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31
뿔을 훔치기 위해 테온 일행과 떨어져 혼자 성채 근처로 돌아온 이오안이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젊은 뱀파이어 학자들이 카라히사르의 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오안은 핏방울을 멈추고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한데, 굳이 뿔을 삼각 사원까지 가져가서 연구할 필요가 있나? 거긴 기습에 취약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성채 내부에서 실험하는 도중에 뿔에 담긴 마법이 발동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원로원에서는 안전을 위해 황무지로 장소를 옮긴 겁니다. 보안만 철저히 유지하면 기습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게다가, 원로 수십 명이 함께 있는데, 누가 기습을 해 온들 문제가 될까요?] [하긴, 용이라도 쳐들어오지 않는 한 문제없겠지. 오비데우스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돼.]‘삼각 사원? 하필 거기라니, 이런 불운이!’
이오안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카라히사르의 뿔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이오안이 테온의 지도에 표시해 준 첫 번째 거점이었다.
즉, 테온 일행이 맨 처음 방문할 장소인 것이다.
‘큰일이다. 그곳에 카라히사르의 뿔이 있다면, 크로우 백작의 대화 시도는 실패할 거야. 숨겨야 할 보물이 있으니, 적혈의 뱀파이어들은 불청객을 쫓아내려 하겠지.’
물론 용살기사인 테온 크로우가 함께 있으니, 혹여 싸움이 벌어져도 쉽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싸움이 벌어지면 적혈은 카라히사르의 뿔에 관한 정보가 새어 나갔다고 판단할 터. 그럼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에 뿔을 숨겨 버릴 게 분명해.’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이오안은 카라히사르의 뿔이야말로 일족 재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고대의 무기만 손에 넣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핍박하지 못할 테고, 그렇게 안전을 확보한 상태에서 대륙에 흩어진 암혈의 생존자들을 하나씩 찾아 규합할 생각이었다.
‘황무지의 삼각 사원으로 가야 한다! 서둘러야 해!’
다급하게 핏방울을 회수한 이오안이 삼각 사원으로 향했다.
* * *
사원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가자.”
나는 이자벨라를 양팔로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그녀는 저항 없이 품에 안겼다.
타탓!
신법을 펼쳐 빠르게 사원을 벗어났다.
카심의 시신은 굳이 수습하지 않았다. 무너지는 사원이 그의 봉분이 되어 줄 것이다.
“……각하, 저는 이오안에게 돌아갈게요.”
사원을 벗어나자 이자벨라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도 지금 그녀를 데리고 다음 거점으로 가는 건 무리였다.
지금 나는 한시라도 빨리 적혈귀를 설득해 파라쿨라 성채로 입성해야 하는데, 이자벨라는 거점에서 적혈귀를 마주치는 순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싸움을 벌일 것이다.
“잘 생각했다.”
이자벨라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박쥐 떼로 변해 날아가 버렸다.
그녀의 태도는 차분했지만, 마음속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서쪽으로 뻗은 길은 외로운 길이니, 피 맺힌 이별에도 소녀는 계속 걸어갈지어다.
문득 아도나이의 예언이 떠올랐다.
우습게도, 당연히 나를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했던 신탁은 이자벨라를 통해 이루어졌다.
카심과의 피 맺힌 이별에도, 이자벨라는 복수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아도나이는 카심이 죽을 걸 알고 있었나……?’
모르겠다. 카심의 죽음은 여러 우연이 겹쳐서 생긴 일이었다. 싸움의 전개에 따라서 카심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죽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든 이자벨라의 내면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란 점이다.
나는 운해비영을 펼쳐 지도에 표시된 두 번째 거점으로 이동했다.
* * *
몇 시간 뒤, 테온과 이자벨라가 떠난 황무지 사원에 검은 박쥐 떼가 몰려들었다.
박쥐들은 먼 거리를 전력으로 날아온 듯, 한눈에 봐도 지쳐있었다.
이내 한 덩어리로 뭉친 박쥐 떼가 사람의 형상을 이루고, 그 자리에 이오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발 늦었군.”
이오안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미 삼각 사원은 완전히 무너져 입구를 찾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오안은 포기하지 않고 즉시 핏방울을 소환했다.
‘제발…… 제발 여기에 있어라……!’
그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핏방울을 조종해 무너진 사원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수십 구의 적혈 원로의 시신을 지나, 누구인지 모를 하반신뿐인 사체를 넘어, 그의 핏방울은 카심 앞에 당도했다.
‘카심이 죽었군……. 역시 싸움이 벌어졌나.’
핏방울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며, 사람의 손과 비슷한 형상으로 변했다.
일족을 잃은 슬픔 때문일까? 피의 손이 카심의 얼굴을 쓰다듬을 것처럼 천천히 접근했다.
휘익.
하지만 피의 손은 카심을 어루만지지 않았다.
카심의 시신을 매정하게 밀어 낸 핏방울은 그 아래의 바닥과 뒷면을 샅샅이 훑었다. 심지어 카심의 품속까지.
‘빌어먹을, 없잖아!’
뿔을 찾지 못한 이오안의 표정이 싸늘했다.
그에게는 카심의 죽음보다 카라히사르의 뿔이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누가 가져갔지? 테온? 이자벨라? 아니면 적혈의 생존자?’
핏방울을 회수한 이오안이 눈을 떴다. 그는 사원 주변에서 두 가지 흔적을 발견했다.
하나는 발자국이고, 하나는 박쥐 떼가 모래 위에서 날갯짓하며 생긴 흔적이다.
‘테온과 이자벨라가 헤어졌군. 둘 중 뿔을 가져갔을 가능성이 큰 쪽은…… 역시 이자벨라다.’
이오안은 이자벨라의 흔적이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그는 떠나는 순간까지 카심에게 어떠한 애도도 표하지 않았다.
* * *
나 혼자 도착한 두 번째 거점은 첫 번째와 사뭇 달랐다.
첫 번째 거점이 사원 형태였던 것과 달리, 두 번째 거점은 전진기지라는 용도에 적합한 형태의 구조물이었다.
반지하 구조로 만들어진 네모반듯한 초소는 황무지의 뜨거운 햇살로부터 적혈의 뱀파이어들을 숨겨 주고, 사방으로 쪽창이 나 있어 외부를 경계할 수 있었다.
타탁!
경신법을 펼쳐 날듯이 달려온 나는 기지 앞에 착지했다.
모습을 대놓고 드러내니, 기지 안에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북해에서 온 기사이자 오덴세섬의 영주, 테온 크로우 백작이다. 적혈의 뱀파이어들에게 제안할 게 있어서 왔으니, 너희는 어서 나와서 손님을 맞이해라.”
검은 뽑지 않았지만, 일부러 종학금룡기를 은은하게 둘렀다.
적혈귀들이 섣부른 선제공격을 못 하도록 처음부터 위엄을 드러낸 것이다.
“용살기사다. 용살기사가 찾아왔어.”
“전신에 흐르는 광휘라니, 아무래도 진짜 크로우 백작 같은데?”
“북해의 통치자가 왜 이런 곳에……?”
기지 내부에서 소란이 일었다.
내가 대뜸 칼을 뽑아 들고 쇄도했다면 적혈귀들도 망설임 없이 맞서 싸우거나 도망쳤겠지만, 천천히 걸어오며 제안할 게 있다고 하니 그들은 갈팡질팡하며 선뜻 대응하지 못했다.
잠시 혼란의 시간이 흐르고, 이내 전진기지의 책임자로 보이는 여성 적혈귀가 입을 열었다.
“거기 멈춰! 네가 테온 크로우라는 건 알겠으니,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그리고 몸에 두른 광휘를 거두어라!”
‘첫 단추는 꿰었군.’
비록 환영 인사는 아니지만, 어떤 형태로든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대외적으로 아도나이 교회의 광신도라고 알려져 있으니, 뱀파이어들이 덮어 놓고 혈마법부터 날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뱀파이어들은 대화를 택했고, 이건 좋은 징조였다.
“흥, 말단 초소의 관리자 주제에 감히 누구더러 이래라저래라하는 거냐? 너희 적혈은 뱀파이어의 귀족이라 들었는데, 인제 보니 손님 대접도 할 줄 모르는 미개한 일족이군.”
나는 속마음과 달리 당당하고 귀족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아쉬운 입장을 상대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다.
그와 동시에 은연중 적혈의 역린을 자극하며 저들이 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유도했다.
‘적혈은 품격을 중시하는 일족이다. 귀혈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경박하고 무례한 언행을 혐오하지. 그러니 예법을 들먹이면 분명 민감하게 반응할 터.’
“나는 북해의 지배자로서 적혈의 왕을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나는 너희에게 격에 맞는 의전을 요구한다. 너희가 정녕 뱀파이어의 귀족이라면, 관례에 따라 나를 파라쿨라 성채로 안내해라.”
나의 요구에 적혈귀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관례에 따르라니? 격에 맞는 의전이라니?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초에 인간 귀족이나 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파라쿨라 성채를 공식적으로 방문한 전례가 없다. 관례는커녕, 유사한 사례조차 없는 것이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당장 꺼지라고 해.”
“하지만 저자는 무려 용을 사냥한 거물인데, 우리 선에서 내치기에는 좀…….”
“우리가 축객령을 내린다고 저자가 돌아가긴 할까? 모욕을 받았다며 당장 칼을 뽑아 들고 덤벼들지도…….”
전례가 없다 한들, 뱀파이어들은 감히 나를 쫓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적대 관계라지만, 상대가 외교적인 방법으로 만남을 청하는데 무턱대고 공격하거나 쫓아내는 건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적대 관계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파라쿨라 성채와 아도나이 교회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서로를 욕하고 미워할 뿐이지 전면전을 벌인 적은 없었으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들은 결국 내 배짱에 넘어가고 말았다.
아까 나서서 말하던 여성 적혈귀가 다시 한번 대화에 응했다.
“일, 일단 기다려라. 파라쿨라 성채에 상황을 보고하고 지침을 받겠다.”
“음, 그 정도는 기다려 주지. 나는 아량 없는 사내가 아니다.”
“고, 고맙다.”
얼떨결에 감사 인사까지 하는 적혈귀였다.
사파에서 온 용사
다시 찾은 파라쿨라 성채
전진기지의 대표로 나선 여성 적혈귀의 이름은 아니타.
과거 테온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테우노와 마찬가지로, 적혈의 차기 원로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동량이었다.
아니타는 상대의 말재주에 휘말려 감사 인사까지 해 버리고, 뒤늦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용살기사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게 맞나?’
어쩐지 말려드는 기분이지만,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성채로 소식을 알리는 박쥐를 보내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박쥐가 성채에 다녀오려면 최소한 몇 시간은 걸릴 테지. 그사이에 저놈이 변덕을 부리면 싸움이 벌어질 우려가 있다.’
아니타는 두려웠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전진기지에 있는 모든 젊은 뱀파이어들은 내심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자기들이 숫자가 많다지만, 상대는 용살기사다. 무려 용의 목을 벤 당대 최강의 성기사, 테온 크로우다.
게다가 그의 온몸에 흐르는 금빛 광휘를 보고 있노라니, 그녀가 어떤 혈마법을 퍼부어도 모조리 튕겨 낼 것 같았다.
‘저런 위험한 인간을 굳이 내가 상대할 필요는 없지. 한시라도 빨리 성채의 원로들에게 떠넘겨야겠어. 통신 수정구를 써야겠다.’
아니타는 발밑의 상자에서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수정구를 꺼냈다.
다른 적혈귀들도 아니타의 의중을 헤아린 듯, 가까이 다가와 마력을 보조해 주었다.
우웅-.
수정구가 혈마력을 듬뿍 빨아들이고, 은은한 진동과 함께 내부의 안개가 걷히며 깨끗한 화면이 나타났다.
[오, 아니타? 평소에는 수정구는커녕 박쥐도 안 보내더니, 웬일이야? 하하, 급한 소식을 전하는 걸 보니, 누가 너희 기지를 습격이라도 했나?]“농담할 때가 아니야. 용살기사가 찾아왔다.”
[뭐? 누가 찾아와?]“용살기사, 테온 크로우 백작이 여기에 와 있다고, 이 등신아!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당장 아무 원로나 연결해!”
아니타의 외침에 수정구 반대편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갑자기 날아든 소식에 파라쿨라 성채에서도 어떻게 대응할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잠시 후,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가 수정구 안에 나타났다.
[아니타, 나 몽티조다. 용살기사가 황무지 거점을 습격했다고?]“누가 그래요? 습격이 아니라, 손님으로 찾아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