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24
“어려워 말거라, 카심. 내 너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
“……면목이 없습니다, 왕사.”
평소 같으면 자기가 도망친 건 옳은 선택이었다는 둥, 최후의 옥쇄는 지도층의 오판이었다는 둥 핑계와 합리화를 늘어놓았을 카심이지만, 정작 자신을 위로하는 이오안의 따뜻한 목소리에는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죄송하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박쥐들끼리 해후는 나중에 하고, 일단 여길 벗어나자. 적혈귀들은 우리가 지하에 매몰된 줄 알겠지만, 혹시 탈출의 흔적을 발견하면 주변을 수색할 테니까.”
“그래요. 일단 마라고사로 돌아갈까요?”
“아니, 적혈 측에서 로드릭에게 접근한 걸 보면, 마라고사 내부에도 나름의 소식통을 갖고 있겠지. 황무지에 은신처를 새로 구하는 게 낫겠어.”
나는 의식 없는 아우레오를 업었고, 이오안은 카심의 리자드맨이 업었다.
우리는 빠르게 파라쿨라 성채에서 멀어졌다.
* * *
꼬박 하루를 달려 괜찮은 장소를 발견했다.
바위가 많은 암반 지대였는데, 바위 균열에 몸을 숨기자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아우레오를 눕히고,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눈에 보이는 치명상은 없는데, 어째서인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인간 사제는 적혈의 마법에 당한 게야. 사제가 날뛰면 곤란하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쇠약의 저주를 씌운 것이지.”
“저주를 풀 방법은 없나?”
“사제에게는 확고한 신앙이 있으니, 저주는 그냥 두어도 풀릴 걸세. 한 열흘쯤 걸릴 텐데, 그동안 탈수로 죽지 않게 물이나 잘 먹여.”
확실히 이오안의 지식은 도움이 됐다. 다른 건 몰라도, 뱀파이어들이 사용하는 기술에 한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그 유명한 용살기사 테온 크로우 백작이었군.”
이오안은 이동하는 동안 카심과 이자벨라에게 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두 암혈귀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도 전해 들었다.
“내 명성을 들어 본 것처럼 말하는군. 지하 수용소에서도 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나?”
“나는 가능하지. 핏방울을 상층으로 올려보내서 적혈의 뱀파이어들이 하는 대화를 훔쳐 듣곤 했으니까.”
이오안은 내 정체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그때 이자벨라가 붉은 액체가 담긴 잔을 들고 다가왔다.
“왕사, 이것 좀 드세요. 카심과 제가 정혈(精血)을 모아 왔어요.”
“매번 고맙구나.”
의식도 되찾지 못한 아우레오와 달리, 이오안은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카심과 이자벨라가 생명력을 나눠 준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서로의 피를 나누어 상처를 회복하거나 기력을 되찾는 게 가능했다.
이오안이 입가에 묻은 정혈을 핥으며 카심에게 물었다.
“카심, 듣자 하니 네가 적혈에게서 피의 권능을 훔쳤다고?”
“예, 왕사. 그 덕분에 저와 이자벨라는 혈마법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아직 수준은 미흡하지만요.”
카심의 대답에 이오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유달리 영특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피의 권능을 익힐 줄이야…….”
이오안의 칭찬에 카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노회한 카심도 이오안 앞에서는 한참 어린 후배에 불과했다.
“혈마법을 익히는 것도 좋지만, 어둠의 일족이 암혈의 비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떤 재주를 익혀도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꼴이지. 오늘부터 너희 둘은 나에게 수업을 받아라. 암혈의 비기를 가르쳐 주마.”
“하지만 왕사, 저희는 육체의 권능이 없는데요?”
“권능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몇 가지 있다.”
그날 이후 이오안은 두 암혈귀에게 일족의 비술을 전수했다.
그가 가르치는 기술은 암혈의 왕족이나 고위 원로들만 사용하던 고급 기술로, 원래 같으면 카심이나 이자벨라가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오안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아낌없이 기술을 전수했다.
당장 암혈의 생존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기술의 명맥이 끊기지 않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장 먼저 배울 비기는 ‘피의 공명’이다. 적혈에 비해 마법적 능력이 부족한 암혈이 꼭 익혀야 할 재주지.”
피의 공명은 마력이 없어도 다양한 특수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비기였다.
둘 이상의 암혈귀가 공명을 통해 서로의 감각이나 생각을 공유할 수도 있고, 숙련도가 오르면 공간이동처럼 서로의 위치를 바꿀 수도 있었다.
‘저건 활용법이 무궁무진하겠군.’
중원의 무공은 물론, 이 세계의 마법과도 궤를 달리하는 암혈의 혈족 권능에 나도 관심이 쏠렸다. 이세계의 절학을 구경할 좋은 기회였다.
* * *
며칠 동안 이오안의 수업을 지켜본 나는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뱀파이어의 기술을 배운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기술이 자꾸 등장했기 때문이다.
“모든 흡혈귀의 권능은 귀혈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피의 권능도, 육체의 권능도, 심지어 혈마법이나 꼭두각시술도 모두 귀혈이 나누어 준 능력이거나, 그걸 응용한 것이지.”
이오안의 설명에 따르면, 귀혈의 권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송곳니로 상대의 피를 흡수해 생명력과 마력을 충전하는 [흡혈의 권능].
눈빛만으로 약자의 정신을 지배하는 [매혹의 권능].
척추가 부러지고 머리가 날아가도 심장만 멀쩡하면 부활할 수 있는 [불사의 권능].
‘이거 완전히 혈교의 삼대마공이잖아?’
귀혈의 비기는 혈교의 삼대마공과 유사했다.
흡혈의 권능은 동혈악왕기(童血惡王氣), 매혹의 권능은 섭혼마안공(攝魂魔眼功), 불사의 권능은 만상혈류신(萬象血流身)과 똑같았다.
‘설마 혈교의 개파조사가 귀혈의 뱀파이어였던 것인가?’
예전 같으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 치부하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넘길 내용이 아니었다.
당장 나도 중원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세계에 불시착했고, 부락 전체가 집단으로 차원이동을 한 오크들의 사례도 있다.
혈교의 개파조사인 혈마(血魔)는 외모가 말도 못 하게 추악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 흡혈귀의 모습이라면 그런 식으로 와전된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귀혈의 권능을 이해하면 적혈과 암혈의 권능도 자연히 원리를 터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피의 장막’은 ‘불사의 권능’을 응용한 것으로서…….”
“잠깐.”
나는 이오안의 설명을 끊었다. 뱀파이어의 권능은 흥미로운 재주였지만, 나에게는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이오안, 혹시 네가 가진 과거의 기억 중에, 귀혈의 행방에 관한 것도 있나?”
내 물음에 이오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사파에서 온 용사
오비데우스의 약점
“내가 사제들에게 듣기로, 귀혈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하던데, 맞나?”
“그렇다네. 갑자기 그건 왜?”
“혹시 귀혈이 집단으로 차원이동을 한 게 아닐까 싶어서.”
“으음…….”
내 가설에 이오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가 이런 말을 하기 전부터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대답했다.
“선조의 기억에 따르면, 귀혈의 마지막 모습은 붉은 용의 부름을 받아 화산 지대로 향하는 것이었네.”
그리고, 당시 붉은 용은 이동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귀혈은 용의 마법 실험을 보조할 조수 역할로 불려 갔을 터다.
“귀혈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어도, 평범한 공간이동 따위를 연구하는 데 붉은 용이 굳이 뱀파이어의 손까지 빌렸을까? 아마 초장거리 공간이동 또는 차원이동 같은 새로운 이동 마법을 연구했겠지.”
“그렇다면 실험 도중에 발생한 차원이동에 귀혈이 휩쓸렸을 수도 있겠네요! 오덴세섬의 오크들처럼요!”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척되자, 나도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이 보이는 듯했다.
‘지금까지 얻은 단서를 조합하면, 역시 귀혈은 중원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당시 붉은 용이 연구하던 이동 마법 자료에 중원으로 가는 방법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차원 관문을 여는 법, 닫는 법, 원하는 차원으로 가는 좌표 설정 방법 등등…….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정보가 남아 있을지도…….’
오크 주술사들이 차원 관문의 분석을 마치거나, 내가 무공으로 등선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현실적인 방법 같았다.
문제는, 연구를 진행한 장소가 붉은 용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서부 화산 지대라는 것이다.
‘그림의 떡이네.’
자기 집 안까지 들어와서 지식을 훔쳐 가는데, 오비데우스가 곱게 놔둘 리 없다.
지금 내가 가진 무공으로 붉은 용과 싸우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존재 자체도 확실치 않은 연구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화산 지대를 들쑤시고 다니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때, 이오안이 나를 보며 말했다.
“자네, 혹시 붉은 용의 이동 마법 연구 자료가 필요한가?”
“뭐,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좋겠지.”
이오안은 내가 ‘아주 먼 곳’에서 왔다는 사실과 귀혈의 실종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걸 짐작하는 듯했다.
‘눈치 한번 더럽게 빠른 늙은이로군.’
이오안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니, 무언가 흉계를 꾸미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오안이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자네는 북부 백룡을 해치운 용살기사가 아닌가? 이번에는 서부의 붉은 용을 처단하는 게 어때? 오비데우스를 처치하면 그놈이 가진 모든 연구 자료를 얻을 수 있을 텐데.”
“서부의 붉은 용이 뉘 집 개 이름이냐? 아무리 나라도 용을 상대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북부 백룡도 여러 행운이 겹친 끝에 간신히 목을 벨 수 있었지.”
내 말에 현장에 함께 있었던 이자벨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오안은 면박에 굴하지 않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오비데우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면?”
“치명적인…… 약점?”
내가 관심을 보이자 이오안이 웃었다. 어째서인지 그는 오비데우스를 반드시 죽이고 싶은 것 같았다.
“오비데우스의 약점을 알기 전에, 우선 ‘용의 영역’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겠군. 용은 각자의 영역이 정해져 있고, 자기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네. 흰 용은 북부를, 붉은 용은 서부를, 푸른 용은 남부를, 마지막으로 검은 용은 동방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씀이야.”
이오안이 우쭐대며 자기 지식을 풀어놓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약점을 설명하기도 전에, 사전 정보부터 오류가 있었다.
“아니, 붉은 용은 서부를 벗어날 수 있다. 내 면상을 보겠다고 북해의 오덴세섬까지 찾아온 적도 있지.”
“네에?! 언제요?!”
내 말에 이자벨라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카심도 눈을 치켜뜨고, 사실인지 묻고 있었다.
“서부로 떠나기 직전의 일이다. 내 침실에 불쑥 찾아와서 오만한 말을 지껄이더군.”
그때를 생각하자 또 열이 뻗치는 기분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강적을 마주하고, 힘의 차이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건 도저히 못 할 짓이었다.
“사실 그놈 때문에 서둘러 서부로 온 거야. 그날 그놈이 보여 준 마법이 대단했거든. 강적이 나타났으니, 나도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빠르게 힘을 모을 필요가 있었지.”
“과연, 영지 내정에 푹 빠져 있던 각하가 갑자기 적혈의 뱀파이어를 사냥하자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로군.”
카심은 이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잠깐 기다린 이오안이 말을 이어 갔다.
“이미 만나 봤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자네를 찾아온 건 적발 적안의 미남자였지? 그건 오비데우스의 실체가 아니야. 일종의 ‘분신(分身)’이지.”
“분신?”
“그래. 붉은 용은 아주 오래전부터 서부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했어. 차원이동 마법을 연구한 것도 그런 이유일 테고. 그리고, 당대의 붉은 용 오비데우스가 최근에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분신술’이네.”
오비데우스는 기나긴 연구 끝에 자기의 의식과 감각을 그대로 담은 분신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귀혈의 뱀파이어를 기반으로 육신을 아름답게 빚어낸 뒤, 강력한 마법으로 영혼을 연결해 원격으로 통제하는 기술을 창안한 것이다.
“일종의 언데드란 얘기잖아? 나를 찾아온 오비데우스는 분명 살아 있었다. 숨을 쉬고, 말도 하고, 심지어 풍부한 생명력과 어마어마한 마력까지 느껴졌어.”
“그럴 테지. 평범한 언데드라면 그 오비데우스가 수백 년이나 걸려서 만들었겠나? 오비데우스의 분신은 언데드 따위가 아니야. 살아 있단 말일세. 그러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을 본체와 공유할 수 있지.”
심지어 오비데우스의 분신은 본체가 사용하는 모든 마법도 똑같이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마력을 서부에 있는 본체에서 끌어다 써야 하니 위력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가 지금껏 만나 본 누구보다 강했다.
‘분신술이라니, 놀라운 기술이군.’
나를 찾아왔던 그놈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의 결과물이었다니, 그런 걸 스무 개쯤 만들면 온 세상을 오비데우스가 지배할 수도 있을 터다.
“그럴 수는 없네. 내가 아까 말했지? 오비데우스에게는 다른 용에게 없는 약점이 있다고. 그 분신이 바로 오비데우스의 약점이야.”
“그게 무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