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48
로드릭이 눈물을 글썽이며 부러진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라프란 판로에 관한 내용을 술술 풀어놓았다.
“고객 명단과 거래량을 기록해 놓은 장부가 있어. 첫 거래는 기존 고객의 추천으로 트고, 이후에는 장부에만 기록해.”
“고객 명단을 가져와라.”
로드릭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장부를 꺼내 왔다. 그가 서랍에서 꺼낸 거래 장부 맨 뒷장에는 목록화한 고객 명단이 있었다.
“…….”
명단을 주의 깊게 살폈다.
과거 이자벨라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이자벨라, 너는 로드릭의 집무실에 왜 숨어들어 갔던 거야?
-그 자식이 가진 연락망을 빼돌려 볼까 해서요. 곳곳에 라프란을 팔아 치우는 놈이니, 고객 중에 혹시 다른 암혈의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로드릭의 장부에는 ‘바란치노프’라는 이름을 가진 고객이 있었다.
‘바란치노프…… 바란치노플, 발렌티노플.’
뱀파이어들은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적혈의 추적을 피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가명을 쓰긴 하겠지만, 아예 뜬금없는 단어를 가져다 쓰진 않을 것이다.
‘카심과 이자벨라는 이름을 존재의 근거로 여겼어. 암혈의 옛 수도 이름이 발렌티노플이지. 그러니 바란치노프라는 이름은 암혈의 뱀파이어가 사용하는 가명일 가능성이 크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한번 만나 볼 가치가 있는 놈이다.
“여기, 이 바란치노프란 놈, 기억나나?”
“바란치노프? 남서부에 사는 손님이네.”
마침 위치도 남서부다. 암혈의 고향, 발렌티노플이 있던 곳이다.
바란치노프가 암혈귀일 가능성이 조금 더 커졌다.
사파에서 온 용사
하이리치
“남서부라면 꽤 멀군. 어떻게 연락하지?”
“그쪽을 오가는 멧비둘기가 있어.”
로드릭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는 새장이 있었다. 새장에는 멧비둘기 다섯 마리가 들어 있었고, ‘바란치노프’라고 적힌 명찰이 붙어 있었다.
중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서구처럼, 로드릭은 고객들과 멧비둘기를 이용해 서신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이 새장은 내가 가져간다.”
로드릭은 싫다는 말도 못 하고 무기력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새장은 건드리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팔만 멀쩡했어도…….”
“그랬으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로드릭이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의 팔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외팔이 로드릭, 너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저버리고 용병인 나를 뱀파이어에게 팔아넘겼지. 그러니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내, 내가 너한테 못된 짓을 하긴 했지만, 넌 어쨌거나 살아남았잖아? 보아하니 딱히 다친 곳도 없는 것 같은데, 꼭 나를 죽일 필요는…….”
“말대꾸하지 마라. 진짜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
이 말은 듣기에 따라 살려 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눈치 빠른 로드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 날 살려 줄 건가?”
“그래. 아, 물론 그냥 살려 주겠다는 건 아니지. 내가 시키는 간단한 일 하나만 잘 처리하면, 목숨을 살려 주는 건 물론이고 병신이 된 오른팔도 고쳐 주마.”
“뭐?! 팔을 고쳐 준다고?!”
로드릭의 눈이 커졌다. 무슨 일을 시켜도 반드시 해내겠다는 열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검은 박쥐 용병단에서 나와 함께 다니던 여자 용병을 기억하나?”
“아아, 기억하지. 그 비실비실하고 핏기 없던 년?”
로드릭이 이자벨라를 기억해 냈다. 용병으로 활동할 당시 이자벨라는 색조 화장만 조금 더했을 뿐, 별다른 위장을 하지 않았었다.
“그래, 그 여자가 조만간 너를 찾아올 것이다. 아마 나랑 똑같이 네가 가진 고객 연락망을 원할 거야. 그때 너는 테일로우가 연락망을 통째로 가져갔다고 말해라.”
“왜 그런 짓을 해? 그 계집애가 네 돈을 떼어먹고 도망가기라도 했어?”
“쓸데없는 의문 갖지 말고, 할 거야 말 거야?”
로드릭의 대답은 뻔했다. 고작 말 몇 마디 전하는 것으로 목숨도 살려 주고 팔도 고쳐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할게! 하고말고! 팔, 팔은 언제, 어떻게 고쳐 줄 거지?”
“네가 말을 똑바로 전하면 그 계집애는 반드시 날 찾아올 거다. 너의 팔은 그때 고쳐 주마.”
나는 그렇게 로드릭의 연락망과 멧비둘기를 가지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미련 없이 오덴세섬을 향해 달렸다.
서부에 올 때는 셋이었지만, 떠날 때는 나 혼자였다.
* * *
“으음…….”
나후타야가 내뱉는 침음성에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웬 해골 마법사 하나가 서 있었는데, 두 발이 바닥에서 두 뼘 정도 떨어져 있었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보다 공중에 떠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울 만큼 자유자재로 마법을 사용하는 존재, 리치였다.
“실패라니. 아크리치를 만드는 데 육신도 중요한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나후타야는 눈앞에 있는 리치, 이자벨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결국 이자벨라를 리치로 만들었다. 뱀파이어라는 희귀한 재료에 생전 처음 보는 강력한 원한까지 품은 이자벨라는 최고의 재료였다.
아무런 마법적 간섭 없이 스스로 스펙터가 된 이자벨라였으니, 나후타야는 아크리치 제작 성공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크리치는 평범한 리치와 달리 영혼을 담는 그릇도 중요했다.
“뭐, 그래도 평범한 리치와는 격이 다른 존재가 되었으니, 당분간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겠지? ‘하이리치(High-lich)’라고 새롭게 분류해야겠다.”
아크리치에는 미치지 못해도, 보통의 리치보다는 몇 배나 강한 언데드 몬스터. 그것이 지금 이자벨라의 상태였다.
또 한 가지 낙관적인 점은, 육체만 교체하면 언제든지 아크리치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호호, 마침 딱 좋은 육체가 있지. 이자벨라, 첫 명령을 내리겠다.”
이자벨라가 텅 빈 눈을 들어 나후타야를 쳐다봤다. 새카맣게 타 버린 백골에는 군데군데 살점이 눌어붙어 보기 흉했다.
이자벨라는 생전에 겉치장을 좋아해 고된 여정에도 높은 구두를 벗지 않았지만, 모든 기억이 지워진 지금은 구두는커녕 옷도 입지 않은 꼴이었다.
“아도나이 교회의 성직자들이 오비데우스의 사체를 중부 대교구로 옮기고 있다. 그들이 중부에 도착하기 전에 습격해 사체를 빼앗아라.”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텅 빈 눈구멍에서 불길한 암흑이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본 나후타야가 흡족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옆에 놓여 있던 검은 로브가 둥실 떠오르더니, 이자벨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덮어 흉한 몰골을 가려 주었다.
“오비데우스의 사체를 확보하면 곧장 서부 내륙의 화산 지대로 가라. 그곳에서 오비데우스의 연구 자료를 몽땅 챙겨.”
이자벨라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후타야도 또 한 번 손짓했다. 이번에는 다량의 마법 스크롤이 이자벨라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서부에서 연구 자료를 확보하고 나면, 북해의 오덴세섬으로 가라. 그곳에는 오비데우스의 분신이 있다. 그것까지 확보한 뒤 나에게 돌아오면 돼.”
이자벨라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비데우스의 본체, 오비데우스의 연구 자료, 마지막으로 오비데우스의 분신.
세 가지 목표가 그녀의 뇌리에 단단히 박혔다.
“분신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오덴세섬의 테온 크로우에게 발각될 수도 있어. 그때는 굳이 맞서 싸우지 말고, 스크롤을 활용해서 도망쳐.”
나후타야의 당부에 이자벨라는 품 안에 든 스크롤을 내려다보았다. 테온의 이름을 들어도 그녀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샬릿과 샬린느의 보고에 따르면, 테온 크로우는 오비데우스와 싸울 때 용언마법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법을 시전 직전에 파훼해 버렸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지만, 마나 배열을 방해하는 원리인 것 같아. 그렇다면 스크롤에 담긴 마법은 파훼할 수 없겠지.’
나후타야는 키르케네스나 오비데우스처럼 테온을 얕보지 않았다.
이미 그의 칼날에 용이 두 마리나 죽었고, 심지어 오비데우스는 나후타야보다 강한 용이었다.
‘싸움의 과정에 변수가 많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놈이 오비데우스를 죽인 건 사실이야. 검은 용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놈이 바로 그놈이다.’
나후타야는 다시 한번 이자벨라에게 임무를 설명하고, 테온을 조심하라고 일렀다.
뱀파이어 하이리치가 된 이자벨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북 방향으로 날아갔다.
“오비데우스의 분신은 이자벨라의 새로운 육신으로 써야겠다. 오비데우스가 몇백 년이나 공을 들여 만든 육신이니, 그 몸으로 바꿔 주면 분명 아크리치가 될 수 있겠지.”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아크리치를 확보하면 다가올 검은 용과의 일전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하지만 나후타야가 진짜로 기대하는 건 따로 있었다.
“오비데우스의 본체는 내 차지야. 다른 녀석들은 하다못해 용인의 몸이라도 지켰지만, 난 그조차도 갖지 못했지. 하지만 이제 나도 번듯한 육신을 가지게 될 거다.”
나후타야의 흐리멍덩한 개구리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찬란한 과거의 거체는커녕, 비루한 용인의 형상조차 잃어버린 그녀는 한낱 개구리의 몸에 갇힌 채 오랜 세월 굴욕을 견뎌 왔다.
화룡 오비데우스의 몸이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육신은 아니지만, 개구리에 비할 바는 아니리라.
“준비는 순조롭다. 내가 ‘최후의 용’이 될 날이 머지않았어.”
나후타야의 야망이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 * *
마라고사에서 해안까지는 운해비영을 펼쳐 빠르게 이동하고, 해안에서 조르가드를 불러냈다.
모처럼 수룡왕의 머리에 올라타니 새삼 서부에서의 모험이 끝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아참, 혹시 새끼 드레이크가 섬으로 향하지 않더냐?]그르르-.
용지 이야기를 꺼내자 조르가드가 알은체를 했다. 그 옆에서 열심히 물살을 가르던 용수도 펄쩍 뛰어오르며 반가운 티를 냈다.
[이미 만난 모양이군. 섬으로 잘 안내해 주었느냐?]그르르-!
조르가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들썩였다.
지금쯤이면 녀석은 이미 오덴세섬에 상륙해 적당한 곳에 굴을 파고 지내고 있을 터다.
“도착했구나. 수고 많았다.”
조르가드는 며칠 만에 오덴세섬 해안 절벽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영지로 돌아와 주변을 둘러봤다.
서부에서 보낸 시간이 짧지 않았다. 적혈귀 사냥부터 용병 행세, 파라쿨라 성채 잠입과 아우레오 구출, 화산 지대 원정, 오비데우스 척살과 마법 자료 확보까지 반년이 넘는 시간을 서부에서 보냈다.
긴 시간을 투자한 만큼 성과도 많이 얻었지만, 영지를 너무 오래 비워 둔 것도 사실이었다.
-각하, 이제 그만 오덴세섬으로 돌아가는 게 어떤가?
문득, 복귀를 권유하던 카심의 모습이 떠올랐다.
카심은 내게 복귀를 권했다는 죄로 이자벨라에게 지독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날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 고민 없이 카심의 말을 따랐더라면…….’
그랬다면 카심은 죽지 않았겠지.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흔들어 떨쳤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근래에 잡생각이 참 많아졌다.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져 긴 한숨을 내뱉고, 장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리 오너라-!”
장원 앞에서 목청을 높여 외쳤다.
영주가 사전에 기별도 없이 돌아왔으니, 장원 내부가 시끄러워진 건 당연지사였다.
“각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서부로 떠나신 뒤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저희가 어찌나 걱정했는지…… 흑흑!”
영지의 중신들이 후다닥 나와서 나를 마중했다.
힘릿과 다레스가 짧은 다리를 바쁘게 놀려 뛰어왔고, 카라예프가 무장을 들썩이며 달려왔다. 성직자 중 일부는 신발도 채 신지 못해 맨발로 나온 사람도 있었다.
“각하!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