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29
“설마 이들이 전부 적혈의 원로는 아니겠죠?”
“믿기진 않지만…… 맞는 것 같다. 다들 손에 주문 각인 완드를 쥐고 있어.”
이자벨라의 물음에 카심이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혈귀 원로는 전체 숫자가 채 오십 명도 되지 않는다. 한데, 지하 광장 안에 있는 사체만 세도 스물은 넘어 보였다.
적혈귀 원로의 절반 가까운 숫자가 이곳에서 토막 난 채 뒹굴고 있는 것이다.
“음? 저놈은 살아 있는데?”
그때 카심이 생존자를 발견하고 급히 뛰어갔다. 카심은 중앙에 쓰러져 있는 적혈귀 원로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너, 너는……?”
적혈귀 원로가 힘겹게 눈을 떴다. 아직 숨이 붙어 있지만, 출혈이 심해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로웠다.
“……암, 암혈의 잔당? 암혈이 어떻게 이곳에?!”
적혈의 원로는 대번에 카심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다 죽어 가던 그의 눈에 원망과 살기가 차올랐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서, 설마, ‘카라히사르의 뿔’을 훔치러 온 게냐……?!”
“뭐라고?”
“크큭, 미개한 네놈들이 여길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때를 잘못 골랐다. 지금 이곳에는 그분이 와 계신다…… 쿨럭!”
적혈귀 원로가 거친 숨과 함께 피를 한 사발이나 토했다. 충혈된 눈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듯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렇게 보안에 신경 썼는데……. 기어이 네놈들이 카라히사르의 뿔을 훔치러 왔구나……. 하지만 이냐시오 님이 너희를……!”
최후의 순간까지 암혈를 향한 저주를 뱉던 적혈 원로. 그의 목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의 주름진 손은 죽어서도 완드를 단단하게 쥐고 있었다. 주문석이 다섯 개나 박힌 완드였다.
“카라히사르의 뿔……?”
카심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눈앞에서 적혈의 원로가 죽어서도 아니고, 그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받아서도 아니었다.
카라히사르.
아주 오래전, 우연히 책에서 읽었던 이름이 그의 심장을 두방망이질 치게 만들고 있었다.
“카라히사르의 뿔이라면 설마 저것이?”
카심이 눈을 들어 광장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제단 위에 놓인 초록색 완드가 있었다.
“카심, 이게 뭐지? 마법을 배우지 않은 내가 봐도 이건 범상치 않은 물건인데.”
나도 제단 위의 완드를 보았다. 아니, 느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완드에 담긴 어마어마한 살기를 느꼈다.
무어라 정확히 형용할 수 없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 마검(魔劍)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래요? 별다른 마력은 느껴지지 않는데……? 보석도 안 박혀 있고요.”
광장 내부를 돌아다니며 주문 각인 완드를 몽땅 수거해 온 이자벨라가 제단의 완드를 보며 말했다.
제단의 완드는 다른 완드에 비해 생김새도 수수하고 주문석도 없었다. 뭘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은은한 녹색 광택이 흐르는 것이 고급스러워 보이긴 했다.
“완드 자체의 소재가 좋아도 주문석이 없다면 쓸모없는데…… 그래도 일단 챙겨 놓을까요?”
“손대지 마!!”
별생각 없이 녹색 완드를 챙기려던 이자벨라가 깜짝 놀라 손을 거뒀다.
카심이 급히 달려와 이자벨라를 밀치고 완드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거예요! 노망났어요?!”
카심의 서슬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이자벨라가 신경질을 냈다.
“돌대가리 계집아, 고마운 줄이나 알아라. 내 예상이 맞다면, 이건 지상에서 제일 위험한 물건이다.”
“흥, 맨날 위험하다고 난리야. 보나 마나 또 별것도 아니겠지.”
“이 멍청한 년이!? 만에 하나라도 이게 진짜 카라히사르의 뿔이면, 여길 통째로 녹여 버릴 수도……!”
“쉿!”
두 사람의 말다툼이 시작되려 할 때 내가 흐름을 끊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쉭! 쉬쉭!
나보다는 늦었지만, 리자드맨들도 무언가 느낀 듯 긴장하기 시작했다.
일행이 내려온 통로의 반대편, 지하 광장과 연결된 다른 입구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르르…….”
어두운 통로 끝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지하 광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적혈의 원로들을 죽인 게 저놈인가 보군.”
“흐음, 꽤 강해 보이는데요? 여긴 딱히 숨을 곳도 없고……, 내가 그동안 갈고닦은 정신지배를 써먹을 때가 온 것 같네요.”
“헛소리하지 마라. 위험한 상대다.”
그그극…….
그림자는 긴 칼을 바닥에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후리후리한 체형을 가졌기에, 터벅터벅 천천히 걸어와도 금방 우리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크륵.”
이윽고 그림자가 지하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의 정체는 장신의 남자 적혈귀였다.
머리는 온통 산발이고 턱은 침으로 젖어 있었다. 시커먼 눈은 살기가 줄줄 흐르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간혹 개처럼 코를 킁킁거렸는데, 그때마다 얼굴을 뒤덮은 혈관이 불룩거리며 움직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이마에 돋은 두 개의 뿔이었다.
새끼 악마라도 되는 듯, 작고 검은 뿔 두 개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새낀 뭐지? 지금까지 겪어 본 적혈귀들과 약간 다른데.’
일행은 그를 보며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철부지 이자벨라조차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눈앞의 괴인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똑- 또옥-.
괴인이 칼을 살짝 들어 올리자 칼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통로 반대편에서도 적혈귀 원로들을 죽이다 온 것일까? 검신 전체에 뜨끈한 피가 흥건했다.
“캬하…… 우오…….”
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몸에 걸친 헐렁한 장포가 상체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카심은 그 장포에 새겨진 특이한 무늬를 보고, 상대가 누구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이냐시오 파라쿨리우스?”
그와 동시에 괴인이 카심을 향해 몸을 날렸다.
뭐가 번쩍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괴인의 칼은 카심의 정수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소녀의 이별
촤악!
괴인의 검격에 세로로 쪼개진 카심.
그의 몸이 검은 안개로 변해 흩어지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시 뭉쳤다.
그와 동시에, 리자드맨 두 마리가 괴인을 향해 쇄도했다.
챙! 채챙!
괴인은 어렵지 않게 리자드맨들의 협공을 받아 냈다. 그의 발밑에는 카심이 아닌 리자드맨 한 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쓰러져 있었다.
‘카심이 죽을 뻔했군. 굉장한 쾌검이다.’
카심은 이오안에게 배운 새로운 주문, ‘희생의 서약’을 사용해 목숨을 건졌다. 그가 받아야 할 참격을 리자드맨이 대신 받은 것이다.
어느새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온 카심이 다급하게 거리를 벌렸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촤악!
괴인의 검격에 또 한 마리의 리자드맨이 죽었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리자드맨 세 마리도 달려들었지만, 역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눈 한 번 깜빡할 시간 동안 일어났다.
꾸어어어억-!
행동이 굼뜬 트롤은 그제서야 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트롤이 괴성 한 번 지르는 사이에 리자드맨들은 몰살을 당했다.
“카심! 트롤을 뒤로 물려!”
“그게 무슨……!”
내가 뛰어들며 외쳤지만, 카심의 반응이 늦었다. 그 잠깐의 차이가 트롤의 생사를 갈랐다.
푸확!
세로로 쪼개진 트롤의 몸에서 피가 쏟아졌다. 뜨겁게 달군 칼로 버터를 자른다고 해도 이렇게 매끄럽게 베진 못할 것 같았다.
“이런 제기랄!”
그 모습을 본 카심이 급히 수인을 맺으며 뒤로 물러났다. 기껏 데리고 온 몬스터가 모두 죽었으니, 카심 본인도 위험했다.
“각하가 정면을 맡아 주게! 마법과 저주로 보조하겠네!”
“맡겨 둬!”
나는 괴인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괴인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듯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돌려 등 뒤를 막았다.
‘어쭈, 막아?’
괴인이 사용하는 장검에는 마력이 진득하게 흘렀다.
무림인처럼 내력을 불어 넣은 건 아니고, 특별한 마법으로 표면 처리를 한 것 같았다.
후앙!
“웃!”
날아오는 참격을 급히 피했다.
괴인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휭! 휘잉!
괴인은 표적을 바꿔 가며 사방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카심과 이자벨라는 전투를 돕기는커녕 괴인의 칼을 피하기도 급급했다.
“뭐 이런 공격이……!”
괴인의 장검에 닿는 모든 것이 무 썰리듯 숭덩숭덩 잘려 나갔다.
몬스터는 물론이고, 주변의 석벽이나 기둥조차 두부처럼 갈라졌다.
마치 광휘의 검이 갑옷을 통과하는 것처럼, 괴인의 칼날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스치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고 있었다.
‘놀라운 속도다. 게다가 검기가 아니면 막을 수도 없어!’
발이 느리고 방어가 약한 암혈귀들에게 괴인은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좁은 지하 시설에서 맞닥뜨린 탓에 안전하게 거리를 벌릴 수도 없었다.
“각하! 저자는 이냐시오 파라쿨리우스일세! 검술이 왜 이렇게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는 이놈도 혈마력을 다루는 마법사야!”
“쳇, 마법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군!”
이냐시오는 적혈귀라고는 믿기지 않는 움직임으로 일행을 몰아붙였다.
‘이대로면 나는 몰라도 카심과 이자벨라가 위험하겠군. 강기공으로 단숨에 죽여 버려야겠어.’
“너희는 물러서! 이놈은 나 혼자 상대하겠다!”
내가 검강을 꺼내려 할 때, 물러서던 이자벨라가 갑자기 멈췄다.
그녀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용케 마법을 완성한 모양이었다.
“찢어지는 고통! 혼란! 검은 촉수! 피의 늪!”
“멍청아! 끼어들지 마!”
이자벨라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연달아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의 혈마법에 이냐시오가 주춤했다. 허접한 초급 마법들이지만, 나를 향해 돌진하던 이냐시오가 표적을 바꾸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쌔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