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34
얼핏 생각하면 당연히 오비데우스가 이길 것 같지만, 용살기사가 보여 준 자신감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크로우 백작이 작정하고 서부까지 찾아왔으니, 어떻게든 싸움이 벌어지긴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섣불리 누가 이긴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용살기사의 무용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그 오비데우스입니다.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게다가 싸움터가 서부입니다. 오비데우스가 분신도 아닌 본체로 싸우며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땅 밑으로 용암이 흐르는 곳이지요. 저는 오비데우스의 승률이 구 할이라 봅니다.”
논의가 이어질수록 점점 오비데우스가 이긴다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었다.
테온이 강한 인상을 남기긴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뱀파이어들에게 그 힘을 증명해 온 붉은 용의 그림자는 너무나 거대했다.
“오비데우스의 승률이 구 할이라……. 우리가 크로우 백작의 곁에 선다면 어떨 것 같으냐?”
“피, 피의 왕이시여……!”
“그런 위험한 생각을……!”
원로들이 대경했지만, 가스파르테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단지 아들의 복수라는 사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일족의 미래를 내다보고 승부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테온 크로우의 말이 옳다. 용도 목이 잘리면 죽어. 그들은 과거에 비해 격이 떨어져 있다. 아도나이에게 패해 거체를 잃고 용인의 몸에 갇혀 버렸지.’
용이 아무리 강해도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는 아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한번 필멸의 굴레를 쓴 이상 그들 역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하나의 생물종에 불과했다. 다만, 엄청나게 강한 종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우리 일족이 그동안 붉은 용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하며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언젠가는 용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할 터.”
가스파르테가 진지하게 말했다.
용은 뱀파이어를 쓰고 버리는 도구로 생각한다. 고대의 붉은 용은 귀혈을 공간이동의 실험체 정도로 소비해 버렸다. 적혈이라고 그런 꼴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안 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다각도로 고려해 보라. 용살기사와 우리가 힘을 합치면 오비데우스를 이길 수 있겠는가?”
왕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원로들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밖에 없었다.
용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다. 붉은 용이 사라지면, 드넓은 서부에서 적혈을 막을 존재는 없으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서부를 우리 일족이 독차지할 수 있다. 인간들이 중부에 이어서 북부까지 차지한 것처럼…….’
게다가 용살기사는 북부병단의 도움을 받아 키르케네스를 죽여 버린 전적이 있다.
물론 키르케네스가 오비데우스에 비해 그 무게감이 덜한 건 사실이지만, 당시 용살기사를 도왔던 북부병단 역시 파라쿨라 성채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저희가 돕는다면 승률은 삼 할……. 아도나이 교회를 대표하는 중부 대교구가 합세하면 육 할까지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중부 대교구가 나서겠습니까? 그들은 비할 데 없는 벽창호들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저희와 어깨를 걸고 공동의 적에 맞설 작자들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는 가스파르테도 같은 생각이었다.
애초에 크로우 백작이 혼자 찾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이름 높은 용살기사조차 뱀파이어와 중부 대교구를 동시에 설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는 양자택일 끝에 싸움의 동료로 파라쿨라 성채를 택한 것일 터다.
‘삼 할이라……. 역시 무리인가.’
어쩐지 입맛이 씁쓸했다.
자식의 죽음에도 일족의 손익부터 따져야 하는 왕의 신분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오비데우스와의 일전이 없던 일이 되어 갈 때, 파라쿨라 성채에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피의 왕이시여, 남부 요정숲의 엘프 샬루가 알현을 청합니다. 분초를 다투는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엘프가?”
흡혈귀 왕을 설득하기 위해 테온이 준비한 마지막 수.
엘프 세 자매의 막내, 샬루가 파라쿨라 성채에 도착했다.
* * *
나는 파라쿨라 성채를 나와서 모종의 장소로 이동했다.
마라고사의 개척 교회를 떠나기 전에, 요정숲의 엘프들과 사전에 협의해 둔 접선 장소였다.
“샬릿, 전령은 보냈나?”
“그렇습니다. 샬루가 지금 가스파르테 왕을 만나고 있습니다.”
‘역시 엘프는 대접이 다르군. 대뜸 찾아가도 곧장 왕을 만나게 해 주다니.’
나는 엘프를 이용해서 가스파르테에게 마지막 정보를 전달할 셈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이 세계의 사람들은 엘프에게 강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엘프는 상종 못 할 종족이라던 드워프들의 주장과 달리, 대부분의 종족이 엘프의 말이라면 일단 귀를 기울였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혜롭고 공정하며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마나의 종족.
그것이 엘프 하면 떠올리는 세간의 인상이었다.
‘샬루가 제대로 말을 전하면, 가스파르테는 분명 내 쪽으로 붙을 것이다.’
샬루가 전할 말이란 간단했다.
오비데우스는 분신에 빙의해 오덴세섬을 불태우러 가고 있고, 크로우 백작은 무방비 상태의 본체를 습격할 것이란 내용이다.
나는 이 결정적인 승부수를 내 입으로 말하지 않고, 엘프를 통해 전하기로 했다.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쏟아 내면 오히려 상대를 설득하기 어렵다.
가스파르테는 내가 떠난 뒤 분명 나와 붉은 용 사이에서 승부를 저울질할 테니, 한 박자 늦게 중요한 승부수를 전달하는 게 효과적일 터다.
“좋아. 샬루와 흡혈귀 왕의 대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는 거지?”
“그렇습니다. 우리 엘프들은 모든 감각과 정신을 공유하니까요.”
‘이 세계의 종족 권능이란 건 왜 이렇게 죄다 사기적인 걸까.’
놀랍게도 엘프들은 종족 전체가 정신을 공유했다.
즉, 한 명의 엘프를 적진에 심어 놓으면 그가 보고 듣는 내용을 모든 엘프가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고, 별다른 통신 수단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든 연락이 가능했다.
물론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이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거짓말로 치부할 만한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도나이가 인간에게만 신성력과 광휘를 허락한 게 이런 이유인가?’
아도나이의 노골적인 인간 편애가 없다면, 이 세계에서 인간이 발붙일 곳은 없을지도 모른다.
거짓말 같은 능력이 판치는 대륙에서, 무공도, 화포(火砲)도 없는 인간이 노예나 가축으로 전락하지 않고 영역을 지키는 건 아도나이의 보살핌 덕이 컸다.
‘인간들이 아도나이한테 빠져들 만해.’
새삼 아도나이의 정체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일단 마음 한쪽 구석으로 치워 뒀다.
그리고 두 엘프, 샬릿과 샬린느 자매와 함께 마라고사로 귀환했다.
* * *
개척 교회에 들어서니 아우레오와 테오도르를 위시한 사제들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테온, 선결해야 한다던 일은 해결되었나요?”
“일단 첫 단추는 잘 꿰었다.”
“한데, 엘프들과 함께 다녀오셨어요? 갈 때는 혼자 가셨잖아요?”
“아, 오다 만났어. 출정 준비는 다 했나?”
무성의한 대답이지만 아우레오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뱀파이어도 아니고 엘프와 함께 다니는 건 딱히 흠잡을 일이 아닌 모양이다.
‘사제들은 마법을 혐오하지 않나? 엘프는 마법의 종족이라던데, 예쁘다고 특별 대우하는 건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테오도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자기 갑옷과 검을 툭툭 두드리며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대교구에서 온 성직자들과 상황을 공유했고, 출정 준비를 마쳤네. 사제들은 성경을 들고, 성기사들은 갑옷을 입으면 바로 출발할 수 있지.”
대교구에서 온 정예 성직자는 여덟 명이었고, 이로써 일행에 성직자는 총 열 명이 되었다.
아우레오를 포함한 사제가 다섯, 테오도르를 포함한 성기사가 다섯이다.
용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지만, 성직자들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용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소식에 방심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기습이 실패해 용이 눈을 뜨더라도,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울 사람들이었다.
“좋아. 이봐 샬릿, 너희는 늪의 조언자와도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한데, 그건 왜……?”
“오비데우스가 오덴세섬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봐라.”
마치 부관을 대하는 듯한 내 물음에 샬릿이 잠시 아미를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찡그린 얼굴도 예쁘네.’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마법적 교감을 마친 샬릿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눈을 떴다.
“오비데우스는 앞으로 나흘이면 오덴세섬에 도착합니다.”
“아직은 여유가 있군. 마지막으로 무장을 점검하고 화산 지대로 출발하자.”
마라고사에서 화산 지대까지는 말을 타고 가도 며칠이 걸리는 먼 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유가 있었다. 일행에 엘프가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무장을 점검하는 동안, 저희는 공간이동을 준비하겠습니다.”
샬릿과 샬린느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교회 뒤뜰로 나갔다.
성직자들은 다소 찜찜한 표정으로 무장을 점검했다.
“테오도르 경,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아무리 분초를 다투는 일이라지만, 성직자인 우리가 마법의 힘을 사용한다는 게…….”
“나도 알고 있지만,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화산 지대까지 말을 타고 가기에는 이미 늦었네. 그리고 엘프의 고대 마법은 마나를 거스르지 않고 최대한 섭리에 순응한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리 큰 죄를 짓는 것은 아닐 것이네.”
아도나이 교회의 교리는 모든 마법을 금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특수했다.
엘프 마법 자체가 다른 마법보다 혐오감이 덜하기도 하고, 오덴세섬의 죄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었다.
“……용살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걸어서 와야겠어요.”
“허허, 그렇게 하세. 뜨거운 화산 지대를 도보로 횡단하며, 타오르는 열기 속에서 함께 속죄하세.”
아우레오의 중얼거림에 테오도르가 웃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화룡의 둥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내들의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가 있다.
-역사상 가장 강한 인간은 누구인가?
이 재미있는 질문은 답하는 사람이 가진 지식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사는 지역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중부에 사는 신실한 사내들은 최초의 성기사 바라밀리오 경이라 답할 것이고, 동방인이라면 전설의 술탄 올루소이를 첫손에 꼽을 터다.
옛이야기를 많이 들어 본 사람은 과거의 강자들을 거론할 테고, 소문에 밝은 용병이나 음유시인 들은 당대의 영웅 중에서 고를 것이다.
하지만 대륙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신성제국 이전의 기록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구도 견줄 수 없다. 대마도사(大魔道師) 카라히사르가 단연 최강이다.
최초의 전투 마법사이자, 맹독 마법의 창시자.
짙은 독 안개로 도시를 멸하고, 부패의 저주로 산을 녹이는 인외지경(人外之境)의 절대 강자.
단신으로 푸른 용을 사냥하고, 그 뿔을 뽑아 무기로 만든 최초의 용살자.
카라히사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모습을 드러냈던 단 몇 년 동안 보여 준 기행은 사상 최강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 * *
테온이 정예 성직자들과 함께 화산 지대로 떠날 준비를 할 때, 이자벨라는 이오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카심이…….”
카심의 부고를 전해 들은 이오안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이자벨라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어딘가 텅 빈 표정으로 카심이 죽음에 이른 과정을 세세히 전달했다.
“카심은 나 대신 죽었어요. 이냐시오의 칼이 나를 베기 직전, 피의 공명으로 위치를 바꿔 버렸죠.”
이오안은 이자벨라의 입을 통해 그날 사원에서 벌어진 일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적혈의 원로들을 학살한 건 테온이 아니라 이냐시오였고, 카심을 죽인 흉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반신만 남아 있던 사체가 이냐시오였군.’
이오안은 테온과 헤어져 자길 찾아온 이자벨라를 기특하게 여기며 위로했다.
그는 카심이 죽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자벨라 앞에서는 모른 척했다.
“왕사, 저와 함께 그 사원으로 가요. 가서 카심의 시신을 수습해요.”
“무너진 사원을 봉분으로 쓰기로 했다면서? 인제 와서 갑자기 왜…….”
“그때는 제가 정신이 없었어요. 그대로 두면 카심은 적혈의 뱀파이어들과 함께 썩어 가겠죠. 백작 각하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요.”
이자벨라가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이오안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마라, 이자벨라. 지금 그 사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적혈의 손에 죽겠다는 소리야.”
“그게 무슨 말이죠?”
“그 사원에서 적혈의 원로 수십 명이 죽었다면서? 심지어 차기 왕인 이냐시오까지……. 이미 파라쿨라 성채에서 대규모 혈마법사단을 파견해 현장을 수습하고 있을 게다.”
“…….”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어쩐지 위화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