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23
“뭐, 그래 봤자 인간이지. 북부의 군대와 성직자를 총동원해서 간신히 키르케네스를 이긴 모양인데, 내 적수는 아니다. 너와 싸우면 비슷하려나?”
“…….”
가스파르테는 말을 아꼈다.
“크로우 백작은 키르케네스의 비늘을 뚫고 목을 벴으니, 공격력은 너보다 강하겠군. 하지만 네놈에게는 마법이 있으니까. 뭐, 뱀파이어의 마법이라고 해 봤자, 애들 장난 같은 재주지만, 크로우 백작한테는 먹히겠지.”
“크로우 백작을 얼굴만 보고 오신 게 아니라, 힘도 가늠해 보고 오신 겁니까?”
“그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녀석이 좀 까불길래, 죽여 버리려다 말았지.”
용과 박쥐가 테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응접실 바깥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왕이시여, 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내가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 잊었느냐? 가장 강한 용께서 돌아가시거든 듣겠다.”
응접실에 찾아온 부하의 보고에 가스파르테가 야단을 쳤다. 다분히 오비데우스의 기분을 고려한 처신이었다.
오비데우스는 그런 뻔한 아첨이 싫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급한 일인가 본데, 들어 보지.”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안으로 들이겠습니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응접실 문이 열렸다.
실내로 들어온 적혈귀는 왕과 붉은 용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빠르게 본론을 말했다.
“성채 지하에 가둬 둔 드레이크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놈의 난동으로 수용소 일부가 붕괴했고, 수용자와 실험체 들이 토사에 매몰됐습니다. 매몰되지 않은 몬스터들은 지상으로 올라오려 발악하고 있습니다.”
“무어라?!”
가스파르테의 속이 뒤집힐 소식이었다. 게다가 이런 사건을 오비데우스 앞에서 듣게 되다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가스파르테보다 더 놀란 게 오비데우스였다.
“드레이크가 폭주한다는 게 무슨 말이냐? 그 땅도마뱀은 내가 직접 정신을 제압했다. 어떤 고문을 가해도 얌전히 엎드려 있을 놈이란 말이야.”
“그, 그게,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보고하는 적혈귀는 한참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이다 오비데우스의 재촉을 듣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현장에 급파된 혈마법사들의 판단에 따르면, 드레이크는 정신지배를 풀어 버린 것 같다고…….”
“뭐? 그게 말이 되느냐? 내 마법을 한낱 땅도마뱀 따위가……. 가만?”
오비데우스의 머릿속을 스치는 존재가 있었다.
그와는 어린 시절부터 앙숙이며, 그의 정신지배를 풀어 버릴 만큼 강력한 마법 능력을 보유한 존재.
‘설마 ‘나후타야’가……?’
그가 떠올린 존재는 남부의 푸른 용, 나후타야였다.
나후타야는 다른 건 몰라도 정신계 마법만큼은 오비데우스를 한참 넘어서는 실력자였다.
“혹시 근래에 드레이크에게 접근한 놈 중에 수상한 자는 없었나? 눈동자가 푸른색 또는 녹색인 놈이 접근하지 않았어?”
“앗, 최근에 수용소에 가둔 인간 용병이 파란 눈동자입니다. 저희 일족을 수십 명이나 죽인 그놈이지요.”
테온은 원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역용술로 눈동자 색을 바꿨고, 그게 새로운 오해를 만들고 있었다.
‘어쩐지, 용병 주제에 혈마법사를 잘 상대한다 했더니, 나후타야가 보낸 하수인이었군. 내가 뱀파이어들과 가깝게 지내는 걸 어디서 주워들었나? 빌어먹을, 이런 식으로 내 얼굴에 똥칠을 해?’
과거부터 사사건건 오비데우스가 하는 일에 딴지를 걸었던 그녀라면 이런 짓을 벌이고도 남았다.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분노한 오비데우스가 즉시 불꽃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앗, 가장 강한 용이시여! 오, 오비데우스 님?!”
붉은 용이 말도 없이 자리를 떠 버렸다.
당장 드레이크를 제압해 주어야 할 붉은 용이 어디론가 가 버리자, 가스파르테는 영문도 모른 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지하로 달렸다.
* * *
드레이크를 날뛰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이오안은 적혈의 정신지배를 풀지 못했지만, 내가 용마주의 공능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
“이상하다……. 적혈의 정신지배가 이렇게 강할 수가 없는데…….”
“거, 노인네 아까부터 되게 구시렁거리네.”
이오안은 호언장담했던 작전이 실패해서 민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드레이크를 활용해 수용소를 무너뜨린다는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자유롭게 날뛰어 보라고 권하자, 드레이크가 기다렸다는 듯 온몸을 펄떡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꽈르르릉-!
거대한 지저용왕의 몸부림에 지하 수용소는 모래성처럼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강대한 몬스터가 대체 왜 뱀파이어들에게 붙잡혀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깔려 죽겠다!”
나는 재빨리 답허성실을 펼쳐 드레이크의 대가리 위로 올라갔다.
드레이크는 조르가드나 키르케네스와는 또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용을 비하할 때 도마뱀에 빗대긴 했지만, 드레이크는 정말로 크기만 거대할 뿐, 생긴 건 도마뱀과 똑같았다.
납작한 원통형 몸에 균형 잡힌 네 다리, 긴 꼬리와 원추형 머리통.
눈은 퇴화했는지 흔적만 남아 있고, 거죽에는 비늘 대신 진득한 점액이 흘렀다.
그나마 용다운 특징이라면, 목덜미에 우람하게 돋아난 두 개의 뿔이 전부였다.
“일단 여기 좀 앉아.”
나는 이오안과 아우레오를 각각 드레이크의 뿔에 기대어 앉히고,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드레이크의 대가리 위에 서서 녀석이 사방을 때려 부수는 장관을 구경했다.
꽝! 꽈앙! 우르르-!
“이거 신나는걸!”
드레이크가 꼬리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용소 바닥이 와르르 무너졌다.
건물 잔해와 함께 각종 몬스터와 수용자 들이 쏟아졌고, 살아남은 일부 몬스터들이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버둥거렸다.
“저쪽이다! 드레이크가 폭주하고 있다!”
“막아라! 조금만 기다리면 왕께서 직접 오실 거다!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막아!”
상층에서 적혈귀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다. 하긴, 이런 소란을 듣고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보게, 지하 시설 파괴는 드레이크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쯤에서 밖으로 나가지! 내가 길을 안내할 테니 어서 달리게!”
“하하, 뭐가 그리 급해? 이놈을 조종하는 게 상당히 재미있는데, 조금만 더 때려 부수다가 가는 게…… 음?”
한창 신이 나는 와중에, 감각에 익숙한 기운이 감지됐다.
묵직하고 뜨거운, 마치 용암 같은 마나의 파동.
오비데우스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당장 나가자.”
나는 즉시 묶어 놓았던 이오안과 아우레오를 풀어 어깨에 올렸다.
갑자기 변한 내 태도에 이오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서둘러 밖으로 안내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혈교와 귀혈의 공통점
이오안은 파라쿨라 성채의 구조를 세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사람이 다닐 만한 통로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수로나 돌 틈, 심지어 지네가 파 놓은 작은 땅굴까지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수용소에 갇혀 지내면서 핏방울을 이용해 모든 샛길을 샅샅이 돌아다닌 것이다.
나는 그의 안내를 따라 빠르게 성채를 빠져나갔다.
양쪽 어깨에 이오안과 기절한 아우레오를 둘러업은 채 한참을 달려, 하수도를 통해 바깥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성공이군.”
하수도는 서부 초입의 해안으로 통했고,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각하! 역시 여기에 있었군!”
“어떻게 된 일이에요? 걱정했잖아요!”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카심과 이자벨라가 나를 반겼다.
“뭐야, 여기서 날 기다린 거야?”
“그렇다네. 자네가 상행 도중에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랐는지…….”
“적혈 측에서 뭔가 수를 썼을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각하라면 분명 탈출할 테니, 카심과 저는 각하의 무구를 챙겨서 파라쿨라 성채 주변을 맴돌며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카심이 이자벨라를 어르고 달래서 마라고사로 다시 데리고 왔던 모양이다.
그들은 상행을 마치고 돌아온 황금 거미 상회로부터 테일로우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접했고, 즉시 도시를 떠나 파라쿨라 성채 인근 해안에서 나를 기다린 것이다.
“무구까지 챙겨 오다니, 좋은 판단이다.”
나는 두 암혈귀에게서 운철묵검과 백룡갑, 축복의 망토를 건네받아 착용했다.
이제 아우레오도 구출했겠다, 조만간 서부를 떠나야 하니 구태여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용병 테일로우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게 손해다. 로드릭이나 적혈 측에 테일로우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귀찮은 일이 생길 테니까.
오도독, 오독.
역용과 축골을 풀자, 안면이 울룩불룩 움직이며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눈동자도 검은색으로 바뀌고, 팔다리도 이전의 비율로 돌아왔다.
‘몸이 날아갈 듯 가볍구나.’
무공을 제약하던 역용과 축골을 해제하고, 무구까지 완전하게 갖추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내공도 백오십 년을 넘어서는 지경이니, 지금이라면 오비데우스가 찾아와도 붙어 볼 만할 것이다.
“각하, 어깨에 짊어진 두 사람은 누구예요? 어라, 그 발가벗은 꼬맹이는 전에 각하랑 같이 다니던 아도나이 교회의 사제 아니에요?”
이자벨라가 아우레오를 알아봤다.
아우레오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얘가 왜 서부에 있어요? 앗, 혹시 칠 인의 징벌자?”
“그래, 맞다.”
“칠 인의 징벌자 중 한 명이 적혈에 납치됐다더니, 그게 저 녀석이었구나.”
이자벨라는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듯 목소리를 높였다.
“각하, 설마 이 녀석을 구하려고 파라쿨라 성채에 일부러 잠입한 거예요? 미쳤네, 미쳤어.”
이자벨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카심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에게 그런 면모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얘 혹시 각하의 숨겨 둔 아들이에요?”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두 암혈귀의 헛소리를 일축하고, 이오안을 소개했다.
거동이 불편한 이오안은 내 등에 업힌 채 머리를 덮은 넝마를 걷었다.
“오랜만이구나, 카심. 나를 기억하느냐?”
“……이오안 님?”
“이오안? 저 영감이 왕사 이오안 님이라고요?”
카심은 이오안을 한눈에 알아봤다.
이자벨라도 이름을 들어 본 듯 알은체를 했다.
“그래, 내가 바로 암혈의 마지막 왕사, 이오안 블라디미레스다. 너도 우리 일족의 아이로구나.”
이자벨라가 무어라 답변하려 할 때, 카심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을 가로챘다.
“살아 계셨군요, 이오안 님. 이쪽은 이자벨라 발렌티누스로, 꼭두각시술의 전승자입니다.”
“발렌티누스 일파가 둘이나 살아남다니 경사로군. 일족 재건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어.”
이오안은 이자벨라를 보며 기꺼운 듯 웃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도 일족의 자라는 새싹을 보니 힘이 솟는 모양이다.
“이오안 왕사의 이야기는 할아버지께 많이 들었어요. 세상에, 다른 뱀파이어도 아니고 왕사가 살아 계셨다니…….”
기쁜 건 이자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왕사는 역대 암혈의 뱀파이어들이 축적한 모든 지식을 한 몸에 지닌 존재다. 단순히 일족의 생존자 한 명을 더 찾아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기쁜 일이었다.
반면, 카심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적암혈전(赤暗血戰)에서 혼자 도망쳤던 카심에게는 일족의 큰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이오안의 등장이 다소 불편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