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09
“넌 박쥐로 변해서 놈이 공중으로 날아오르지 못하게 견제해!”
카심은 자기 혼자서도 적혈귀 하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물론 정신지배를 계속하며 몬스터를 더 확보했다면 가능했겠지만, 하수인이 부족한 지금은 이자벨라의 손을 빌려야 했다.
그들의 전투는 두 암혈귀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적혈귀를 지상에 묶어 두면, 리자드맨 두 마리가 쌍곡도를 휘두르며 공격하는 식이었다.
적혈귀는 피의 권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포위를 벗어나려 애썼지만, 결국 리자드맨의 참격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꺅! 이겼다! 이겼어요!”
“훅, 후욱, 장성한 적혈의 뱀파이어를 상대하는 건 역시 쉽지 않군.”
기쁨에 환호성을 내지르는 이자벨라와 달리, 카심은 이 싸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 역시 적혈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해 가며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차라리 오덴세섬에서 계속 힘을 기르다,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 때 나서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처형해야 해요! 빨리, 빨리요!”
반면, 이자벨라는 원수를 죽이고 싶어서 눈이 돌아 버린 계집이었다.
그녀는 피 흘리는 적혈귀의 머리채를 잡고 내 쪽으로 질질 끌고 왔다.
“크윽……, 이, 이것 놔!”
적혈귀가 끌려온 자국을 따라 모래와 피가 엉겨 붙어 붉은 선이 생겼다.
“각하, 빨리 마력을 흡수해요. 처형은 내가 직접 할게요. 호호, 어디부터 잘라 줄까?”
이자벨라가 적혈귀의 면상을 붙들고 조롱하며 말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과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보기에 좋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정신을 못 차리던 적혈귀는 그제야 이자벨라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치켜떴다.
“너, 너희는 설마 암혈의 잔당……?! 암혈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무사? 이게, 누가 누굴 협박하는 거야?”
이자벨라는 적혈귀의 면상에 냅다 침을 뱉었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아서 땅바닥에 처박더니, 뒤통수를 구두 뒷굽으로 자근자근 밟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감히! 어디서! 눈깔을! 그따위로 뜨는 거야?!”
그녀가 구두 뒷굽으로 찍을 때마다 적혈귀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 미친년처럼 적혈귀를 밟아 대던 이자벨라는 카심이 어깨를 밀치고 나서야 숨을 골랐다.
“하악, 이거 짜릿하네요. 호호.”
“진정 좀 해라, 이 망아지 같은 계집아. 각하, 어서 할 일 하시게. 이놈들을 죽이고 나면 누가 보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으니.”
카심이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이자벨라를 곁눈질하는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두 적혈귀에게 흡성대법을 시전했다.
뱀파이어의 혈마력은 예상대로 흡수 효율이 낮았다. 인간 마법사의 마력보다 순도가 떨어진달까? 피의 권능으로 보조해야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힘답게, 혈마력 자체는 탁하고 불안정한 기운이었다.
‘한 놈은 일 년 내공, 다른 놈은 이 년 내공……. 옥심귀일공으로 정제하고 나면 그 정도밖에 안 남겠군. 적혈귀의 평균적인 수준이 이 정도라면, 삼 갑자의 내공을 모으는 건 한참 걸리겠어.’
꼴을 보아하니 삼 갑자의 내공을 모으려면 적혈귀를 오륙십 마리 정도 잡아먹어야 할 듯했다.
서부에 와서 이제 겨우 두 마리를 사냥했는데, 이대로면 몇 달은 더 걸릴 듯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복수의 맛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다. 하는 데까지 해 보고, 부족한 내공은 해가 바뀐 뒤 오덴세섬으로 돌아가서 토템으로 보충하는 수밖에.’
사실 적혈귀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1~2년 치 내공을 얻는다면 그리 느린 것도 아니다.
흡성대법 없이 순수하게 옥심귀일공만 가지고 내공을 수련하면, 일 년 내공이 쌓이는 데 진짜로 일 년 가까이 걸리니까.
“마력 흡수를 마쳤으니, 적혈귀는 너희 마음대로 처리해. 다만 불필요한 고문은 최대한 짧게 끝내라. 여기서 저놈들 괴롭히면서 놀 시간 따위는 없으니.”
내 말에 이자벨라가 냉큼 다가와 단검으로 적혈귀의 손등을 푹 찔렀다.
“끄아아악-!”
“하악, 어때? 아파? 많이 아파?”
일 검에 죽일 수 있으면서 굳이 칼을 비틀어 가며 고통을 주는 이자벨라.
단검이 바쁘게 움직이고, 핏방울이 튀는 가운데 적혈귀의 비명과 이자벨라의 교소가 엇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혈귀는 갈기갈기 찢긴 가죽 누더기처럼 변해 모래밭을 뒹굴었다.
얼굴이 한껏 달아오른 이자벨라는 너무 빨리 끝내서 아쉽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나머지 하나는 카심이 처리할 거죠?”
“……난 됐다.”
“정말요? 양보해 줘서 고마워요.”
이자벨라는 기쁘게 웃더니, 두 번째 적혈귀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미 피가 흥건한 그녀의 두 손이 또 한 번 잔혹하게 돌아다녔다.
“이, 이거 놓지 못해?! 이 버러지 같은 년이……!”
“아하하, 그래, 더 욕해 봐! 더! 더!!”
이자벨라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으며 암혈귀의 손가락을 싹둑싹둑 잘랐다.
뻗대던 적혈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금방 비명을 질렀다.
한편, 카심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심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이자벨라를 보는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어쩌면 카심은 이자벨라의 광기 어린 복수로부터 모종의 불안 같은 걸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 역시, 살육에 들뜬 그녀를 보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 * *
내 나이가 서른 즈음 되었을 무렵인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던 그날의 기억도 세월 앞에 조금씩 선명함을 잃어 가고 있다.
솨아아아…….
그날, 억수같이 퍼붓던 빗소리는 앞서 들린 비명과 파육음을 밀어내는 듯했다.
반쯤 무너진 전각 옆으로 금방 도랑이 생기고, 핏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검붉은 흙탕물이 콸콸 흘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중상을 입은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아 있었다.
사내는 빨간색 복면을 쓰고 있었다. 피에 젖어서가 아니라, 원래 붉은 천을 가져다 기워 만든 복면이다.
사내의 양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어깨의 절단면에서는 시뻘건 피가 줄줄 흘렀다.
다리는 잘리지만 않았을 뿐, 허벅지에 구멍이 숭숭 뚫려 제자리에 일어설 수도 없는 상태였다.
“칠호, 네가, 콜록, 네가 지금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알고 있냐?”
붉은 복면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생명이 경각에 달한 와중에도 그의 눈빛은 두려움이나 후회 따위를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기를 이 꼴로 만든 상대를 향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일말의 비웃음만 보였다.
“알지.”
“이미 백 번도 넘는 살행을 완수해 놓고, 후욱, 인제 와서 배신이라니. 네, 네놈이 이런다고, 콜록, 정파의 위선자들이 널 받아 줄 것 같으냐?”
가쁜 호흡과 자꾸만 역류하는 피가 사내의 말을 끊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눈을 치켜뜨고 원독이 가득 찬 말을 끝까지 내뱉었다.
“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씻을 수 없는 핏물에 손을 담갔단 말이야. 넌 살수다, 칠호! 아니, 능태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네 천성은 악이고, 네 소질은 살인에 있다…… 컥!”
소리치는 붉은 복면 사내의 입으로 검이 파고들었다. 두꺼운 칼날이 그의 입천장을 뚫고, 뒤통수로 빠져나왔다.
“너, 넌, 이미 악귀나 마찬가지……!”
붉은 복면의 사내는 입이 뚫린 상태에서도 목숨줄이 끊기지 않아 악담을 지껄였다.
나는 검병을 놓고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 이놈만큼은 꼭 이런 식으로 죽여야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아악, 아아악!”
얼굴을 단단하게 움켜쥔 손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혹독한 훈련을 거친 전문 살수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힘을 이기지 못한 그의 얼굴 가죽이 두 쪽으로 갈라졌고, 복면인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졌다.
나는 그의 목숨을 거두고 주변을 둘러봤다.
[구음살막(九陰殺幕)]네 글자가 적힌 현판이 두 동강이 난 채 뒹굴고 있었다.
전각은 모조리 불타거나, 무너지거나, 강한 산독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사방에 복면을 쓴 시체가 널려 있고, 피와 살점이 땅 위를 수놓았다.
한때 중원 제일의 살수 조직이라 불리던 구음살막의 비밀 근거지가 인세의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아니지, 여긴 원래도 지옥이었잖아.’
생각해 보니 오히려 지금이 더 평화로운 모습인 것 같다.
적어도,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정파의 위선자들이 날 받아 줄 것 같냐고?’
붉은 복면의 사내가 했던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이 시절의 나는 사람과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생각은 나와 너무나 달라서, 누군가와 말을 섞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구음살막을 멸하고, 그걸 명분으로 정천맹에 투신할 거라 생각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저놈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거창한 야망 따위는 없는 인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구음살막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사람을 죽이는 장기 말이었고, 딱히 하고 가지고 싶은 것도, 가 보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음식도 없는 인간이었다.
구음살막의 꼭두각시로 살아온 이십 년 세월은 내 인격을 마모시키고, 도덕을 도려내고, 감정을 메마르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만, 그렇게 반쯤 인형처럼 살아가는 나에게도 일생에 걸쳐 꼭 하고 싶은 일은 몇 가지가 있었고, 그중 하나를 방금 완수한 참이었다.
‘정파 투신 따위는 관심 없다. 구음살막이 살수 집단이건 선비 집단이건 그것도 관심 없어.’
난 그저 복수를 했을 뿐이다.
그날 내 손에 죽어야 했던 연이의 복수. 내 손으로 연이를 죽여야 했던 끔찍한 기억에 대한 복수.
“하, 하하.”
복수를 마치면 크게 웃으리라 다짐했었다.
아니, 굳이 다짐까지 하지 않아도, 복수를 마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일부러 소리 내어 웃어 보아도,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겼다.
구음살막의 살수를 다 죽여도 연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도 나는 연이를 죽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웃으려 애를 써 봐도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의외로 복수의 끝은 웃음이 아니었나 보다.
“…….”
그날, 그 핏물 섞인 진흙탕 위에서.
“……흐윽, 끅.”
나는 한참을 울어야 했다.
* * *
첫 적혈귀 사냥 이후, 우리는 몇 번 더 적혈귀 사냥에 성공했다.
때로는 열 명 이상의 혈마법사가 모여 있어 싸움을 피하기도 했지만, 상대가 다섯 이하면 과감하게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혈마법사와 싸우는 것도 회를 거듭할수록 요령이 붙었다.
어느덧 내 내공은 용마주에 흡수당한 걸 모두 회복하고, 원래 수준을 넘어 이 갑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흐아암, 벌써 일주일째 성과가 없네요. 빌어먹을 적혈 놈들이 다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건지, 원.”
“적혈 측에서도 누군가 자기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겠지. 동족이 계속 실종되고 있으니까.”
이자벨라의 푸념처럼, 점점 광야에서 적혈귀를 만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우리가 해치운 적혈귀가 물경 스물을 넘어서고 있으니, 파라쿨라 성채에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나 보다.
약 보름 전부터 몰려다니는 적혈귀의 단위가 급격히 커지더니, 지난 일주일은 표적으로 삼을 만한 소규모 적혈귀 무리를 아예 발견하지 못했다.
적혈귀들은 이제 최소 열 명 이상씩 모여서 성채 밖으로 나오는 듯했다.
‘이러면 완전히 나가린데.’
사냥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러면 곤란하다.
목표한 내공을 달성하려면 혈마법사를 수십 마리 더 잡아먹어야 하는데, 벌써 사냥감이 고갈되는 지경이니…….
어쩌면 적혈 측에서 몸을 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최악의 경우 단순히 사냥감이 부족해지는 걸 넘어서, 역으로 내가 사냥당할 우려도 있다.
“각하, 이렇게 된 거, 인간 도시에서 잠깐 쉬면서 정비 시간을 갖는 게 어떻겠나? 우리가 며칠 잠잠하게 지내면 적혈의 뱀파이어들도 다시 경계를 늦추겠지. 도시에서 정보를 수집하면 혹시 모를 반격에도 대비할 수 있을 테고.”
카심이 의견을 냈고, 적혈귀 사냥에 푹 빠진 이자벨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 그녀도 슬슬 한 박자 쉬어 갈 시점이란 걸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지. 여기서 가장 가까운 인간 도시가 어디지?”
“서쪽으로 며칠만 가면 ‘마라고사’가 나와요. 서부의 초입에 있는 곳인데,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신생 도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