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28
오비데우스가 스치듯 중얼거린 말이 가스파르테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그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고, 오비데우스에게 여러 조언을 구한 뒤, 피의 권능과 육체의 권능을 한 몸에 새기는 실험을 기획했다.
그리고 첫 실험 대상자로 나선 것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 이냐시오 파라쿨리우스였다.
-꼭 네가 제일 먼저 해야겠느냐? 혹시 모르니 다른 이에게…….
-피의 왕이시여, 이건 적혈의 한계를 넘어 귀혈의 권위를 되찾는 도전입니다. 왕혈을 품은 제가 첫 번째가 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이냐시오는 진정 왕재를 타고난 사내였다. 그는 자기가 짊어진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았고, 일족의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당차게 나섰다.
-클클, 아들이 아비보다 낫군. 별것도 아닌 실험에 겁먹기는.
옆에서 오비데우스가 비아냥거렸지만, 가스파르테는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이냐시오의 단호한 의지에 가스파르테는 실험을 허락하고 말았다.
‘내가 죄인이지……. 다 내 탓이야…….’
결과적으로, 이냐시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단순히 육체의 권능을 얻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폐인이 되어 버렸다.
두 권능이 융합하며 발생한 강대한 힘.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 이냐시오의 육체는 탈피를 시작했고, 도중에 기력이 다해 정신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라프란을 있는 대로 퍼부어 소생시켰다고 안심했는데…….’
다행히 이냐시오의 목숨은 붙여 놓았지만, 그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총명하고 모범적인 아들은 온데간데없고, 침을 질질 흘리며 괴소를 짓는 광인만 남았다.
온몸에 혈관이 도드라지고 이마에는 웬 뿔까지 돋아나 외모도 흉악해졌다.
“누구든 어서 가서 찾아와라……. 총명한 내 아들을 찾아와…….”
자리에 쓰러지듯 앉은 흡혈귀 왕이 지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와, 전진기지라길래 작은 초소 정도인 줄 알았는데…… 번듯한 사원이 있네요?”
이자벨라가 입을 떡 벌린 채 모래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심도 머리를 긁적이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놀랍군. 돌도 없는 황무지 한가운데에 이런 석조 건축물이 있다니.”
목적지에 도착한 일행의 눈에 보인 것은 모래벌판에 우뚝 선 삼각뿔 모양의 고대 사원이었다.
사원의 가장 아래층에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한데, 사원 안에서 적혈의 혈마력이 느껴지지 않는군.”
그럴싸한 외관과 달리, 사원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헛걸음한 거 아니에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자.”
계획대로라면 사원 근처에서 암혈귀들은 모습을 숨기고, 내가 위험할 때만 튀어나와서 돕기로 했었다.
하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없으니, 좀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챙……! 채앵……!
“……끄악……!”
그때 계단 깊숙한 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메아리쳤다.
“방금 들었어요? 안에서 누가 싸우고 있나 봐요!”
“으음, 예상치 못한 상황인데……? 어쩔 텐가, 각하?”
일행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경계 태세를 갖추고 내려가자. 너희는 안개로 변하지 말고 일단 그냥 따라와.”
“음, 확실히 은신보다는 전투를 각오하는 게 낫겠군.”
카심은 핸드벨을 흔들었다. 그러자 모래 속에서 여러 마리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흐흐, 새롭게 얻은 녀석들을 앞세워야겠군. 이놈들아, 밥값을 할 시간이다!”
카심이 흐뭇한 표정으로 몬스터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지난 시간 동안 샌드 리자드맨 세 마리를 더 확보했고, 처음 보는 괴수도 한 마리 더 길들여 놓았다.
“이 덩치 큰 괴물은 뭐야?”
“황무지 트롤이네. 이놈을 만난 건 행운이야.”
카심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트롤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황무지 트롤은 힘과 재생력이 뛰어난 몬스터였다.
“이제 나 혼자서도 혈마법사 서넛 정도는 제압할 수 있네.”
“쳇, 그 잘난 몬스터 길들이는 법, 나한테도 빨리 좀 가르쳐 주면 안 돼요?”
우쭐하는 카심을 보며 이자벨라가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카심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넌 기초가 너무 빈약하다. 혈마법의 이론을 더 익힐 때까지 정신지배의 진수는 전수할 수 없어.”
“아휴, 그놈의 기초, 기초! 됐어요! 당분간 이오안 왕사에게 다른 기술부터 배울 거예요!”
“흥, 왕사가 이 자리에 없으니 하는 말이지만, 넌 지금 너무 복수에 갈급해. 너와 왕사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내가 다 불안할 지경이다.”
카심은 그동안 이오안의 눈치를 보느라고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었는지,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아 냈다.
“명색이 마법사가 되겠다는 년이 마음을 다스리기는커녕 증오를 북돋고 있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짓이냐? 복수도 중요하지만 일단 차근차근 기량을 쌓는 것이 순리…….”
“아아아아-! 듣기 싫다! 듣기 싫다!”
이자벨라가 손바닥으로 자기 귀를 두드리며 도리질을 쳤다.
카심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그쯤 하지. 밑에서 다 듣겠다.”
결국 내가 둘의 말싸움을 끊고서야, 일행은 사원으로 진입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사원의 괴인
“쉭! 쉬엑!”
한참을 내려가는데, 선두의 리자드맨이 무언가 발견한 듯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코끝에 옅은 혈향이 느껴졌다.
“흡혈귀의 사체로군.”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요.”
모습을 드러낸 것은 늙은 적혈귀의 사체였다. 상체가 비스듬히 잘려 두 동강이 난 모습이었는데, 아직 굳지 않은 피가 계단을 적시고 있었다.
“일격에 죽었군. 역시 내부에서 싸움이 있었나 본데?”
“흉수가 누구지? 서부에는 적혈의 거점을 습격할 만한 세력이 없는데…… 음?”
죽은 적혈귀의 복장과 소지품을 자세히 살피던 카심이 이채를 띠었다. 그는 적혈귀가 들고 있는 작은 완드(Wand)에 주목했다.
“주문 각인 무기잖아? 이건 적혈의 원로쯤 되어야 쓰는 건데?”
카심이 완드를 손에 들고 자세히 관찰했다.
완드는 짐승의 뼈로 만들어졌고, 작은 보석이 몇 개 박혀 있었다.
이자벨라도 완드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카심의 손에서 완드를 뺏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보석의 가공 형태가 굉장히 복잡해요. 마법진 같은데요?”
“그건 주문석이다. 마정석과 비슷해 보이지만, 정반대의 용도로 쓰이지. 마력을 담는 게 아니라, 배열을 새겨 놓은 보석이거든.”
주문석은 일종의 ‘마법 거푸집’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 주문석에 마력만 밀어 넣으면, 미리 새겨 놓은 마법진을 따라 마력이 배열되고, 자동으로 마법이 구현된다.
“고위 마법일수록 배열이 복잡하지. 그러니 주문석에 미리 배열을 새겨 두면 전투 중에 신속하게 주문을 완성할 수 있는 게다.”
“와! 그럼 이거 굉장히 비싸겠네요?”
이자벨라가 들고 있는 완드는 주문석이 세 개나 박혀 있었다. 세 가지 마법진이 담긴 아티팩트란 소리다.
“요런 천박한 계집을 봤나. 비싸기야 당연히 값을 매기기 힘들 정도로 비싸지. 주문석은 마정석보다도 만들기 어려운 기물이니까.”
카심의 말을 들은 이자벨라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이건 내가 가질게요. 마정석과 달라서 마력을 추출할 수도 없으니까, 각하에게는 별 가치도 없는 물건이잖아요. 제가 가져도 괜찮죠?”
“뭐, 상관없지.”
“상관없긴 뭐가 상관없어? 당장 내려놔.”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지만 의외로 카심은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마법은 금붙이처럼 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마법은 언젠가 불운으로 돌아와서 사용자를 해치게 돼.”
“마법이 아니라 완드를 훔치는 건데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훔치는 것도 아니죠. 주인이 이미 죽었으니까.”
“그래도 안 돼. 마법은 스스로 익혀서 사용해야 한다. 신비는 순리를 거스르는 자에게 벌을 내리는 법이야. 정 주문석을 쓰고 싶거든, 네가 직접 만들어서 써라.”
카심의 단호한 말에 이자벨라가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도와 달라는 듯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미를 찾는 새끼 고양이 같은 표정이었다.
“허, 이런 요망한 년. 평소의 뱀 같은 눈매는 어디로 갔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심이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카심이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기껏 얻은 기물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마법진이 세 가지나 새겨져 있다면, 이자벨라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각하까지 왜 이러나? 마법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야. 이자벨라, 그 완드 당장 내려놓으래도?”
“그 순리란 건 마법사들이 주문을 도둑맞지 않으려고 지어낸 규칙 아니에요? 남의 마법을 훔치지 않는 게 순리라면, 각하는 이미 천벌을 백 번 정도 받았어야 하는 것 같은데…….”
이 말에는 카심도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의 존재 자체가 순리 역행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마법사로부터 마력을 강제로 빼앗는 괴물. 그게 바로 내가 아니던가?
이자벨라의 말마따나 신비가 순리를 어긴 자에게 벌을 내린다면, 내가 1순위여야 했다.
“헤헷, 혹시라도 각하가 먼저 천벌을 받으면 그때 완드를 버릴게요. 그럼 되죠?”
이자벨라는 혀를 쏙 빼물더니 카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완드는 이미 그녀의 품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카심의 표정이 심각했다. 단순히 미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자벨라의 복수심과 거기서 기인한 탐욕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너무 걱정 마, 카심. 내가 잘 지켜볼 테니.”
“각하, 이건 얼렁뚱땅 넘어갈 문제가 아닐세. 정말 큰일 난다니까?”
“지금은 이자벨라의 기분을 맞춰 주자고. 이자벨라가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으면 그때 설득하면 되니까.”
카심은 방방 뛰며 반대했지만, 내가 이자벨라의 편을 들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걱정이 지나쳐 보이는 카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지금 이자벨라는 힘을 향한 집착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이니, 일단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시킨 뒤 천천히 타이르자고. 완드보다 저 집착이 더 큰 화를 부를 것 같으니까 말이야.”
“끄응……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알겠네. 하지만 너무 오래 끌면 안 돼.”
결국 카심도 이자벨라가 완드를 갖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 없는지 마지막까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늙으면 줄어드는 건 아침잠이고, 늘어나는 건 잔걱정이라더니, 인간이나 흡혈귀나 노인네들은 다 똑같군.’
카심에게 말한 내용과 달리, 나는 이자벨라에게서 완드를 빼앗을 마음이 없었다.
단지, 카심이 하도 정색하니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일 뿐이었다.
일행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계단이 끝나고, 넓은 지하 광장이 나왔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평범한 전진기지의 느낌이 아닌데?”
황무지에서 적혈귀들이 쉬어 가는 거점이라기에는 다소 이상한 공간이었다.
벽면을 따라 수십 개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삼각형 제단이 사람 가슴 높이로 솟아 있었다.
제단 위에는 완드 하나가 꼿꼿하게 서 있었는데, 색깔이 녹색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전진기지가 아니라 마법 실험실인가?”
이오안의 정보가 잘못된 것일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지하 광장에는 여러 명의 적혈귀가 토막 난 사체가 되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다들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피가 굳지 않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