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27
“그게 뭐냐?”
“서쪽으로 가십시오, 테온 크로우. 황무지를 지나 화산 지대로 가면 용의 둥지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붉은 용의 본체를 공격하십시오. 이것이 늪의 조언자가 당신에게 전하는 진짜 조언입니다.”
“……!”
파격적인 조언에 모든 성직자들이 경악했다.
나는 서부 밖을 돌아다니는 오비데우스가 분신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런 내용을 전혀 모르는 성직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예언에 나온 서쪽의 악은 용이었군요! 뱀파이어가 아니라 붉은 용이었어요!”
아우레오가 이제 알겠다는 듯 크게 외치고, 다른 사제들도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내리치며 동감했다.
‘이런 젠장, 신탁을 괜히 지어냈군.’
서쪽에 악이 독버섯처럼 자란다는 건 순전히 내가 지어낸 말인데, 어떻게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진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아우레오를 떼어 놓기 더 어려워졌다.
“한데, 테온은 이미 서부의 붉은 용을 만나 본 적이 있는 건가요? 오비데우스라는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과거 그놈이 남몰래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온갖 협박을 늘어놓고 사라져 버렸지.”
나는 쓸데없는 내용은 전부 생략하고,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비데우스와 나눈 이야기를 사제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 줘서 좋을 게 없었다.
“사악한 용이 빛의 기사를 핍박하고 있었군. 크로우 경은 그 모든 시련을 홀로 짊어지고 있었고.”
“테온의 성격에 싸움이 두려워서 참지는 않았을 테고, 붉은 용과 싸움이 벌어지면 무고한 영지민들이 피해를 볼까 봐 참으신 건가요? 하긴, 오덴세섬에는 용병단 하나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전투 병력이 없으니…….”
테오도르와 아우레오가 제멋대로 지껄였다. 다른 사제들도 이제서야 속사정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잘 넘어갔군.’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한발 늦더라도 오덴세섬으로 달려갈지, 아니면 늪의 조언자를 믿고 오비데우스의 본체를 습격할 것인지 말이다.
‘오비데우스가 오덴세섬을 불태우러 갔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늪의 조언자는 엘프라고 들었는데, 엘프가 굳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게 아니라면 설마 오비데우스의 이름을 팔진 않겠지.’
늪의 조언자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드레이크를 조종한 게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오비데우스는 나와 척을 진 상태다. 내 영지를 불태우러 가는 중이라고 하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이번 기회에 놈이 죽든, 내가 죽든, 결판을 내야겠다.’
붉은 용과 사생결단을 내겠다면, 지금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터다.
아직 목표한 내공을 다 얻지 못했지만, 오비데우스는 분신에 빙의해 오덴세섬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틈에 본체를 공격하면 제대로 허를 찌르는 셈이다.
“테온, 어떡하실 건가요?”
“테온 크로우 경, 자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교회는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네.”
마침 서부에는 든든한 우군도 와 있다.
나이는 어리지만 뛰어난 사제인 아우레오와 자타공인 최고의 성기사 테오도르가 내 곁에 있다.
“……용의 둥지를 치겠다.”
내가 씹어 뱉듯 말하자, 아도나이 교회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 * *
용의 둥지를 공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당장 화산 지대로 쳐들어갈 수는 없다.
출정에 앞서 선결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가 필요하다. 혹여 놈의 본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놈을 상대하는 동안 하수인을 막아 줄 병력이 필요해.’
직접 오비데우스와 맞서는 건 나와 아우레오, 테오도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문제는 그놈이 휘하에 거느린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오비데우스는 흑마법을 혐오하는 것 같았으니, 키르케네스처럼 죽음의 군대를 이끌진 않겠지. 하지만 순수 마력이 키르케네스보다 강하니까, 정신지배로 확보한 하수인의 숫자가 상당할 거야.’
아군이 더 필요하다.
카심과 이자벨라, 이오안은 물론이고,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춘 ‘세력’을 포섭해야 한다.
‘세력이라, 서부에서 오비데우스와 맞서 싸울 만한 세력이 뭐가 있지?’
서부는 북부나 중부와 달리 인간의 세력이 약하다. 아니, 약한 정도가 아니라 통합 세력 자체가 없다.
마라고사의 인간들은 하나로 뭉치기도 어려울뿐더러, 전쟁 경험이 부족해 싸움에 나서 봤자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오비데우스가 자랑하는 화염 마법 한 방이면, 수십 명이 숯덩이로 변하고 수천 명이 도망칠 것이다.
‘……뱀파이어, 이번에는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들을 끌어들여야 해.’
적혈의 뱀파이어들은 자기네 왕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거대한 세력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이오안의 말에 따르면, 당대 적혈의 왕 가스파르테 파라쿨리우스는 붉은 용에게 내심 반감을 품고 있다고 했다.
오비데우스가 걸핏하면 가스파르테에게 모욕을 주는 데다, 최근에는 모종의 사고로 그의 아들까지 중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파라쿨라 성채와 오비데우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게 최상책이다. 한데, 내가 과연 적혈의 왕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의 구미를 당길 만한 몇 가지 제안이 떠오르긴 했지만,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
그래도 시도해 봐야 할 일이다.
‘만약 흡혈귀 왕이 끝까지 합류를 거부한다면, 하다못해 중립이라도 확정 짓고 와야 한다.’
나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오비데우스에게 붙는 것만이라도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 할 놈인 것이다.
사파에서 온 용사
사라진 이냐시오
나는 교회에 모인 사제들에게 당분간 단독으로 행동하겠다고 통보했다.
“아우레오는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해라. 테오도르 경은 내가 없는 동안 아우레오를 지켜 줘.”
“그게 무슨 말인가, 크로우 경? 설마 혼자서 붉은 용을 사냥하려는 건 아니겠지?”
테오도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우레오는 사정을 다 듣기도 전에 말대꾸를 쏟아 낼 기세다.
“그런 거 아니야. 화산 지대로 가기 전에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붉은 용을 상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곳이지.”
“그게 어딘가요, 테온? 저도 함께 갈게요.”
“……잠깐 밖으로.”
나는 테오도르와 아우레오만 따로 불러내서 내 계획을 이야기했다.
적혈의 뱀파이어와 붉은 용 사이를 이간질하겠다는 계획에 두 성직자는 이마를 치며 감탄했다.
“대단해요, 테온! 그런 생각을 해내다니! 성공만 한다면, 악으로 악을 치는 극상의 계책입니다!”
“흡혈귀 왕이 붉은 용에게 반감을 갖고 있다니? 아우레오 사제를 구하러 가서 그런 고급 정보까지 알아낸 건가?”
나는 두 성직자를 진정시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간계는 보안이 가장 중요하니, 너희 둘만 알고 있어. 엘프는 물론이고 서부의 사제들에게도 비밀로 해. 나는 파라쿨라 성채로 가서 가스파르테를 만나고 올 테니, 그동안 너희는 몸을 회복하든, 병력을 모으든 필요한 준비를 해라.”
“병력까진 아니지만, 중부 대교구에서 정예 전투 성직자 열 명이 오고 있네. 우리가 광야에서 습격당한 뒤 즉시 실태 조사와 구출을 위해 파견한 자들이지.”
“잘됐군. 수는 적지만, 정예라면 큰 도움이 되겠어.”
“하지만 테온, 지금 이 순간에도 붉은 용은 오덴세섬을 향해 비행하고 있잖아요. 시일이 너무 촉박한데, 차라리 서둘러 화산 지대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우레오의 걱정도 일리가 있다.
오비데우스는 비행 마법은 물론이고 틈틈이 공간이동까지 사용해 가며 남부에서 오덴세섬까지 초고속으로 이동하고 있을 터. 그의 마법이면 고작 며칠 만에 대륙을 종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흡혈귀 왕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일이 촉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해 둔 방법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닷새 뒤 돌아오마.”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교회를 나섰다.
아우레오와 테오도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배웅했고, 전령으로 온 엘프들이 심유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너희는 잠시 이쪽으로.”
나는 떠나기 직전 엘프들을 불러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몇 가지 이야기하고, 경신법을 펼쳐 교회를 벗어났다.
* * *
나는 교회를 나서자마자 마라고사를 벗어나 황무지로 향했다.
운해비영을 펼쳐 빠르게 암혈귀들과 다시 만났고, 정보를 공유했다.
“오비데우스가 오덴세섬을 불태우러 가는 중이라고?”
“오비데우스보다 먼저 도착할 순 없으니, 차라리 화산 지대로 쳐들어가 그의 본체를 치겠다고?”
“그 전에 적혈과 붉은 용 사이를 이간질한다고요? 정말 환상적인 계획이네요!”
카심은 놀랐고, 이오안은 화색을 보였고, 이자벨라는 당연히 대찬성이었다.
“시간이 없다. 이간계를 쓰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가스파르테를 만나야 해. 이오안, 적혈의 뱀파이어를 성채 밖으로 불러낼 방법이 있나?”
무턱대고 파라쿨라 성채로 찾아갔다간 말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집단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싸우지 않고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 자체가 난관인 것이다.
나는 일단 성채 밖에서 소수의 적혈귀와 접촉한 뒤, 사정을 설명하고 정식으로 안내를 받아 입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굳이 불러낼 필요는 없네. 황무지 곳곳에 적혈의 거점이 있거든. 파라쿨라 성채의 전진기지 같은 건데, 소수의 혈마법사가 상주하는 곳이야.”
딱 좋은 표적이다.
일단 황무지 거점을 찾아가 대화를 시도해 보고, 수틀리면 힘으로 제압한 뒤 준비한 명분을 이야기해도 될 것이다.
“너희는 거점까지만 함께 가고, 파라쿨라 성채에는 나 혼자 가는 게 좋겠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암혈의 뱀파이어가 성채까지 동행하면 이간계에 방해가 될 것이다.
황무지 거점에서는 다수의 혈마법사와 싸움이 벌어질 우려가 있으니 거기까지만 동행하고, 얘기가 잘 풀린 다음부터는 나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할 터다.
“나는 빼 주게. 따로 할 일이 있거든. 거점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해 주지.”
무슨 이유인지 이오안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내 생각에도 굳이 세 암혈귀가 모두 동행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오안에게 거점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받아, 나머지 일행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적혈의 왕 가스파르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부하들을 질책하고 있었다.
“이냐시오가 사라져?!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쨍그랑!
가스파르테가 던진 유리잔이 수하의 콧등에 적중했다.
수하는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보고를 이어 갔다.
“송구합니다, 피의 왕이시여.”
“은사슬로 묶어서라도 붙잡았어야지! 호위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이냐시오 님이 피의 권능은 물론이고, 암혈에게서 빼앗은 육체의 권능까지 사용하며 무차별 공격을 하는 바람에…….”
“그걸 지금 핑계라고 지껄이는 게야?! 이냐시오의 광증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정도도 예상을 못 했더냐?!”
사실 수하들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드레이크의 폭주로 성채 지하가 완전히 붕괴했고, 그 난리 통을 수습하느라 대부분의 인력이 차출된 상태였다.
하필 그 시점에 이성을 잃은 이냐시오가 지랄 발광을 하며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작정하고 덤벼드는 이냐시오 님을 어떻게 막냐고!’
다른 뱀파이어도 아니고, 전투력으로 파라쿨라 성채에서 첫손에 꼽히는 이냐시오였다.
게다가 수하들은 이냐시오의 몸에 상처를 낼 수도 없는 입장이니,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이냐시오 앞에서 수비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듣기 싫다! 당장 튀어 나가서 이냐시오를 찾아라! 이냐시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너희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예, 옛!”
왕의 엄포에 수하들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가스파르테의 얼굴이 수심에 잠겼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지…….”
늙은 흡혈귀 왕의 목소리에 피로가 가득했다.
말년에 겨우 얻은 아들에게 자꾸만 안 좋은 일이 생기고 있었다.
피의 권능과 육체의 권능을 한 몸에 지니는 건 정녕 욕심이었던가?
새로운 도전이라며 부추기던 붉은 용의 얄미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 빌어먹을 빨간 도마뱀 새끼만 아니었어도…….”
가스파르테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비데우스의 도움으로 암혈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발렌티노플에 입성하던 그날.
적혈은 암혈의 옛 기록을 탈취해 육체의 권능을 빼앗았고, 영원히 봉인하려 했다.
-기껏 전가의 보도를 얻어 놓고, 봉인이라니? 너희가 가진 피의 권능에 새롭게 얻은 육체의 권능을 더하면, 옛 귀혈의 힘을 되찾을 수도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