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33
모르긴 몰라도, 황무지 거점에서 가장 가까운 적혈귀들이 현장으로 급파될 것이다.
“……손님을 앞에 두고 추태를 보였군. 크로우 백작, 그대는 이냐시오의 비보를 전해 주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인가?”
“아니,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다. 다만, 네 아들의 죽음을 먼저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본론은 뒤로 미루었을 뿐이지. 이제부터 내가 할 제안은…….”
“잠깐.”
오비데우스와 싸우겠다고 말을 하려는데, 가스파르테가 손바닥을 들어서 내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에 의심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본론을 듣기 전에, 몇 가지 먼저 묻겠다. 그대의 신앙을 걸고 진실한 대답을 해 주면 좋겠군.”
“……좋다.”
나는 한 번 더 양보하기로 했다. 이미 흡혈귀 왕의 가슴속에 나에 대한 신뢰가 싹트고 있으니, 굳이 삐딱선 탈 이유가 없다.
가스파르테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내가 예상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대가 왜 황무지의 삼각 사원에 찾아갔지? 덕분에 이냐시오의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북해의 영주인 그대가 서부에, 그것도 우리 적혈의 황무지 거점에 찾아갈 이유가 없는데.”
“나는 계시를 받았다.”
예상한 질문이었고, 준비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뻔한 거짓말이지만 상관없다.
저들은 내가 신앙을 걸고 증언하는 이상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꿈에서 거룩한 아도나이의 음성을 들었지. 서부에…….”
“그대가 서부에 자라는 악을 도려내기 위해 떠났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 하면, 그대는 신탁에 등장한 악이 우리 적혈의 뱀파이어라고 생각한 건가?”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군.’
파라쿨라 성채도 인간 세계의 소문에 어느 정도 귀를 열어 두고 있었다. 그들이 신탁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설득하기가 더 쉬워진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신의 부름을 받은 나는 서부의 모든 흡혈귀를 처단할 생각으로 칼을 뽑았다.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
“……?”
“서부로 떠나기 직전, 붉은 용이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아…….”
‘음?’
붉은 용이 나를 찾아왔었다는 대목에서 가스파르테가 묘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오비데우스와 내가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오비데우스가 흡혈귀 왕에게 날 만난 이야기를 해 준 건가?’
이오안의 말에 따르면, 오비데우스는 종종 파라쿨라 성채에 드나든다고 했다.
그러니 오비데우스와 가스파르테가 나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붉은 용 오비데우스는 나를 찾아와 저주받은 불꽃으로 겁박하고, 교만한 말을 지껄인 뒤 홀연히 떠났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고, 신의 손가락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명징하게 느낄 수 있었지.”
“즉, 아도나이의 신탁에서 말한 서부의 악은 오비데우스였다?”
“그렇다. 그날 이후 나는 붉은 용을 만나기 위해 서부를 수색하고 있었지. 그리고 그 황무지 사원에서 붉은 용의 뜨거운 마력을 느꼈고, 망설임 없이 발을 디뎠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이냐시오가 원로들을 살해하고, 본인도 폭……사하는 광경을 보았다는 얘기로군.”
가스파르테가 말을 길게 늘였다. 아무리 잔혹한 흡혈귀 왕이라도, 자기 아들의 죽음을 입에 담는 것은 괴로운 모양이다.
그는 내 주장의 진위를 가리려는 듯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런 눈빛에 위축될 내가 아니었다.
‘내 거짓말에는 오류가 없어. 너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가 노회한 흡혈귀 왕이지만, 나 역시 노회한 사파거두다.
게다가 나는 정보의 우위를 바탕으로 모든 이야기를 짜맞춰 왔으니, 가스파르테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으리라.
내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을 때, 가스파르테는 문득 자기가 놓치고 있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대는 서부에서 오비데우스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고?”
“그렇다.”
“그 말은, 오비데우스와 싸우겠단 뜻인가?”
“물론이다. 악을 도려내라는 신탁이 내려왔으니 응당 싸워야지. 아니, 싸우겠다는 말은 적절치 않군. 건방진 붉은 용에게 신을 대신해 징벌을 내리러 온 것이다. 죽음이라는 징벌을.”
가스파르테의 눈이 커졌다. 주변의 다른 적혈귀 원로들도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대의 용맹은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설마 오비데우스를 잡아 죽이겠다며 서부를 헤매고 있었을 줄이야…….”
“내가 바로 아도나이의 검이다. 용이 아무리 강대해도, 신의 대리인이 한낱 피조물을 두려워하랴.”
“허, 나 이거야 원…….”
가스파르테는 놀라움을 넘어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헛소리로 취급하며 웃어넘기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내가 가진 용살의 칭호가 너무 무겁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때, 적혈귀 원로 하나가 무언가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빠르게 가스파르테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
가스파르테의 얼굴이 다시 침통해졌다. 옥좌의 팔걸이가 그의 손아귀 안에서 우수수 부서졌다. 수하들이 이냐시오의 시신을 확인한 모양이다.
“……크로우 백작, 그대가 한 이야기는 사실이었군.”
가스파르테가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일어나는 그의 기세는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놈이었네. 흡혈귀가 이 정도까지 강해질 수도 있군.’
몸을 일으킨 가스파르테의 기세는 아들 이냐시오를 능가했다. 그가 왜 당대 최강의 뱀파이어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들의 부고를 전해 주어 고맙네. 덕분에 이냐시오의 사……체가 부패하기 전에 수습할 수 있게 되었어.”
가스파르테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예법에 맞게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이제 그대의 제안을 들어 볼까? 용을 죽이러 온 기사가 우리 뱀파이어들에게 무슨 제안을 할지 궁금하군.”
기나긴 호감 쌓기 작업을 거쳐, 드디어 흡혈귀 왕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뜸 들이지 않고 본론을 말했다.
“내가 오비데우스와 싸우는 데 힘을 보태라. 붉은 용은 네 아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니, 너에게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물론이지. 나는 내가 하는 말에 신앙을 걸었고, 아까부터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미쳤군, 테온 크로우.”
가스파르테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들의 죽음으로 분통이 터지는 건 맞지만, 오비데우스를 죽이겠다는 건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그였다.
“왜 미쳤다고 생각하지? 내가 교회의 인물이라서? 적의 적은 동지가 될 수 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
“상황에 따라 그대와 내가 힘을 합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오비데우스야.”
“그게 뭐? 오비데우스가 두렵나?”
“당연한 것 아닌가? 그는 용이다. 인간도, 뱀파이어도 아닌 용이란 말이야.”
“용도 목이 잘리면 죽는다. 심장이나 머리에 구멍이 뚫려도 죽지.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이야.”
“더 들어 볼 것도 없군. 이만 돌아가라. 아들의 부고를 전해 주었으니, 오늘 들은 이야기는 오비데우스에게 비밀로 해 주겠다.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다.”
“……아쉽지만 정 두렵다면 별수 없지.”
나는 이 자리에서 굳이 가스파르테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내가 떠난 뒤에도 그를 설득해 줄 우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오비데우스와 눈빛을 교환하고, 몸을 돌려 대전 밖으로 나갔다.
가스파르테는 고민의 여지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실상 그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할 터.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고 또 생각해라, 가스파르테. 생각을 거듭할수록 오비데우스를 향한 원망은 커져 갈 테니.’
자식의 죽음만큼 부모를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요인은 없다.
오비데우스도 목이 잘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가스파르테의 마음을 계속 두드릴 것이다.
게다가, 벌써 한 가지 확실하게 얻은 것도 있었다. 내가 오비데우스와 싸우는 동안, 최소한 적혈의 뱀파이어들이 방해는 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가스파르테가 스스로 오비데우스와 같은 편이라 생각한다면, 나를 이렇게 곱게 돌려보내지 않을 터.’
가스파르테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이미 오비데우스가 원수로 자리 잡았다는 뜻이니, 이간계는 벌써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미끼는 뿌려졌다. 최종 선택은 가스파르테에게 달렸어.’
나는 그렇게 되뇌며 파라쿨라 성채를 떠났다.
조만간 반가운 소식을 들고 찾아올 붉은 박쥐를 기대하며.
* * *
테온이 떠난 파라쿨라 성채는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분위기였다.
충격적인 소식이 몇 가지나 동시에 전해진 탓에, 다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벙찐 모습이었다.
“피, 피의 왕이시여, 일단 이냐시오 님의 시신 수습을 먼저…….”
“그래, 옳은 말이다. 이냐시오의 시신 수습과 장례는 에밀리오 원로가 맡아라.”
“예, 피의 왕이시여.”
에밀리오라 불린 원로가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대전을 벗어났다. 그는 즉시 성채를 떠나 황무지 거점으로 향할 것이다.
“나머지 원로들은 자리에 남아 있어라. 논의해야 할 사안이 산더미 같군.”
이냐시오의 사망 소식 탓에 다른 사안이 묻혀 버렸지만, 이성을 되찾고 보니 확인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할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 왕이다.
가스파르테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당면한 현안을 하나씩 논의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꺼지지 않는 증오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흔들리는 왕의 마음
가스파르테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견디며 원로들과 현안을 논의했다.
정보가 갑자기 쏟아진 탓에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선, 이냐시오가 왜 삼각 사원에 간 건지부터 생각해 봐야겠군.”
광증이 도져서 성채를 탈출한 이냐시오가 이 넓은 서부에서, 하필이면 원로들이 지키고 있던 사원에 들이닥치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을 것이다.
“피의 왕이시여, 그건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말해 보라.”
왕의 허락에 원로가 목을 가다듬고 생각한 바를 꺼내 놓았다.
“용살기사의 말에 따르면, 이냐시오 님은 광증이 도진 상태에서 오비데우스를 향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용의 기운을 추적하고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삼각 사원에는 ‘그것’이 있지 않습니까?”
“……카라히사르의 뿔.”
가스파르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중요한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지만, 설마 그걸 깜빡할 줄이야.
‘나도 이제 늙었나?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카라히사르의 뿔은 고대 푸른 용의 뿔을 깎아 만든 무기다.
용의 신체로 만든 무기이니, 광증에 빠진 이냐시오가 거기에 이끌렸을 수도 있다.
“일리가 있군. ”
“피의 왕이시여, 현장에 있었던 크로우 백작이 카라히사르의 뿔을 가져가진 않았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사원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말해 주겠다고 했지. 신앙을 걸고 말하면서, 그렇게 중요한 내용을 생략했을 리 없다.”
말은 이렇게 해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카라히사르의 뿔은 가스파르테가 적혈의 명운을 걸고 연구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인근의 아이들에게 즉시 카라히사르의 뿔부터 확인하라고 일러라.”
카라히사르의 뿔은 제대로 된 사용법만 익히면 적혈을 위협하는 모든 적을 한 줌 핏물로 녹여 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 상대가 설령 붉은 용일지라도 말이다.
문득 붉은 용을 떠올리자 또다시 이가 갈리는 가스파르테였다.
그는 잠시 심호흡하고, 두 번째 논제를 꺼냈다.
“크로우 백작이 오비데우스와 싸우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 것 같나?”
“그야…….”
원로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