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08
“안 그래도 사제님들 사이에서 신탁의 해석이 분분한가 봐요. 특히 두 번째 신탁이 아주 복잡하죠.”
“그러게요. 피 맺힌 이별은 그렇다 치고, 갑자기 소녀라니…….”
어딘가 불길한 신탁에 아우레오가 고민하는데, 그의 어깨를 짚는 손길이 있었다.
“허허, 아우레오 사제,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는가?”
“앗, 테오도르 경.”
다가온 사람은 중부 대교구를 대표하는 성기사, 테오도르 몬테파를로였다.
테오도르가 등장하자 아우레오는 물론이고 장내에 있던 모든 사제와 부제가 예를 표했다.
그는 명망 높은 귀족이자 뛰어난 기사였으며, 여러 젊은 성직자들의 대부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테오도르 경, 저희는 크로우 경이 받은 새로운 신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경도 알고 계셨나요?”
“알다마다. 빛의 용사에 관한 건 모두 보고받고 있으니까.”
테오도르가 웃으며 답했다.
실제로 테오도르를 비롯한 중부 대교구의 고위층은 테온의 동태를 계속 파악하고 있었다.
용살기사 테온 크로우는 등장부터 ‘빛의 용사’라는 화려한 예언과 함께한 인물이고, 끝내 북부 백룡을 해치움으로써 예언에 걸맞은 업적을 세웠다.
그런 영웅에게 교회에서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용살기사는 또 다른 악을 처단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지? 한데, 아우레오 사제의 표정이 어둡군.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가?”
“테오도르 경, 제 생각에 이번에 테온이 맞이할 시련은 흡혈귀와의 싸움입니다. 서쪽에 독버섯처럼 자라는 악이란 적혈의 뱀파이어를 뜻하는 게 분명해요.”
“호오, 총명한 아우레오 사제가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할 리 없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테오도르가 관심을 보였고, 아우레오는 물 흐르듯 자기 생각을 술술 풀어놓았다.
테온의 기억을 빼앗은 존재가 적혈의 뱀파이어로 추정된다는 것부터, 예로부터 서부는 적혈의 근거지로 여겨졌던 것까지 여러 단서를 제시했다.
인생은 역설의 연속인가, 과거 테온이 별 고민 없이 늘어놓았던 거짓말이 지금 이 순간 아우레오에게 단서를 주고 있었다.
추리 과정은 틀렸지만, 결과적으로 ‘테온이 서부에서 뱀파이어들과 싸울 것’이라는 결론은 정답이었다.
“이 모든 조각을 모아 보면, 테온은 서부에서 자기 기억을 빼앗은 적혈과 싸우게 될 것 같습니다. ‘혼자 짊어질 싸움’이라는 신탁은 테온이 혼자 싸워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과거사와 얽힌, 지극히 개인적인 싸움이란 뜻일 테지요.”
“……일리가 있군.”
테오도르가 듣기에도 타당한 추론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회의 인물 중 테온 크로우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아우레오 사제가 하는 말이니 그 무게가 남달랐다.
“즉시 대교구의 성기사단을 서부로 보내 테온을 지원해야 합니다. 그를 외로운 싸움 속에 혼자 둘 수는 없어요.”
아우레오가 결연하게 말했다. 빛의 용사가 홀로 수많은 뱀파이어들을 상대하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턱을 잡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단번에 결정할 일이 아니라네. 신탁의 해석은 신중을 기해야 하니까. 게다가 크로우 백작은 이미 서부에 도착했을 거야. 듣자 하니 그가 호통으로 수룡왕 조르가드를 길들였다던데, 오덴세섬에서 조르가드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면 단 며칠 만에 서부 연안에 닿지.”
용살기사는 이미 서부에 도착했을 텐데, 행적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렇다면…….”
그 말인즉, 단독 행동을 결심한 테온이 작정하고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공개적으로 활동했다면 서부의 개척 교회에서 그 소식을 전하지 않았을 리 없다.
“크로우 백작은 이번 여정에 타인의 도움을 원치 않는 게야. 그렇다면 우리가 성기사단을 보내도 동행을 거부할 가능성이 크지.”
인제 와서 성기사단의 파견을 논의해도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참이 걸릴뿐더러, 중부에서 서부까지 또 몇 주를 걸어야 한다.
게다가 서부에 도착해도 테온과 순조롭게 합류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럼 저 혼자서라도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뭐라고?”
아우레오의 고질병이 또 도졌다. 그의 눈동자는 피할 수 없는 사명을 마주한 사람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른손에 검을 들었으면 왼손에는 방패를 들어야 하듯, 악에 맞서는 성기사의 곁에는 사제가 함께해야 합니다. 테온이 서부의 황무지를 홀로 헤매게 둘 수 없어요. 저 혼자서라도 오늘 당장 서부로 출발하겠습니다.”
아우레오의 결심은 굳건했다. 그는 대뜸 테오도르에게 묵례하더니, 뒤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진짜로 당장 떠나려는 것이다.
“허허, 젊음이란 게 뭔지……. 두 영웅의 우정에 나까지 덩달아 젊어지는 기분이군.”
테오도르가 부드럽게 웃었다. 뚜벅뚜벅 멀어져 가는 아우레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신이 나 보였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노기사 테오도르는 무언가 결심한 듯, 아우레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젊은 사제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늙은이도 함께하겠네.”
사파에서 온 용사
적혈귀 사냥
리자드맨을 조우한 뒤 무탈한 여정이 이어졌다.
일행의 이동속도는 상당히 느렸는데, 역용과 축골을 유지하느라 내공이 계속 소모되기도 했고, 오비데우스와의 갑작스러운 조우에 대비해 감각을 넓게 퍼뜨리고 다니느라 경공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부의 지형은 평탄하고, 아직은 기후도 쾌적해서 천천히 유람하듯 돌아다닐 만했다.
이 순탄한 여행길에 힘든 점은 딱 하나, 귓구멍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이 돌대가리야!”
“아까는 이렇게 하라면서욧!”
이제는 익숙해진 고성을 들으며 여유롭게 야영지에 몸을 뉘었다.
이자벨라와 카심은 벌써 며칠째 지겹도록 싸워 대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지난 몇 주 동안 저들과 함께 지낸 오크들도 어지간히 귀가 아팠겠구나 싶었다.
“내가 언제 이따위로 가르쳤어? 여기 세 점을 연결하고 마력을 오망성 모양으로 배열해야 마법이 발동한다니까?”
“아깐 반대쪽이라고 했거든요! 늙은이가 치매가 도졌나 봐.”
“뭐, 늙은이? 치매? 이게 스승님한테!”
울컥한 카심이 이자벨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꽁 소리 나게 얻어맞은 이자벨라는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치켜뜨고 머리를 들이대며 바락바락 대들었다.
“악! 날 때려? 더 때려! 더 때려 봐! 아주 머리 깨지게 때려 보라고요!”
“이, 이런 미친 망아지 같은 계집이……!”
카심과 이자벨라는 라프카스산맥에서 다시 만난 뒤, 몇 달을 함께 지내며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비록 맹세에 의해 강제로 동료가 되었지만, 서로 허물없이 대하는 모습을 보면 과거의 앙금은 많이 털어 낸 것 같았다.
물론 그 앙금이란 것도 이자벨라가 일방적으로 카심을 미워한 거였지만 말이다.
“젠장, 덜컥 가르치겠다고 약속한 내가 미친놈이지. 이런 돌대가리에게 혈마법이라니.”
“그 돌대가리란 말 좀 하지 말라니까요!”
요즘 두 뱀파이어의 싸움은 대부분 카심의 구박으로 시작했다.
카심이 이렇게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카심의 기대와 달리 이자벨라의 혈마법 습득이 너무 느렸다.
‘마력을 다루는 재능은 이자벨라가 카심보다 뛰어난 것 같은데…….’
카심이 본격적으로 이제벨라에게 마법을 가르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의 혈마법 재능은 훌륭했다. 아니, 훌륭한 수준을 넘어 가히 천재적이라 할 만큼 뛰어났다.
대부분의 암혈의 뱀파이어는 마나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수재도 짧게는 일 년에서 길게는 오 년 이상 마나 감응 훈련을 받아야 마법에 입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아무런 조기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마나의 흐름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물고기가 태어나자마자 물살을 느끼고, 날짐승이 배우지 않아도 바람을 느끼는 것처럼, 이자벨라는 선천적으로 마나에 민감하게 감응했다.
그녀가 지하 연구실에서 독학한 마법으로 언데드 지배나 마법 골렘 제작에 성공한 것도 이 말도 안 되는 재능 덕이었다.
“이런 간단한 배열도 외우지 못하는데 그럼 돌대가리가 아니고 뭐란 말이냐?”
“그딴 걸 굳이 외울 필요 있나요? 그냥 느낌으로 샥샥 배열하면 되는데.”
문제는 이자벨라가 마나 감응 능력만 뛰어날 뿐, 암기력과 사고력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솔직히 평가하자면 보통 사람보다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마법이라는 학문은 단지 마나를 잘 느끼는 체질이라고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배열과 주문을 외우고, 마법진의 구성이나 마법의 발동 요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뛰어난 지능이 필요했다.
“봐요, 이렇게 하면 어쨌거나 발동하잖아요!”
이자벨라가 손바닥 위에서 아른거리는 붉은 안개를 카심의 코 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엉성한 마나 배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순전히 타고난 감각으로 정신지배 마법을 발현시킨 것이다.
그것을 본 카심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배열이 부정확하니까 안개가 너무 옅잖아! ‘매혹의 밤안개’는 안 그래도 시전이 오래 걸리는데, 그렇게 흐릿하면 상대가 정신을 빼앗기기 전에 눈치채고 도망친단 말이다!”
“그럼 매혹의 밤안개를 두 번 연속으로 시전해서 겹치면 되겠네요. 안개가 두 배로 짙어질 테니까요.”
“그걸 지금 해결책이라고 지껄이는 게냐?”
나는 한참이나 두 뱀파이어의 만담 같은 다툼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자벨라가 혈마법을 익히는 과정은 나에게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재능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오히려 정석을 익히는 데 방해가 되는군. 이자벨라는 기초가 부족한 상태로도 마법을 구현해 버리니까.’
이른바 ‘천재의 역설’이다.
정확한 배열을 따르지 않을 경우 마나가 공중에서 흩어져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본능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이자벨라는 흩어지는 마나를 수습하며 어설프게나마 마법을 발동시켜 버렸다.
하지만 편법은 어디까지나 편법. 뛰어난 성직자라면 저런 허술한 마법 따위 단숨에 파훼해 버릴 것이다.
“때려치워라, 이 망아지 같은 년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밥이나 먹자.”
“흥, 맨날 할 말 없으면 밥 먹재.”
끝까지 지지 않는 이자벨라였다.
두 뱀파이어가 훈련을 마치고 모닥불 앞에 앉았다.
이자벨라가 손에 든 꼬치구이를 호호 불어 가며 먹을 때, 갑자기 카심이 탐혈의 은반을 꺼내 들었다.
“……나타났다.”
드디어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깨끗한 은반 테두리에 붉은 점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적혈귀가 탐지 범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은반 끄트머리에 점이 찍혀 있으니, 오백 보 정도 떨어져 있는 건가?”
“오크 주술사의 도움을 받아 탐혈의 은반도 성능을 개선했네. 이제 탐지 거리가 일천 보까지 늘었어.”
즉, 적혈의 뱀파이어는 우리와 일천 보 떨어진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잠깐 대화하는 사이 붉은 점이 둘로 늘었다.
“더 이상 숫자가 늘진 않는군. 둘이 함께 다니나 봐.”
“각하, 첫 사냥의 기회예요! 이렇게 빨리 만나다니! 파라쿨라 성채 밖에서 저렇게 소수로 돌아다니는 적혈의 뱀파이어를 만나는 건 드문 일이라고요!”
이자벨라가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이게 행운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마침 숫자도 둘이라니 딱 좋았다. 아직 적혈귀의 능력을 겪어 보지 못했으니, 셋보다 많으면 첫 사냥에는 부담스러운 숫자다.
“이쪽으로 오는데? 속도가 일정한 걸 보니 저쪽은 우리를 감지하지 못한 것 같군.”
“잘됐네. 우리도 기척을 숨기고 다가가자. 기회를 봐서 선제공격해야겠다.”
내 말에 따라 두 뱀파이어는 피의 장막으로 변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도 운잠홍을 펼쳐 몸을 숨긴 채 적혈귀가 오는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 * *
처음 만나는 적혈의 뱀파이어는 암혈에 비해 좀 더 개성이 뚜렷한 외모였다.
그들은 검붉은 머리칼에 뱀처럼 얇은 입술, 짙은 눈 밑 그늘을 갖고 있었다.
귀는 뾰족하고 눈은 흰자위 없이 전부 검은 동공인 데다, 송곳니가 입 밖으로 삐져나와 있어 비쩍 마른 악귀처럼 보이기도 했다.
암혈귀는 창백한 피부를 제외하면 인간인지 뱀파이어인지 구분이 어려운 외모인데, 적혈귀는 한눈에 보아도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상대가 방심하고 있다는 걸 파악하자마자 카심과 이자벨라에게 전음을 보내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곧장 튀어 나갔다.
파팍!
내가 한 놈을 상대하는 동안, 카심과 이자벨라도 기다렸다는 듯 나머지 한 놈을 상대했다.
적혈귀의 흑마법은 피의 늪을 소환하거나 핏빛 표창을 허공에 날리는 등 다채로웠지만, 치명적인 위력이 부족했다.
등평도수가 가능한 나에게 늪 소환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고, 느려 터진 표창은 내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퍽! 퍼퍼퍽!
선운비뢰장이 빠르게 작렬하고, 너덜너덜해진 적혈귀 하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창룡후를 사용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쉬운 상대였다.
‘확실히 화경에 오르고 나니 어중간한 마법사는 쉽게 상대할 수 있군.’
키르케네스나 오비데우스의 마법을 겪어 본 덕분일까? 이제 웬만한 마법사는 눈 감고도 처리할 정도가 되었다.
내가 한 놈을 빠르게 제압하는 동안, 카심과 이자벨라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림자 마법으로 시야를 가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