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32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몽티조의 질문에 아니타는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원로라는 작자가 냉큼 전면에 나서지는 못할망정, 자기 같은 말단에게 저런 괴수를 상대하라고 등 떠미는 것 같아 꼴사나웠다.
“나 같은 조무래기랑은 할 말 없대요! 그러니 직접 물어보세욧!”
소리를 빽 지른 아니타가 수정구를 집어 들고 전진기지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뒤를 다른 적혈귀들이 허둥지둥 따랐다.
“아, 아니타, 아무리 그래도 몽티조 님께 소리를 지르는 건 결례잖아…….”
“내가 내 할아버지한테 소리도 못 질러?!”
동료 적혈귀에게도 소리를 지른 아니타가 씩씩거리며 테온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욱하는 마음도 잠시, 테온 크로우를 향해 옮기는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씨잉, 무, 무섭잖아.’
테온 크로우는 여전히 거점 앞마당에 서 있었다.
별다른 움직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지만, 그의 몸에서 줄줄 흐르는 금빛 광휘는 뱀파이어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고, 공격하지 마라. 파, 파라쿨라 성채에 통신을 연결했다. 이 수정구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돼.”
“거기다 대고 말하면 적혈의 왕과 대화할 수 있는 건가?”
“그, 그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성채의 원로와…….”
“내가 분명 너희 왕에게 안내하라고 했을 텐데?”
용살기사의 안광이 번뜩였다.
아니타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말았다.
상대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기세라는 게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었다.
“몽티조 원로는 파라쿨라 성채의 중역이야. 나,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라고……요…….”
“……가지고 와 봐.”
다행히 용살기사는 칼을 뽑지 않았다.
아니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통신 수정구를 넘겨주고, 후다닥 뒷걸음질 쳐서 거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통신 수정이라, 혈마법으로 이런 것도 가능한가?’
원거리 통신이라니, 놀라운 능력이다.
이 세계에서 겪어 본 모든 마법을 통틀어서 가장 활용도가 높아 보였다. 쓰기에 따라서는 공간이동보다 더 유용한 재주다.
‘오덴세섬에 이런 수정구를 몇 개 가져다 두면 섬의 발전이 몇 배는 빨라질 것이다.’
행정 효율을 몇 배나 끌어올릴 수 있는 물건이다.
어디 그뿐인가? 대규모 전쟁에서 이런 통신 수단이 있다면 전술의 근간이 바뀔 것이다.
무림에서는 아직도 전서구 따위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이걸 가져가면 대단한 변혁을 일으킬 터다.
오랜만에 탐나는 물건을 보게 되자 군침이 흘렀다.
나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수정구을 들여다보았다.
‘테일로우로 위장해서 잠입했을 때 만났던 영감이잖아?’
수정구 안에는 적혈 원로 몽티조가 있었다.
내가 그를 알아본 것과 달리, 그는 나를 처음 보는 입장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몽티조였다.
[그대가 테온 크로우인가?]“뱀파이어란 족속은 하나같이 무례한 자들뿐인가? 나의 이름을 알면서도 존칭을 쓰지 않다니, 너는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대뜸 예법을 지적하자 몽티조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신없이 상대를 흔들었다.
“나는 아도나이 교회의 수호자인 동시에 세속의 백작이다. 북부의 동토에서 용의 목을 베어 버린 기사이자, 오덴세섬을 평정한 영주다. 나의 권위가 너희 적혈의 왕에 비해 부족하지 않은데, 너희가 감히 나를 이렇게 푸대접하느냐?”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 세계의 업적이고, 우리는 뱀파이어…….]“듣기 싫다! 당장 수하들에게 지시해 나를 파라쿨라 성채로 안내해라. 내가 너희 왕을 직접 만나 이야기하겠다.”
[이 양반이 듣자 듣자 하니까……. 파라쿨라 성채가 무슨 동네 술집인 줄 알아?]몽티조는 늙은이답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쯤에서 슬쩍 한발 물러서며 놈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내가 너희 왕에게 긴히 전달할 정보와 제안할 것이 있다. 적혈의 왕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다.”
[정보와 제안? 정보는 그렇다 치고, 인간 성기사가 우리에게 무슨 제안을 해?]“그건 너희 왕에게 직접 이야기하겠다. 나는 상호의 신뢰를 위해 수하들도 대동하지 않고 서부까지 단신으로 왔다. 그러니 적혈의 왕도 상응하는 태도를 보이기를 바란다.”
[…….]이쯤 되니 몽티조도 고민에 빠졌다.
그냥 황무지에서 마주쳤다면 곧장 싸움이 붙었겠지만, 내가 보여 준 태도에 차마 공격을 명하지 못했다.
[무슨 내용인지 대강이라도 알려 줄 수 없나? 피의 왕께 이 일을 보고해야 하는 내 입장도 있잖은가.]“……붉은 용, 그리고 이냐시오와 관련이 있다.”
[……!]나는 적혈귀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두 단어를 꺼냈다.
특히 이냐시오의 실종은 파라쿨라 성채의 최대 현안이니, 몽티조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파라쿨라 성채 쪽으로 출발해라. 당신이 오는 동안 나는 피의 왕께 이 상황을 말씀드리고 영접을 준비하겠다.]‘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수정구를 돌려줬다.
몽티조는 거점의 적혈귀들에게 나를 성채까지 안내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동행하는 동안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잘 모시라는 말도 덧붙였다.
* * *
파라쿨라 성채에 입성했다.
이전에는 정신을 잃은 척하며 들것에 실려서 왔는데, 이번에는 갑옷과 검을 차고 당당히 걸어서 입성했다.
적혈귀들은 나를 곧장 성채의 상층으로 안내했다.
“그대가 용살기사 테온 크로우 백작인가?”
“그렇다.”
흡혈귀 왕 가스파르테가 넓은 대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피처럼 붉은 옥좌에 앉아 있었고, 적혈귀 원로들은 나를 삼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세웠다.
“북해의 영주인 그대와 서부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나 역시 마찬가지다.”
“후후, 듣던 대로 화법이 거침없으시군. 그래, 나에게 제안할 게 있다고?”
가스파르테는 긴말할 것 없이 본론을 꺼냈다. 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주변의 다른 적혈귀들도 혹시 내가 돌발 행동을 할까 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제안을 말하기 전에 중요한 정보부터 전해 주지. 뱀파이어들의 왕이여, 너의 아들 이냐시오가 죽었다.”
“……뭐라고?”
나는 두 번 말할 필요 없이, 품에서 피에 젖은 천 조각을 꺼냈다. 이냐시오가 입고 있던 장포 조각이었다.
“직접 확인해라.”
적혈귀 하나가 후다닥 달려와 장포 조각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다시 후다닥 달려가 가스파르테에게 전달했다.
“이, 이게 대체…….”
가스파르테는 나를 앞에 두고도 격동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피의 일족인 그는 옷감에 묻은 혈액만 보고도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이걸 어디서 구했나? 이냐시오는 지금 어디에 있지?”
“황무지에 삼각뿔 모양 사원이 있다. 지금은 무너져서 형태가 좀 허물어졌는데, 이냐시오는 그 아래에 매몰되어 있다.”
삼각뿔 모양 사원이라는 말에 가스파르테의 눈이 빛났다. 자기네 거점을 바로 떠올렸을 테지.
나는 본격적인 거짓말을 시작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싸움이 한창이었다. 이냐시오가 다른 뱀파이어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이고 있더군. 그러다 몸뚱이가 급격히 부풀어 오르더니, 저절로 터져 버렸다.”
“그딴 걸 나더러 믿으라고?! 이냐시오가 죽었을 리 없다! 진실을 말해라! 이냐시오의 피가 묻은 옷을 어디서 구했나!”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진실이다. 나의 명예와 신의 이름, 나를 비추는 모든 광휘를 걸고 맹세할 수 있다.”
“……!”
예상대로 가스파르테는 나의 맹세에 강력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자벨라가 오해했던 것처럼, 그 역시 내가 감히 신앙을 걸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고 믿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다오.”
이윽고 상황을 받아들인 것일까? 가스파르테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말한 그대로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냐시오의 몸에서 용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영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더군.”
“용의 마력? 그리고 혼잣말이라니?”
“오비데우스…… 오비데우스……라고 말이야.”
여기까지 말하고 가스파르테의 표정을 살폈다.
흡혈귀 왕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고, 주변의 원로 적혈귀들도 웅성웅성하며 동요가 일었다.
‘이 정도 단서를 줬으면, 저들은 분명 오비데우스가 이냐시오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가스파르테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충분히 준 뒤,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냐시오의 몸이 갑자기 폭발한 건, 용의 마법 때문이 아닐까 싶더군. 그는 체내에서 팽창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본격적인 이간계가 시작됐다.
사파에서 온 용사
흡혈귀도 속이는 사파거두의 이간계
“아니, 그건 아니다.”
의외로 가스파르테는 내 의견에 고개를 저었다. 다른 원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냐시오의 몸속에 있던 피의 권능과 육체의 권능이 충돌을 일으킨 게야. 이전에도 한번 그런 일이 있었고, 이냐시오는 당시의 상처를 회복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 일이 있었나? 쳇, 일이 꼬이는데.’
아들의 죽음을 오비데우스 탓으로 몰아서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는데, 들어 보니 이냐시오는 원래부터 체내에 폭탄 같은 기운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가스파르테의 슬픔과 분노를 오비데우스 쪽으로 돌릴 수 없게 되는데…….
“오비데우스…… 네놈이 결국 내 아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구나……!”
‘어라? 뭐야, 이거.’
난데없이 가스파르테가 오비데우스의 이름을 되뇌며 이를 갈았다.
방금 전까지 이냐시오의 죽음은 오비데우스의 마법 탓이 아니라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놈이 우리 부자에게 쓸데없는 헛바람만 넣지 않았어도…….”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가스파르테는 오비데우스를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냐시오가 죽기 직전까지 오비데우스의 이름을 되뇌었다는 사실이 그를 원망했다는 뜻으로 해석된 모양이다.
그때 원로들이 끼어들었다.
“피의 왕이시여, 이냐시오 님의 사망 원인을 추측하는 것보다, 사실 확인이 먼저입니다.”
“이냐시오의 피 묻은 옷가지가 내 손에 있고, 용살의 기사가 신앙을 걸고 증언했다. 더 이상 무슨 확인이 필요하단 말이더냐?”
“모든 조각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일도 알고 보니 오해로 밝혀지는 경우가 있지요. 크로우 백작을 의심한다기보다는, 일족의 아이들을 삼각 사원으로 보내서 시신을 확인하는 게 먼저라는 뜻입니다.”
원로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가스파르테도 이성을 되찾은 듯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혔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늙은 흡혈귀들의 말이 옳다. 이냐시오의 시신도 수습해야 할 테니, 수하를 보내 현장을 확인해라. 그 전까지 너희가 나를 신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하겠다.”
가스파르테는 그렇게 말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원로들에게 눈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