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22
쩔꺽.
해정밀기로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네 명의 간수를 향해 일지태허강을 쏘아 냈다.
적혈귀들은 각기 두 발씩 날아드는 지강을 막지 못해 머리와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
그 틈에 옆방의 문짝을 뜯고, 이오안을 오른쪽 어깨에 둘러업었다. 그의 외모는 지망초감각으로 예상한 것과 똑같았다.
퍼드드득!
천장의 박쥐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수용소에서 발생한 변고를 상층에 알리려는 것이다.
“어차피 저 박쥐를 전부 막을 수는 없네! 차라리 서둘러 움직여야 해!”
“말 안 해도 알아!”
더 이상 대화를 숨길 필요가 없어진 우리는 육성으로 대화하며 수용소를 가로질렀다.
금방 아우레오가 갇힌 격실 앞에 도착한 나는 일단 창살 너머로 내부를 확인했다.
‘역시.’
방 안에는 아우레오가 쓰러져 있었다.
알몸의 아우레오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적혈귀들에게 피를 많이 빼앗겼는지 무척 야위어 있었다.
꽈앙!
일 권에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아우레오를 왼쪽 어깨에 둘러업었다.
맞닿은 살갗에서 느껴지는 그의 맥박이 너무나 희미했다.
나는 장심을 통해 아우레오에게 옥심귀일기를 불어 넣으며, 미리 보아 둔 위치로 달렸다.
그오오오오……!
최하층에 사는 드레이크도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변고를 느꼈는지, 긴 울음을 토했다.
나는 녀석의 울음이 가장 가깝게 들리는 위치에 서서 강하게 발을 굴렀다.
‘땅 파는 무공은 처음인데, 진류오행도를 응용하면 되겠지!’
나는 진류오행기를 최대한 끌어올린 뒤, 토(土)기와 금(金)기만 응축해 발끝에 모았다. 이윽고 공성추처럼 단단해진 뒤꿈치가 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꽈아앙!
“으악!”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에 이오안이 비명을 질렀다. 수천 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더니, 고작 이 정도 진각에 체통도 잊고 소리를 지르는 게 우스웠다.
‘중원에서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라도 봤다면 어린애처럼 울었겠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그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생명체, 지저용왕 드레이크가 고개를 쳐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한편, 파라쿨라 성채의 최상층.
빨간 머리의 두 남자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선명한 적발과 적미, 적안을 가진 미남자는 다름 아닌 오비데우스였다.
“얼굴 보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건 오랜만이군, 가스파르테.”
“……그러게나 말입니다, 가장 강한 용이시여.”
그 앞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내. 피처럼 진득한 적발에 검은 동공,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와 그에 어울리는 묵빛 손톱을 가진 노년의 흡혈귀.
그는 바로 적혈의 당대 왕이자 파라쿨라 성채의 주인, 가스파르테 파라쿨리우스였다.
“한데, 저의 성채에는 갑자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미리 연통도 주시지 않고…….”
“내가 네놈에게 허락받고 찾아올 사람이더냐?”
“…….”
오비데우스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가스파르테의 표정이 굳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비데우스는 그 굳은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뭐냐, 방금 그 벌레 씹은 표정은?”
“……아닙니다.”
오비데우스는 기분이 나빴는지, 가스파르테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지만, 지금 오비데우스에게는 무척이나 거슬리는 행동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용혈의 권위 앞에서 왜 이리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지?’
오비데우스는 테온 크로우를 떠올렸다.
용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두려움에 떨기는커녕 반말을 지껄이며 신경전을 벌이던 건방진 인간.
심지어 그놈은 진짜로 용을 죽인 놈이었다. 그래서 그 시건방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역시 그때 죽여 버릴 걸 그랬나…….’
테온을 생각하자, 오비데우스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 흉험한 기파에 당황한 것은 마주 앉아 있던 가스파르테였다.
“가장 강한 용이시여, 제가 경솔한 행동을 했습니다. 용서를…….”
“음? 아아, 그래. 너무 긴장하지 마. 내가 설마 자네를 죽이기야 하겠나?”
가스파르테의 사죄에 오비데우스가 예의 그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네가 없으면 이 동네 박쥐 새끼들한테 시키던 잡일을 내가 일일이 직접 해야 하잖아? 자네처럼 유능한 작업 관리자를 욱하는 마음에 죽여 버릴 수는 없지.”
면전에서 지껄이는 조롱에 가스파르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으나, 참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힘의 차이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인 데다 파라쿨라 성채는 오비데우스로부터 많은 것은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적혈의 뱀파이어들도 오비데우스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대신 해 주고 있었지만, 오비데우스가 종종 가져다주는 선물에 비하면 잔심부름에 불과했다.
“땅도마뱀은 잘 있나?”
“예, 가장 강한 용께서 직접 정신까지 제압해서 넘겨주신 덕분에 저희가 수월하게 혈액을 체취하고 있습니다.”
“흥, 누가 박쥐 새끼들 아니랄까 봐 내가 기껏 선물한 땅도마뱀한테서 피만 빨아 먹고 있느냐?”
“…….”
가스파르테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모욕적인 언사에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상대가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아직 가진 재주가 부족해서요. 당장은 드레이크의 혈액만 연구하는 것도 벅찹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지식을 축적하면, 다음 단계도 하나씩 진행할 예정이지요.”
“뭐,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다. 이미 선물로 주었으니, 너희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라.”
오비데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앞에 놓인 음료를 홀짝였다.
가스파르테는 이 빌어먹을 붉은 용이 이곳에 시비를 걸기 위해 온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까부터 용건이랄 것은 없고, 하는 말마다 틱틱대며 화풀이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좆같은 도마뱀 새끼. 또 어디서 심통이 난 거야? 걸핏하면 나한테 와서 화풀이네.’
가스파르테도 명색이 적혈의 왕이고, 누구 못지않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지만, 오비데우스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하고 속으로 삭일 뿐이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용과 박쥐, 그리고 깽판
“참, 북부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전합니다.”
“……무어라?”
오비데우스의 싸늘한 반문에 가스파르테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스파르테는 순간의 짜증을 참지 못하고 경솔한 말을 지껄인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제, 제가 실언을…….”
“……되었다. 네가 나를 약 올리려고 하는 말도 아닐 테고, 키르케네스가 죽었으니 내가 슬퍼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가스파르테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변명했다.
오비데우스는 감히 용의 죽음을 입에 담는 가스파르테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자기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자 어느 정도 화가 누그러들었다.
“키르케네스가 아무리 머저리여도, 설마 인간에게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 한심한 놈 같으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오비데우스 앞에서, 가스파르테는 무어라 맞장구도 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희들도 근래에 인간들에게 아주 호되게 당했다지?”
“칠 인의 징벌자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중부의 아도나이 대교구에서 보낸 성직자들인데, 대단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희 일족의 혈마법사들이 일백에 가깝게 희생됐지요.”
“고작 인간 일곱 명에게 뱀파이어 일백 명이 당하다니, 대교구에서 손꼽히는 강자들을 보낸 모양이군.”
오비데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테온이 서부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그가 생각하기에, 굳이 대교구에서 서부로 징벌 사제단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아직 서부는 복음 전파도 제대로 되지 않은, 그야말로 아도나이교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인데, 개척 사제단도 아니고 대뜸 징벌 사제단이라니?
‘아도나이, 그 개자식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가……?’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선조의 원수지만, 오비데우스는 아도나이를 떠올릴 때마다 적개심에 불탔다.
어쩌면 오비데우스는 과거사 때문이 아니라, 자기보다 강한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에 분노를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놈들은 처리했나?”
“그게…… 일곱 명 중 다섯은 처치했고, 한 놈은 어린 나이에 신성력이 특출 나길래, 활용 가치가 높은 것 같아 생포했습니다.”
“그럼 여섯이잖아? 나머지 하나는?”
“……놓쳤습니다.”
“뭐어? 푸핫, 이런 등신 같은 놈들을 보았나.”
오비데우스가 크게 웃었다. 일백 명이 넘는 일족이 당했으니, 적혈에서도 작정하고 척살조를 보냈을 텐데, 그럼에도 한 놈을 놓친 것이다.
가스파르테도 이 대목에서는 무어라 둘러댈 말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결과에 분노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네 아들놈은 좀 어떠냐?”
“이냐시오는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다만, 아직은 라프란을 계속 복용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오비데우스도 슬쩍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냐시오가 중태에 빠진 데에는 오비데우스의 책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군. 빌어먹을 놈.’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오비데우스를 보며, 가스파르테는 이를 갈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비데우스는 자기가 궁금한 것만 일방적으로 계속 물었다.
“요즘 라프란 구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인간 상회 놈들이 온갖 발악을 다 한다던데.”
“그쪽은 완벽하게 해결했습니다. 인간들이 어디서 데려온 건지 모를 막강한 전사를 용병으로 내세웠더군요. 그놈은 하수인으로 만들면 쓸 만할 것 같아서, 죽이지 않고 생포했습니다.”
“막강한 인간 전사라……. 요즘 인간들 중에 특출 난 개체가 자주 등장하는군.”
오비데우스가 언짢은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중부 대교구에서는 적혈의 뱀파이어를 수십 마리나 홀로 상대하는 성기사가 등장하고, 서부에는 용병 주제에 혈마법사를 여럿 쳐 죽이는 인간이 등장했다.
오덴세섬을 차지한 테온 크로우까지 떠올리자, 새삼 인간들이 많이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나도 최근 오덴세섬에 다녀왔다. ‘그 녀석’을 보고 왔지.”
“오덴세섬의 그 녀석이라면…… 설마 테온 크로우 백작을 만나고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두발짐승 주제에 용의 목을 베다니, 낯짝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 오비데우스의 태도에 가스파르테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테온 크로우 백작을 죽여 버리신 겁니까? 그자를 죽이면 전 대륙의 아도나이 교회에서 흉수를 찾겠다며 온갖 귀찮은 일을 일으킬 텐데요? 놈은 신의 사랑을 받는 기사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최악의 경우에는 아도나이가 직접…….”
“흥, 내가 그런 개미 떼를 걱정하겠느냐? 뭐, 아도나이가 직접 나선다면 좀 귀찮을 수는 있겠다만…… 그것과 별개로 크로우 백작은 살려 두었다. 흥미로운 구석이 있어서, 좀 더 지켜보고 싶더군.”
그럼 일족의 원수를 보고 그냥 돌아왔단 말인가?
용에게 동족 의식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스파르테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이었다.
‘용은 온 대륙에 넷밖에 남지 않았을 터인데, 그중 하나를 죽인 원수를 그냥 내버려 둬?’
세상에 남은 네 마리 용 중 가장 어린 키르케네스가 인간의 손에 죽었다. 고대로부터 북부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백룡 일족이 완전히 절멸한 것이다.
가스파르테가 용이었다면 당장 테온 크로우를 찾아가 죽여 버렸을 터다.
신의 간섭을 걱정해서 죽이지 못한다면, 최소한 실현 가능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놈을 고문했을 것이다.
“직접 만나 보니 어떻던가요?”
“얄미운 구석이 있는 놈이지만, 실력은 진짜배기 같더군. 인간이 아니라, 잘 벼려진 칼을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지금 칭찬을 하는 건가? 붉은 용이…… 칭찬을?’
저 콧대 높은 오비데우스가 다른 이를 인정하는 말을 하다니, 가스파르테가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