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30
관성을 무시하듯 방향을 전환한 이냐시오가 이자벨라의 눈앞에 불쑥 솟아올랐다.
양손으로 치켜든 장검이 이자벨라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이자벨라는 아까 챙겨 둔 완드를 앞세우고 모든 마력을 퍼부었다.
울컥- 울컥-.
완드 끄트머리에 붉은 기운이 맺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를 뿜었다.
화염계 공격 마법 중에서도 강력한 살상력을 자랑하는 ‘용암 쇄도’가 이자벨라의 손에서 펼쳐졌다.
“캬악-!”
이냐시오가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눈앞에 갑자기 용암 덩어리가 나타났지만,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손에 폭풍 같은 혈마력이 휘돌았다.
퍼퍽!
지옥의 업화 같던 용암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사방으로 튄 용암 파편이 석벽을 군데군데 녹였지만, 이냐시오의 몸에 닿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피에 젖은 칼이 다시 한번 휘둘러졌다.
“피해!”
이자벨라의 몸이 굳었다. 눈동자에는 뒤늦은 공포가 드리웠다. 그녀는 아직 희생의 서약도 익히지 못했다.
‘저 칼에 맞으면 이자벨라는 죽는다!’
나는 이자벨라와 십 보 이상 떨어져 있었다.
카심도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이냐시오의 칼날보다 빨리 도달할 수는 없어 보였다.
“위치 교환!”
카심의 입에서 처음 듣는 시동어가 나왔다.
참격이 이자벨라의 몸통을 쪼개기 직전, 카심이 피의 공명을 발동했다.
“아악! 카심!”
“카심-!!”
이자벨라와 내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피의 공명으로 이자벨라와 위치를 바꾼 카심.
그의 상체가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비스듬히 잘렸다.
툭, 털썩-.
두 동강 난 카심의 몸이 시차를 두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쏟아져 나온 피가 돌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카심을 베어 버린 이냐시오는 시체를 넘어 이자벨라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네 이놈-!”
나는 그 뒤를 비룡축전으로 바짝 쫓았다. 전신에 차오르는 미증유의 힘은 강기로 변해 주먹으로 방출됐다.
퍽!
눈을 질끈 감은 이자벨라의 얼굴 위로 뜨끈한 액체가 쏟아졌다.
“헉, 허억……!”
잔뜩 웅크린 이자벨라가 겨우 숨을 토해 냈다.
주변이 조용하다. 직전까지 벌어졌던 혈투가 모두 환상인 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자벨라가 살며시 실눈을 떴다.
“아아……!”
그녀의 눈앞에 이냐시오의 두 다리가 서 있었다. 다만, 상체는 없었다.
권강에 얻어맞은 이냐시오는 허리 아래만 남아 단면에서 피를 뿜고 있었다.
“이게, 무슨, 아니 난…….”
죽음의 공포를 느낀 이자벨라가 더듬더듬 지껄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 것인지도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자벨라…….”
카심의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든 이자벨라가 이냐시오의 다리를 밀치고 카심에게 달려갔다.
이자벨라는 피 흘리는 카심 앞에 쓰러지듯 꿇어앉았다.
“이, 이거 어떡해, 카심……!”
이자벨라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더듬거렸다. 카심을 끌어안고 싶어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육신이 반 토막 난 카심의 생명은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바싹 말린 꽃잎처럼, 아주 작은 손길에도 바스러져 버릴 것 같았다.
“나를 구하려고, 나, 나, 나, 나 때문에 카심이……!”
“괜찮다.”
카심이 힘겹게 한쪽 손을 들었다. 그는 이자벨라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려 했지만, 남은 힘이 없었다.
“자책하지 마라…….”
“카심!”
카심이 죽어 간다.
살아나기에는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
비쩍 마른 몸에서 나온 것이라 믿기 힘들 만큼 많은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체내에 남은 혈마력으로 의식을 붙잡고 있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에 불과할 것이다.
“큭큭, 이 돌대가리야…….”
“마, 말하지 마요, 카심. 내, 내가 치료해 줄게요! 내, 내, 내가 가진 모든 정혈을 줄게요!”
“애쓰지 마라……. 이런 꼴이 되면 죽는 것이 순리야…….”
카심은 이미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편해지는 만큼 이자벨라의 눈에 피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마지막 혈육은 이미 저승에 한쪽 발을 걸치고 있었다.
“이렇게 갈 줄 알았더라면…… 네게 좀 더 많은 걸 가르쳐 줄 걸 그랬어…….”
“안 가르쳐 줘도 돼요! 죽지 마요, 카심. 제발……!”
“증오에 잡아먹히지 마라……. 증오가…… 너를 망치고 있어…….”
“카심, 말을 아껴요! 당신, 이러다 진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죽은 곤살로도, 알베니토도…… 베로니카도…… 네가 복수를 위해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카심의 목구멍에서 피가 끓었다.
가르륵거리는 소리에 묻혀 그의 마지막 말이 들리지 않았다.
“…….”
카심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늙은 몸이 빠르게 식어 갔다.
이자벨라의 눈동자도 함께 빛을 잃었다.
카심을, 아니 카심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현실을 부정하듯 무감각해 보였다.
“카심?”
대답이 없다. 카심은 죽었다.
“또, 또야, 매번, 나 대신 다른 이가…….”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신나게 챙겨 둔 완드가 품 안에서 달그락거렸다.
하나같이 주문이 각인된 무기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고 유용한 아티팩트다.
하지만 카심의 목숨보다 귀한 것은 아니다.
“카, 카심이 분명히, 놔, 놔두라고 했는데, 내, 내가…….”
주문석이 박힌 무기는 이자벨라에게 강렬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카심이 죽을 줄 알았다면, 욕심내지 않았을 것이다.
“난, 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용암 마법이면 이냐시오를 단숨에 쓰러트릴 줄 알았다.
카심은 물러서라고 경고했지만, 이자벨라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쿠릉-!
사원이 흔들린다. 붕괴의 전조다.
지하 광장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돌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이 자리를 지켰을 사원이 왜 지금 붕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건 확실하다.
후두둑-.
이자벨라가 떨어지는 돌 조각 사이로 카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카심은 이자벨라에게 당부했었다. 마법을 훔치지 말라고. 순리를 따르라고.
“순리…….”
이자벨라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슬픔도, 분노도 묻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조적인 비웃음이 옅게 담긴 목소리였다.
“곁에 있던 모든 이를 잃어버리는 게 나의 운명인가요, 카심? 이런 저주받은 운명을 따르는 것이 당신이 말한 순리인가요?”
눈물이 또 차오른다. 분함이 슬픔보다 앞선다.
“내가 뭘, 뭘 그렇게 잘못했어?! 내가 왜 이따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해!”
악에 받친 그녀의 외침이 무너지는 광장을 울렸다.
이자벨라의 시선이 제단에 꽂힌 녹색 완드로 향했다.
“지상에서 제일 위험한 물건이라고?”
이자벨라가 홀린 듯 일어나더니, 뚜벅뚜벅 걸어서 녹색 완드 앞에 섰다.
“미안해요, 카심. 인제 와서 순응하는 건 너무 억울해요.”
이자벨라는 또 한 번 복수를 택했다.
이미 가혹한 운명에게 수차례 얻어맞은 그녀는 최후까지 발악하고 싸우길 택했다.
이자벨라가 제단에 꽂혀 있던 녹색 완드를 뽑아 들었다.
카심이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이라고 경고했던 ‘카라히사르의 뿔’이었다.
“난 그 잘난 순리에 굴종하지 않아요. 난 내 힘으로 운명조차 깨부술 거예요.”
죽은 카심은 더 이상 그녀의 선택에 참견할 수 없다. 그저 침묵으로 응원할 뿐.
사파에서 온 용사
태도가 상황을 만든다
그 시각, 혼자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이오안은 적혈의 다른 거점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적혈이 보유한 여러 거점 중 파라쿨라 성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핏방울을 보내 파라쿨라 성채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 살려 둔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가스파르테.’
발렌티누스 일파에 꼭두각시술이 있다면, 이오안이 속한 블라디미레스 일파에는 ‘혈류 지배’가 있다.
혈류 지배 술사는 원거리에서 조종하는 혈액으로 상대 진영을 엿보거나 대화 내용을 엿들을 수 있다.
‘역시 쉽지 않군. 그나마 가까운 거점까지 왔는데, 아직도 거리가 너무 멀어.’
핏방울로 정보를 엿듣는 건 지하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부터 줄곧 해 온 일이지만, 거리가 몇 배로 멀어지니 이전처럼 조종이 원활하지 않았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집중하는 이오안의 주변으로 적혈귀의 시체가 가득했다.
카심과 이자벨라의 정혈을 받아 몸을 회복한 이오안이 혼자서 거점 하나를 쓸어버린 것이다.
‘뿔…… 뿔이 어디로 갔지?’
이오안은 카라히사르의 뿔을 찾고 있었다.
그가 지하 수용소에서 성채를 염탐할 때, 우연히 뿔의 존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카라히사르의 뿔을 훔칠 수만 있다면, 적혈을 패망시키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한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지난번에는 분명 성채 연구실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파라쿨라 성채를 샅샅이 뒤져도 카라히사르의 뿔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