세섬으로 올 때와 달리 꼭 필요한 돈과 검, 육포 정도만 간소하게 챙겼다.
영지는 이미 안정 단계에 접어들었고, 각 분야에 유능한 전문가들이 있으니 내가 자리를 비워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혹여 북해의 해적이나 다른 야만 부족이 섬을 공격하려 해도 근해에 조르가드가 돌아다니는 이상 상륙은 불가능할 터다.
“영지의 요인을 소집해라. 중대한 전달 사항이 있다.”
사제와 드워프, 카라예프와 주민 대표 등 오덴세섬의 모든 주요 인물이 장원으로 모였다.
내가 당분간 영지를 비우고 서부로 갈 예정이라고 발표하기 직전, 누군가 장원을 찾아왔다.
“각하, 윈스크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북부에서? 들라 하라.”
허락이 떨어지자 전령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용살의 기사 테온 크로우 백작 각하께 빛의 찬미를! 각하의 무용이 북해를 건너고 라프카스산맥을 넘어 북방의…….”
“쓸데없는 내용은 생략하고 본론을 말하거라.”
지루하게 이어질 귀족식 수사를 사전에 차단했다. 전령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품에서 붉은 비단 두루마리를 꺼냈다.
“보론초바 공국의 통치자이시며, 동토의 수호자이신 보론초바 대공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호오, 보론초바 공국? 대공?’
많은 사람이 예상한 대로 보론초바 주교공은 스스로 대공의 직위에 올랐다.
본래도 일국의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렸다지만, 이제는 정말 북부의 유일무이한 절대자가 된 것이다.
“……전략…… 테온 크로우 백작은 북부로 달려와 나의 명예로운 대관식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길 바란다. 이상입니다.”
기나긴 변죽을 다 덜어 내고 나면, 용건은 딱 한 줄이었다.
보론초바 대공의 대관식을 열 예정이니, 모든 봉신은 마땅히 참석하라는 것.
“못 간다고 전해라.”
“예, 각하. 못 간다고 전하겠습……. 예?”
“못 간다고.”
나는 당연히 불참 의사를 밝혔다. 당장 서부로 달려가 적혈의 뱀파이어를 닥치는 대로 빨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몇 달이나 걸려서 북부까지 다녀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별개로, 답변을 가지고 가야 할 전령은 심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가, 각하, 대공 전하께서는 분명 모든 봉신을 예외 없이 소집한다고 하셨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급한 사정이 있으니 다음에 뵙자고 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