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25
“오비데우스의 분신이 활동하는 동안, 본체는 깊은 잠에 빠져 버린다네. 단순히 본체가 분신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빙의(憑意)’하는 방식이거든.”
“……!”
이오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오비데우스를 처치할 결정적인 정보였다.
‘놈이 분신에 빙의했을 때, 본체를 습격한다면?’
제아무리 용이라도,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일 검에 목을 벨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세상에 나를 위협할 존재는 더 이상 없다.
이오안의 말에 따르면 남부에는 푸른 용이, 동방에는 검은 용이 사는 모양이지만, 그놈들은 오비데우스와 달리 자기 영역을 벗어날 수 없으니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오직 붉은 용 오비데우스만이 자기 영역인 서부를 벗어나 대륙을 활보할 수 있었고, 나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존재도 그놈뿐이다.
“본체와 분신을 동시에 통제하진 못하는 건가? 오비데우스 정도 되는 영물이면 정신력도 우리의 상식을 초월할 텐데?”
“아무리 위대한 존재라도 의식을 둘로 나눌 수는 없지. 그렇게 되면 자기 존재가 둘로 나뉘는 셈이니까.”
이오안은 확신하며 말했다.
나는 그의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세계에 양의분심결(兩儀分心結) 같은 기술은 없나 보군.’
중원 오악검파(五嶽儉坡) 중 하나인 무당파(武當派)에는 사람의 마음을 둘로 나누는 미친 심법이 있었다.
양의분심결을 익힌 사람은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데, 극성에 이르면 서로 다른 두 가지 내공을 동시에 연마하는 것도 가능했다.
‘흐흐, 생각해 보니, 오비데우스가 양의분심결을 익혔다면 천하에 적수가 없었겠구나.’
그놈이 귀혈을 따라 무림으로 차원이동하지 않은 게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한데, 이오안, 오비데우스의 약점 같은 걸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런 건 단순히 오래 살았다고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닌데?”
그가 아무리 역대 암혈왕사의 지식을 모두 가지고 있어도 알기 힘든 정보였다. 파라쿨라 성채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고 알 수 있는 정보도 아니었다.
“이건 선조에게 물려받은 지식이 아닐세. ‘늪의 조언자’에게 전해 들은 내용이지.”
“늪의 조언자?”
“남부의 요정숲에 사는 신비로운 현자인데, 내가 수용소에 갇히기 전에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지.”
정보의 출처는 중대 사안이다.
만약 이게 잘못된 사실일 경우, 괜히 화산 지대로 진입했다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오비데우스에게 역공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늪의 조언자라는 놈이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은 없나? 거짓말을 했다거나?”
“그럴 리는 없네. 그는 엘프거든. 엘프는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이오안의 설명에 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들뜬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엘프는 원래 거짓말 안 해.’라는 식의 대답이라니, 신용할 수 없는 정보였다.
“그럼 오비데우스가 언제 분신술을 쓰는지도 알 수 있나? 무턱대고 둥지로 쳐들어갔다가, 놈이 하필 본체로 활동하고 있으면 낭패인데.”
“그 시점을 정확히 알 방법은 없네. 늪의 조언자에게 그것까지 물어보진 않았거든.”
여기까지 대화를 나눴을 때, 아우레오가 깨어나려는 기미를 보였다.
이오안의 말대로, 구출한 지 딱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사제가 우릴 보면 상황이 복잡해지겠군. 나는 카심과 이자벨라를 데리고 다른 은신처를 찾겠네. 위치는 추후에 박쥐를 보내서 공유하지.”
“알겠다. 나는 아우레오를 데리고 마라고사로 돌아가지. 급히 전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 박쥐를 보내.”
세 암혈귀는 아우레오가 깨어나는 걸 보고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들은 당분간 셋이 함께 지내며 일족의 비기 전수에 매진할 것이다.
* * *
“으음……. 여, 여기는……?”
“정신이 드냐?”
“……테온? 역시 테온이 와 주었군요! 깊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손길이 저를 찾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광야를 헤매는 와중에도 테온과 저는 같은 길 위를……!”
아우레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중부에서 제법 잘나가는 사제가 되었다더니, 호들갑 떠는 모습은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알겠으니까 감동은 그 정도로 하고, 너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중부 대교구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서부까지 와서 칠 인의 징벌자인지 뭔지 하면서 설치고 다니는 거냐고.”
“아, 그게요…….”
아우레오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우레오가 서부까지 온 건 역시 나 때문이었다.
“테온에게 내려온 신탁을 전해 들었습니다. 테온이 새로운 시련에 맞서 광야를 떠돌고 있는데, 저만 안락한 대교구에서 달콤한 포도주를 마시고 있을 순 없었습니다.”
“그냥 달콤한 포도주나 마시는 게 도와주는 거다. 너 때문에 내가 저런 박쥐 소굴까지 기어들어 가야겠냐?”
“…….”
아우레오는 면목이 없어 고개를 떨궜다. 나를 돕겠다며 서부까지 달려와 놓고, 정작 동료를 모두 잃은 채 내 손에 구출됐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퍼뜩 떠오른 듯, 고개를 쳐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그러고 보니, 테오도르 경은요?! 테오도르 경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분을 찾아야 해요! 간악한 흡혈귀들이 그분을 노리고 있을 거라고요! 한시가 급해요!”
“급하긴 뭐가 급하냐? 테오도르는 이미 마라고사에 도착해서 너를 구출하기 위한 원정대를 조직하고 있다. 그놈은 너와 달리 제 앞가림을 하는 모양이더군.”
“아, 그런가요?”
아우레오가 다시 한번 고개를 떨궜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 함께 마라고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녀석을 마라고사에 있는 개척 교회에 데려다주고 나면, 서부에서 할 일은 모두 마치는 셈이다.
별다른 돌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파에서 온 용사
푸른 용 나후타야
한편, 테온과 헤어진 세 암혈귀는 새로운 은신처에서 비기를 수련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너희의 발전이 빠르구나.”
“왕사의 가르침 덕입니다.”
이오안의 칭찬에 카심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자벨라는 우쭐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음료를 홀짝였다.
“그나저나 왕사, 그때 왜 그러셨어요?”
“뭘 말하는 게냐?”
“각하랑 같이 있을 때요. 왕사께서 각하와 오비데우스 사이에 싸움을 붙이려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이자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카심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안은 둘의 얼굴을 보며 작게 웃었다.
“흘흘, 옳게 보았다. 나는 용살기사의 손을 빌려 오비데우스를 죽이고 싶었지.”
“예? 왜요? 혹시 귀혈이 붉은 용을 돕다 실종된 것 때문에 그러세요?”
“그건 너무 옛날 일이고, 따지고 보면, 귀혈은 우리 암혈과 별개의 일족이 아닙니까? 굳이 왕사가 나서서 복수할 필요는…….”
이자벨라와 카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게 아니다. 나도 고대의 붉은 용에게는 원한이 없어. 내가 죽이고 싶은 건 오직 당대의 붉은 용, 오비데우스뿐이다.”
이오안은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오비데우스가 적혈을 지원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혈에게 여러 일을 시키고 그 대가로 놈들의 뒤를 봐주고 있지. 우리 암혈이 중요한 전투마다 일방적으로 적혈에게 밀린 것도, 붉은 용의 간섭 탓이야.”
“그럴 수가! 그게 사실인가요?”
“물론이지. 파라쿨라 성채에 갇혀 있는 동안 수집한 정보다. 붉은 용이 수시로 성채에 드나들더군.”
이오안의 눈동자가 복수심에 불탔다. 지금까지 보여 준 인자한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섬뜩한 눈빛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파라쿨라 성채의 수용소에 갇혀 기나긴 세월 동안 고문을 견뎌 온 그에게 남은 건 증오와 분노뿐이었던 것이다.
“카심, 이자벨라, 잊어선 안 된다. 적혈은 물론이고, 오비데우스도 복수의 대상이야. 원한을 뼈에 새겨라. 내면의 악의를 계속 키워라. 분노는 곧 힘이야. 이용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이용해. 복수를 마치기 전까지는 죽지도 마라.”
“예, 왕사. 명심할게요.”
눈을 빛내며 대답하는 이자벨라와 달리 카심의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웠다.
이오안이 그를 빤히 쳐다보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남부의 어느 깊은 밀림.
우거진 수목이 햇살을 가려 사방이 어둑했고, 바닥에는 짙은 이끼가 푹신하게 깔려 있어 밟을 때마다 물을 죽죽 뱉어 냈다.
오비데우스는 길게 늘어진 덩굴을 헤치며 한참을 나아간 끝에 목표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콰콰콰콰-.
깊은 밀림 한가운데에 폭포가 있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는 바닥에 커다란 용소를 이루고, 허공은 짙은 물안개로 가득 찬 곳이었다.
“언제 와도 기분 나쁜 곳이군.”
오비데우스는 천성이 뜨겁게 타오르는 불같은 존재다. 붉은 용에게 질퍽한 습지와 거미줄 같은 강으로 가득 찬 남부 밀림은 최악의 장소였다.
“손님을 언제까지 세워 둘 셈이지? 이 지저분한 숲을 몽땅 태워 버려야 모습을 드러낼 텐가?”
오비데우스는 폭포를 향해 으르렁대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분노가 뚝뚝 흘렀다.
잠시 후, 폭포 가운데가 쩌억 벌어지더니, 알몸의 미녀가 걸어 나왔다.
아리따운 여인은 비현실적인 청록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녔고,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고왔다.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와 몸의 굴곡이 미학적 완성을 이루고, 끝이 뾰족한 귓바퀴는 독특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폴짝-.
미녀의 머리 위로 웬 개구리 한 마리가 올라왔다.
미녀는 머리 위에 올라온 개구리를 치울 생각이 없는지, 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오비데우스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하찮은 놈들과 어울리는군.”
“호호, 그렇게 말하는 너도 요즘 뱀파이어들과 자주 만나는 것 같던데?”
놀랍게도 오비데우스의 말에 대답한 건 여인이 아니라 개구리였다.
초록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개구리가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모르겠는데? 푸석푸석한 걸 좋아하는 네가 무슨 일로 촉촉한 남부 밀림까지 왔을까?”
“…….”
오비데우스는 잠시 개구리를 노려봤다. 하지만 별다른 거짓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개구리는 정말로 오비데우스의 방문 목적을 모르는 듯했다.
“네가 서부로 하수인을 보낸 걸 알고 있다. 내가 흡혈귀들에게 선물한 드레이크를 이용해서 파라쿨라 성채를 난장판으로 만든 게 바로 너지?”
“무슨 소리야? 내가 서부 같은 먼지 구덩이에 우리 예쁜이들을 왜 보내겠어? 그리고 드레이크? 너 요즘도 그런 모자란 애들이랑 노니?”
“발뺌하지 마라, 나후타야! 네년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벌인 짓인 걸 모를 것 같아? 네가 아니면 누가 나의 정신지배를 뚫고 드레이크를 조종하겠어!”
“이 빨간 도마뱀 새끼가 미쳤나, 왜 엉뚱한 곳에 와서 행패야!”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진노한 오비데우스의 양손에 시뻘건 불길이 휘몰아쳤다.
화염은 빠르게 응축하더니,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이윽고 새하얗게 빛나는 백염으로 변했다.
“……너 지금 좀 지나쳐.”
그 모습을 본 개구리, 나후타야도 분위기가 변했다.
착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살기가 진득하게 깔리고, 폭포의 물줄기가 공중으로 슬금슬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조잡한 분신 따위를 만들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더니,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재수 없게 불을 꺼내는 거야?”
“내가 직접 정신을 제압한 드레이크가 난동을 피우며 폭주했다. 현장에 있었던 뱀파이어들이 말하기를, 푸른 눈의 인간 전사가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것 같다더군.”
“……?”
“마지막으로 묻겠다, 나후타야. 진실을 말해라. 어떻게 하수인 따위로 내 정신지배를 풀었지? 설마 네년도 나처럼 분신을 만들어 낸 것인가?”
싸움도 불사할 태세의 오비데우스. 그의 진노에 나후타야도 혼란스러워졌다.
오비데우스는 오래전부터 그녀와 앙숙이지만,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싸움을 걸지는 않았다.
‘누군가 진짜로 오비데우스의 정신지배를 풀었나 본데? 저놈은 그걸 내가 한 짓으로 오해하고 있고.’
그녀는 오비데우스가 언급한 ‘푸른 눈의 인간’에 주목했다.
인간은 꼭 그녀의 하수인이 아니더라도, 원래 파란 눈동자를 흔히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