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71
이자벨라는 주문 파괴자들을 집중적으로 노렸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전력 손실이 거의 없었다.
“덩굴 소환!”
다크엘프 마법사들이 자연 마법을 시전했다.
질긴 나무 덩굴이 쑥쑥 자라더니, 등나무처럼 복잡하게 얽혀 마차의 형태를 이뤘다.
“성기사들이 타고 온 군마로 이 마차를 끌면 장거리를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을 겁니다. 원정군 규모를 생각해서 서른 대 정도 더 만들겠습니다.”
“근사하군. 너희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구나.”
내가 칭찬하자 다크엘프들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었다.
반면, 성직자들은 구시렁대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크흠, 원정군의 부상자들을 마법으로 만든 흉물에 실어 나르란 얘긴가?”
“아무리 자연 마법이라지만, 성녀 은하도 모셔야 하는데 이건 좀…….”
성직자들은 마법의 도움을 받는 게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당장 마차가 없으면 곤란한 처지였다.
결국 원정군 총대장인 테오도르가 결단을 내렸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을 보며 단호하게 명했다.
“부상자를 덩굴 마차에 태워라. 성녀 은하는 단독으로 모시고, 내가 곁에서 지키겠다. 서둘러라.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겠다.”
추상같은 군령에 투덜대던 성직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테오도르가 명확한 지시를 내려 주니, 오히려 그들도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성녀를 마법 마차에 실어 옮긴 건 대교구에 도착한 뒤 재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테오도르는 그걸 알면서도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질 생각으로 군령을 내린 거야. 거참, 볼수록 탐나는 노인네란 말이지.’
테오도르는 지덕체를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저런 사내를 휘하에 거두면 영지를 믿고 맡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벽창호를 오덴세섬에 묶어 둘 방법이 없군.’
테오도르는 르망과 중부 대교구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고, 본인도 고향 사랑이 각별했다. 그에게 억만금을 주어도 고향을 떠나 오덴세섬으로 이주하진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원정대는 모든 부상자를 수습했고 전장 정리도 마쳤다.
출발을 앞두고, 한 전투 사제가 테오도르에게 다가가 물었다.
“테오도르 경, 어느 쪽으로 갑니까?”
모두의 이목이 테오도르의 입에 쏠렸다. 나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지. 이제 원정군은 목적지를 다시 정해야 한다.’
출정할 당시 목적지는 남부 요정숲이었지만, 상황이 변했다.
척살 대상이었던 아크리치는 길목에서 마주쳐 정화했고, 갑자기 벌어진 전투의 대가로 원정군은 많은 사상자를 떠안게 되었다.
‘특히 요한나가 다친 게 결정적이야. 원정군의 피해를 감안하면 이쯤에서 르망으로 돌아가는 게 옳다.’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테오도르는 길게 고민했다.
“용을 눈앞에 두고 회군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테오도르는 턱을 괴고 낮게 읊조렸다.
출발할 때와 달리, 지금은 늪의 조언자가 푸른 용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사악한 용이 요정숲에 숨어 있는데, 남부를 코앞에 두고 말 머리를 돌리는 게 적절치 않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테오도르는 일다경이 넘게 우두커니 서서 고민하더니, 어렵게 결단을 내렸다.
“……일단 중부 방향으로 가지. 성녀 은하께서 위중하시니까. 푸른 용은 소재를 파악했으니, 훗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돌아와 토벌해야겠다.”
신중한 테오도르는 안전한 길을 택했다. 그의 말에 모든 마차가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나도 마차에 올라 그들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 내가 탄 마차에는 아우레오와 이자벨라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 * *
복귀하는 원정군 행렬.
마차 안에 간이 침상 두 개가 놓여 있고, 아우레오와 이자벨라가 각각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고, 나는 그들의 상태를 살피며 깨어나길 기다렸다.
원정군 일각에서는 혹시 모르니 이자벨라의 눈과 귀를 막고, 입에 재갈을 물린 뒤 창살이 달린 마차에 따로 태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내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도나이께서 돌아온 탕아를 외면하시던가? 이 여인은 더 이상 아크리치가 아니다. 다섯 천사가 그 사실을 보증했지. 연약한 여인이 용의 마법을 견뎌 내고 마침내 인간성을 되찾았으니, 의심과 힐난이 아닌 응원과 축복을 주어야 마땅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성직자들도 더 이상 그녀를 죄인으로 취급할 수 없었다. 라니에르를 비롯한 몇몇 성직자들이 주둥이를 삐죽거렸지만, 대놓고 말대꾸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내심 불만이 있겠지. 성직자들의 의혹을 권위로 억누를 수 있는 건 잠깐에 불과할 거야. 성직자란 작자들은 자기 판단에 확고한 믿음을 갖는 족속이니까.’
지금은 천사의 강림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덕분에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자기들 생각대로 상황을 해석할 것이다.
‘나한테 따져 묻기는 어려우니 이자벨라를 붙들고 심문하겠지. 이자벨라는 산만하고 조심성이 없는 성격인데, 괜히 사제들한테 말실수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자벨라를 데리고 최대한 빨리 원정군을 떠나야 한다. 특히, 요한나가 의식을 되찾기 전에 떠나는 게 중요했다.
그럼에도 나는 당장 원정군을 떠나진 않고 있었는데, 최소한 아우레오가 눈을 뜨는 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으음…….”
마차에 누워 있는 두 사람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이자벨라였다. 그녀는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을 가득 메우던 아크리치의 붉은 동공은 평범한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테온…….”
이자벨라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할 때, 손가락을 들어 끊었다.
[마차 바깥에 백 명이 넘는 성직자들이 있다. 네가 깨어난 걸 그들이 알면 상황이 귀찮아질 거야. 조만간 적당한 핑계를 대고 원정군을 떠날 테니, 그때까지만 기절한 척해.] [……고마워요.]내 전음에 이자벨라가 텔레파시로 답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아크리치의 마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각하가 나를 구원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이요.]이자벨라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녀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듯했다.
[나는 죽음의 순간에 각하를 떠올렸어요. 짙은 어둠 속을 방황하며 각하의 이름을 계속 불렀고요. 오직 각하만이 나를 구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각하라면 나를 위해 싸워 줄 거라 믿었죠. 마지막 순간, 나한테는 각하밖에 없었어요.] […….] [고마워요, 각하. 진심으로…….]이자벨라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로 젖었다. 그녀는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지 고개를 침상에 파묻었다.
덩굴 마차는 삐걱삐걱 계속 움직이고, 이자벨라의 어깨는 가늘게 떨렸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이자벨라는 고맙다는 말을 되뇌며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다.
* * *
이자벨라가 안정을 되찾은 건 약 한 시진 정도 펑펑 울고 난 뒤였다.
그녀가 텔레파시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걸 알았으니, 굳이 대화를 미룰 필요가 없었다.
이자벨라가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교태롭게 몸을 꼬아 대고 손가락 발가락을 꼬물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각하, 혹시 나 좋아해요?] [까불지 말고 자초지종이나 설명해.]이자벨라는 짓궂게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그 웃음에서 순간 아찔한 매력이 느껴졌다. 장난스러운 표정이 오비데우스의 아름다운 용모와 합쳐져서 생긴 일이었다.
‘육신이 바뀌어서 그런가?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군.’
달라진 건 단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보는 이자벨라의 눈에 꿀물이 뚝뚝 흘렀다.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와 나는 예전에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각자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지금 이자벨라는 아무런 대가가 없어도 나를 도와줄 기세였다.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게냐? 서부 황무지에서 연락이 끊기더니, 난데없이 왜 남부에서 아크리치가 되어 나타난 거야?]이자벨라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대강은 알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요한나의 권능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추리한 것이다.
정확한 사정은 당사자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자벨라는 농담처럼 말하며 웃었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
사파에서 온 용사
비사(秘事)
이자벨라는 그간의 사연을 풀어놓았다.
파라쿨라 성채의 변고를 알게 된 시점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엘프들과 마주치고, 나후타야에게 뿔의 존재를 들키고, 이오안에게 배신당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나 참. 팔자가 꼬여도 이렇게까지 꼬일 수가 있나?’
나도 팔자 사납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사람이지만, 이자벨라 앞에서는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삶은 쉴 새 없이 찾아오는 악운의 연속이었다. 초월적인 누군가가 개입해 일부러 신세를 망쳐 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그나저나, 역시 흉수는 이오안이었군.’
이오안의 얼굴을 떠올리자 울화가 치밀었다.
이자벨라도 그의 만행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힘든 듯 손을 떨었다.
[죽음의 순간에 저에게 남은 건 증오와 원망뿐이었어요. 그 강렬한 악의는 저를 스펙터로 변하게 했죠. 자의든 타의든 유령 몬스터가 되어 버렸으니, 그때부터 할 수 있는 거라곤 시체에 들러붙어 악착같이 버티는 것뿐이었어요.]사연을 들어 보니, 이자벨라가 언데드가 된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녀는 이승에 남기 위해 본인의 의지로 스펙터가 되었다. 나후타야가 어떤 수작을 부리기도 전에, 스스로 언데드가 되길 택한 것이다.
[목숨이 끊기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거든요. 이대로 저승으로 가면 복수의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는 걸……. 무슨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이승에 남아 복수하고 싶다는 일념뿐이었어요.] [그래서 시주귀가 되었던 게로군. 하긴, 그 정도 원한이면 망령이 되고도 남지.]이후의 이야기는 내가 파악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후타야는 그녀를 남부로 데리고 가서 리치로 만들었고, 이후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확보해 아크리치를 완성했다.
[오덴세섬에 쳐들어왔던 백골 마법사도 너였구나.] [맞아요. 그때 저는 지금보다 훨씬 약했지만, 각하는 저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죠. 기습적인 스크롤 마법에 당황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호호.]‘쓸데없는 기억까지 전부 되찾아 버렸네.’
이자벨라가 나를 골탕 먹이고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탈취했던 기억을 되찾았으니, 앞으로 얼마나 약을 올려 댈지 훤히 보이는 듯했다.
[앞으로는 어쩔 셈이냐?] [어쩌긴요? 하던 일을 마저 해야죠.] […….]이자벨라의 확고한 대답에 입맛이 씁쓸했다.
그녀가 말하는 ‘하던 일’이란 결국 복수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자벨라는 사망의 골짜기를 되돌아 나와서도 복수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그녀가 죽음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복수심이었다.
[적혈은 이미 멸망했다.] [……뭐라고요?]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오비데우스와 파라쿨라 성채의 싸움은 오비데우스의 승리로 끝났고, 적혈은 극소수의 생존자만 남긴 채 패망했다고.
[대륙에 흩어진 적혈의 생존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박멸할 셈이냐?] [그건…….]이자벨라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암혈이 멸망한 뒤, 적혈은 암혈의 생존자들을 굳이 추살하지 않았다.
대륙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마주치면 싸우는 정도였지, 암혈의 절멸을 위해 별도의 소탕 부대를 편성하진 않았었다.
[너도 이쯤에서 적혈은 놔두고, 차라리 암혈의 재건에 몰두하는 게 어떠냐?]지금쯤 적혈은 일족의 재건에 애쓰고 있을 것이다.
장로 로욜라를 살려 보냈으니, 그녀가 대륙에 흩어진 적혈의 생존자를 규합하고 있을 터다.
[오비데우스의 분신은 귀혈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네 몸은 여전히 뱀파이어란 말이야. 아크리치의 마법을 가졌으니, 그토록 원하던 힘도 얻은 셈이군.] […….] [어디 그뿐이냐? 이제 암혈의 재건을 방해할 세력은 하나도 없어. 적혈은 패망했고, 오비데우스는 죽었다. 조만간 나후타야도 내 손에 죽을 테니, 너의 고향인 남서부는 무주공산이 된단 말이다.] [……각하의 말이 맞아요.] [그러니 너도 더 이상 복수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운 목표를 정해라. ‘일족을 규합하고 발렌티노플을 재건하겠다.’ 정도면 딱 좋겠군.]이자벨라는 고민했다. 내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격적인 일족 재건에 나서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암혈을 규합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점은 없을 것이다. 혹여 황금이 필요하다면 내가 보태 줄 수도 있었다.
[암혈 재건은 내 필생의 목표예요.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요.]한참 고민하던 이자벨라가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적혈은 내버려 둘게요. 하지만 이오안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