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67
이자벨라는 결국 이마를 몇 대 얻어맞고 떼쓰기를 멈췄지만, 이후로도 내 신법과 보법을 유심히 관찰했다.
검법이나 권각술, 금나수 따위는 전투 중에만 사용하니 눈에 익히기 어려웠지만, 함께 광야를 누비는 동안 수시로 사용한 운해비영과 운룡대팔식은 형(形)을 대부분 외웠을 정도였다.
‘그렇게 탐을 내며 눈여겨보더니, 튼튼한 몸을 얻자마자 흉내를 내는 게냐?’
순간 가슴속에 울컥 치솟는 것이 있었다. 나는 답허성실을 펼쳐 빠르게 아크리치와 거리를 좁혔다.
“서라!”
삼십 보 정도를 남겨 둔 상태에서 금룡십팔해를 펼쳤다. 손이 닿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표화탄공수의 묘리가 담긴 금나수는 원거리에서 아크리치의 발목을 잡아챘다.
파팍!
발목을 잡힌 아크리치가 크게 휘청이는가 싶더니, 쌍장으로 허공을 때리고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더 높이 올라갔다.
나는 답허성실을 연달아 펼치며 아크리치를 앞질렀다.
“파!”
아크리치는 유리한 위치에서 공격 마법을 시도했고, 나는 한 박자 빠른 창룡후로 차단했다.
‘엄청난 시전 속도다. 몇몇 마법은 오비데우스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나조차도 막지 못할 속도였다.
아크리치는 나에게서 멀어지며 각종 공격 마법을 시전했지만, 나는 쉬지 않고 창룡후를 터뜨려 차단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아크리치가 용들처럼 방해를 극복하고 마법을 완성하진 못한다는 점이었다.
바스락.
‘스크롤!’
몇 번의 마법 실패 후 아크리치의 손이 품으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양피지를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스크롤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어림없다!”
즉시 좌장으로 허공을 때렸다. 격공장이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가 아크리치의 손목을 후려쳤다.
헐렁한 로브 아래로 스크롤 수십 장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펑! 퍼퍼펑! 퍼퍼퍼퍼펑!
격공장을 쉴 새 없이 날려 스크롤을 흩어 버렸다. 동시에 운룡대팔식으로 아크리치를 향해 접근했다.
펄럭!
그 순간, 장력의 여파로 아크리치의 로브가 뒤집혔다.
얼굴을 가리던 넝마가 벗겨지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선명한 미모가 드러났다.
격공장을 폭포수처럼 퍼붓던 좌장이 멈췄다. 쉴 새 없이 허공을 디디던 두 다리도 멈췄다.
“…….”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다.
머리색도, 눈동자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몸에 지닌 마력도 다르고 풍기는 기세도 다르지만,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자벨라……!”
예상대로였다.
아크리치는 이자벨라였다.
오비데우스의 분신과 꼭 닮은 모습이지만, 그 안에 담긴 영혼은 분명 이자벨라의 것이었다.
죽음으로 그녀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다짐했건만, 막상 이자벨라를 눈앞에 두니 나도 모르게 몸이 멈추고 말았다.
꽝!
“욱!”
가슴 앞에서 공기가 폭발했다. 이자벨라가 깔아 둔 은밀한 공격 마법이 적중한 것이다.
나는 빠르게 추락했고, 이자벨라는 그 틈에 점멸을 펼쳐 사라졌다.
“앗, 놓쳤다!”
“아크리치가 사라졌다! 경계 태세! 경계 태세!”
이자벨라가 꺼지듯 사라지자 지상의 성직자들은 비상이 걸렸다.
그 호들갑에 나도 정신을 차렸다.
‘그래,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기감을 넓게 펼쳐 이자벨라가 공격해 오는 방향을 탐지하려 애썼다.
단전에서 내공을 아낌없이 퍼 올리고, 지망초감각을 최대 범위로 풀어냈다.
‘이자벨라는 멀리 가지 않았다. 도망칠 생각이면 점멸이 아니라 공간이동을 펼쳤겠지. 유리한 위치를 점한 뒤 재차 공격할 게 분명해.’
예상대로 이자벨라는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순식간에 십여 번 점멸을 반복하며 내 감각을 흐려 놓더니, 왼쪽에서 불쑥 나타나 거대한 지옥마력을 내뿜었다.
나는 비룡축전으로 피하고 이형환위를 펼쳐 이자벨라의 배후를 점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이자벨라는 점멸을 시전해 멀찍이 물러섰다. 내 움직임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탐지 마법을 넓게 유지하고 있군. 지망초감각과 비슷한 재주 같은데……. 마력이 남아도나?’
이자벨라는 탐지, 비행, 육체 강화 마법을 상시 유지하며 동시에 점멸과 공격 마법까지 남발했다. 그녀의 마력은 한계가 없는 것 같았다.
아우레오의 말처럼, 아크리치는 지옥의 마력을 무한정 끌어다 쓰기라도 하는 걸까?
‘공중에서 상대하다간 큰코다치겠군. 일단 지상으로 끌어 내리는 게 급선무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라도 허공답보를 유지하는 건 한계가 있다.
그나마 공중전에 강한 답허성실과 운룡대팔식 덕분에 이 정도라도 싸울 수 있었지만, 자유자재로 비행하는 이자벨라를 상대로 공중전을 계속하는 건 바보짓이다.
어떻게 하면 이자벨라를 땅으로 끌어 내릴지 방법을 고민하는데, 갑자기 주변에 물안개가 짙게 깔렸다.
“주문 파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정예 성직자를 이동시킨 다크엘프들이 주문 파괴술 준비를 마친 것이다.
“…….”
이자벨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비행 마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크엘프들의 주문 파괴는 진짜였군. 물안개 안에서는 이미 완성된 마법도 파훼할 수 있어!’
주문 파괴술의 원리를 자세히 연구하고 싶지만,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는 이자벨라가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정신없이 밀어붙였다.
‘유홍분심검!’
환검을 사방으로 뿌렸다. 꽃잎처럼 흩어진 허초가 사방을 에워쌌다.
“…….”
이자벨라가 붉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은 무감정하고 공허했다.
그 시선에 가슴이 아픈 것도 잠시,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지는 지옥마력에 급히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이건 또 무슨 마법이야!’
이자벨라는 생소한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열 손가락 끝에서 검은 채찍 같은 것이 튀어나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했다.
열 가닥의 채찍은 자아를 가진 촉수처럼 움직이며 십방(十方)을 휘저었다.
어쩔 수 없이 유홍분심검을 거두고 수비로 전환하며 물러섰다.
‘싸움이 생각보다 길어지는군. 가능하면 원정군이 끼어들지 못하게 나 혼자 제압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했다. 원정군은 벌써 부상자 수습을 마치고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요격조로 나갔던 각 단위 부대 지휘관들이 돌아왔으니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아크리치를 눈앞에 둔 원정군의 표정에 광기가 보였다. 신앙과 결부된 전투 의지가 불끈불끈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자벨라를 되살리는 데 관심조차 없을 터다.
‘이자벨라는 혼백명육이 온전하다. 당장 소멸시키기보다는 생포해서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 해.’
이자벨라를 직접 보고 확신했다. 그녀에게는 소생 가능성이 남아 있다. 이대로 소멸시킬 수는 없다.
‘원정군이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 이자벨라와 교회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 전에 내 손으로 생포를……!’
하지만 야속하게도,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빛을 위하여-!”
라니에르의 외침과 함께 은빛 군마들이 물안개 속으로 밀려들었다. 은하수 성기사단은 별의 파도처럼 전장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곧장 이자벨라를 향해 돌격했다.
“아크리치가 땅으로 내려왔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가루로 만들어라! 돌격! 돌격-!”
원정군의 돌격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자벨라를 쳐다봤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이자벨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양팔을 활짝 벌렸다.
“피, 피해요! ‘지옥삭풍’입니다!”
이자벨라의 기술을 알아본 아우레오가 외쳤다.
사파에서 온 용사
상하탱석
은하수 성기사단은 아우레오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박찼다.
이미 최고속으로 돌격하는 중이다. 앞에서 뭐가 날아오든 방향을 돌리기에는 늦었으니,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제들도 그걸 알고 있기에 돌격하는 성기사단에게 빛을 듬뿍 실어 줬다.
휘리리리리릭-!
이윽고 이자벨라의 양팔이 앞으로 뻗어지고, 검은 바람이 박쥐 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히이이잉-!
“악!”
“크아악!”
지옥삭풍과 은하수 성기사단의 충돌. 그 결과는 처참했다.
성기사들의 갑옷은 지옥삭풍에 닿자마자 썩은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갑옷이 잘리는 위력이니, 그 아래에 있는 맨살은 보나 마나였다.
그나마 선두에서 돌격하던 성기사들은 삭풍이 날아오는 걸 보고 광휘의 검으로 쳐 낼 수 있었지만, 후열의 성기사들은 난데없이 쏟아진 삭풍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이런!”
라니에르의 입에서 경악에 찬 탄식이 나왔다. 그의 뒤를 따르던 오십여 명의 성기사들이 단 한 번의 마법에 절반 가까이 낙마했다.
심지어 말에서 떨어진 성기사 상당수가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안고 있었다.
“도, 돌격해! 여기서 멈추면 다 죽는다! 계속 돌격해!”
라니에르가 악에 받친 듯 소리치며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일견 감정적인 지휘 같지만, 따지고 보면 옳은 판단이었다. 인제 와서 등을 보이고 도망치다간 더 강력한 마법에 뒤통수를 얻어맞을 뿐이다.
“상대는 큰 마법을 사용했다! 다시 마력을 모을 시간이 필요할 터, 지금 돌격해서 분쇄한다!”
라니에르는 선두에서 용맹하게 돌격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그의 용기를 비웃듯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핏!
점멸을 펼친 이자벨라가 원정군 진영 왼쪽 끝부분, 다크엘프 주문 파괴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끝에는 시커먼 지옥마력이 기다란 채찍처럼 늘어져 있었다.
촤악! 휘리릭!
이자벨라의 마력 채찍이 휘둘러질 때마다 다크엘프의 허리가 숭덩숭덩 잘렸다.
“안, 안 돼!”
“으악!”
성직자들의 경악과 다크엘프들의 비명이 허공을 수놓았다.
비행 마법을 방해하는 주문 파괴술은 이번 전투의 핵심이다.
이자벨라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다크엘프들부터 쓸어버릴 셈이었다.
‘쳇, 조금 늦었군.’
내가 그곳에 도착한 건 이자벨라가 여섯 번째 다크엘프의 목을 칠 때였다. 다크엘프가 죽을 때마다 물안개도 눈에 띄게 옅어졌다.
채앵!
운철묵검이 마력 채찍을 막았다.
무엇이든 잘라 버리는 지옥의 채찍이지만, 역시 운철묵검은 자르지 못했다.
“채찍을 다루는 방식이 곤륜의 영사삼십육편(影絲三十六鞭)과 비슷하구나. 네 이년, 그렇게 꿀밤을 얻어맞고도 이 어르신의 무공을 흉내 내는 게냐?”
“…….”
넉살 좋게 말을 붙여 봐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내 면상을 향해 뒤차기를 날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