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72
이오안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에 나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오안을 향한 이자벨라의 복수심은 너무나 정당해서, 제3자인 내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오안은 카라히사르의 뿔을 독차지하기 위해 일족을 살해했어요. 악질 중의 악질이라고요.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구든 희생시킬 수 있는 작자예요. 그 대상이 설령 같은 암혈의 생존자라도!]이자벨라의 감정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오안을 떠올리기만 해도 주체하기 힘든 증오에 휩싸였다.
[이오안은 뱀의 혀를 가졌어요. 내가 애써 생존자들을 규합해 놓으면, 이오안은 나를 제거하고 교묘한 말재주로 암혈을 장악하려 할 거예요.]이자벨라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
이오안은 ‘동족 살해’라는 믿기 힘든 악행을 저질렀다. 동족 간 유대가 끈끈한 뱀파이어들에게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다.
이자벨라가 암혈의 생존자들을 규합하고 이오안의 악행을 고발하면, 모든 암혈의 뱀파이어가 이오안을 원수로 여길 터.
이오안은 이자벨라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시도할 것이다. 그것만이 자기 입지를 지키는 길이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일족 재건에 앞서, 이오안부터 잡아 죽여야 해요.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장화 속에 들어 있는 돌 조각부터 털어 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지금 너는 아크리치의 힘을 가졌다. 세상천지에 너보다 강한 존재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단 말이야. 한데 늙은 뱀파이어인 이오안이 무슨 수로 너를 죽이겠느냐?]지금의 이자벨라는 평범한 뱀파이어와 차원이 다른 힘을 가졌다.
그녀가 작정하고 도망치면 나도 붙잡을 수 없을 정도이니, 사실상 대륙 전체에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자벨라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카라히사르의 뿔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다.
[저는 나후타야와 함께 지내며 많은 걸 알게 되었어요. 나후타야는 피해 의식이 심해서, 혼자 있을 때 용들의 옛이야기를 자주 뇌까렸거든요. 버릇처럼 하소연을 늘어놓았죠.] [그때 카라히사르의 뿔에 관한 것도 들었나 보군. 한번 들어나 보자. 그 녹색 완드가 대체 뭐길래, 카심이 그렇게 걱정하고 나후타야도 탐을 내는 거야?] [그게요…….]이자벨라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어느 인간도 알지 못하는 용들의 과거였다.
[그 완드는 푸른 용의 뿔을 깎아 만든 무기예요. 카라히사르가 나후타야의 어미를 살해하고, 그 뿔을 뽑아서 만들었죠.] [호오, 용각병기(龍角兵器)라니……. 굳이 완드로 만든 걸 보면 카라히사르는 마법사였던 모양인데, 대단한 실력자로군.]세상에 다른 재주도 아니고 마법으로 용을 사냥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용이야말로 마법의 시초이자 끝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자벨라는 검지를 까닥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졌지요. 그래서 카라히사르는 인류 역사상 최강의 대마도사라고 불리고요. 하지만 알려진 사실과 달리, 그는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면? 설마 엘프인가?] [듣고 놀라지 마세요.]이자벨라가 호호 웃으며 변죽을 울렸다. 대단한 비밀을 말하려는 듯했다.
[카라히사르는 아크리치였어요. 동방의 검은 용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첫 아크리치요.] [재미있군.] [뭐야, 반응이 그게 다예요?]이 세계의 인간들이 들었다면 경악할 내용이겠지만, 다른 세계에서 온 나에게는 그저 흥미진진한 정도였다.
[그래도 꽤 놀랐다. 아크리치가 정말 용을 살해할 정도로 강하다니……. 심지어 거체 상태의 용을 말이야.]나도 이자벨라의 전투력을 직접 겪어 보았기에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었다.
이자벨라도 몇 가지 마법은 오비데우스보다 더 빠르고 위력적으로 사용했다. 용인 상태의 용과 싸운다면, 상성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거체 상태의 용과 싸운다고 가정하면, 쉽사리 이기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카라히사르는 저보다 훨씬 강했을 거예요. 검은 용은 아크리치 제작에서 다른 용들보다 훨씬 앞서 있거든요. 그뿐 아니라…….]이자벨라가 긴 설명을 이어 갔다.
요약하자면, 카라히사르가 나후타야의 어미를 죽인 건 여러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일종의 사고였다.
나후타야는 그날의 비극이 어찌나 억울했는지, 자기 어미가 만전의 태세였다면 결코 카라히사르에게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시도 때도 없이 지껄였다고 한다.
[뭐, 그저 패자의 넋두리인지도 모르죠.]이자벨라의 비아냥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패자는 말이 많은 법이다.
[좌우지간, 그 녹색 완드에는 카라히사르의 주력 마법이 담겨 있어요. 지상 최강의 맹독 마법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죠.] [맹독 마법이라…….]아크리치라고 다 똑같은 마법을 쓰는 게 아니었다.
나후타야는 이자벨라를 아크리치로 만들 때 흑마법을 주력으로 설정했다.
푸른 용이 사용하는 자연 마법은 언데드가 사용할 때 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동방의 검은 용은 카라히사르에게 맹독 마법을 부여했고, 그것은 언데드에게 찰떡처럼 어울리는 기술이었다.
카라히사르가 이자벨라보다 강했을 것이라 추측하는 이유도 이런 차이 때문이었다.
[이오안이 뿔에 담긴 마법을 습득하기 전에 찾아서 죽여야 해요. 그가 카라히사르의 맹독 마법을 손에 넣으면, 골치 아파져요.] [거기까진 알겠다. 한데, 이오안을 어떻게 찾을 생각이냐?] […….]신나게 떠들던 이자벨라가 한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엘프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나후타야도 아직 찾지 못한 이오안이다.
반면 이자벨라는 휘하에 세력은커녕 키우는 개 한 마리도 없다. 작정하고 숨어 있는 이오안을 찾아낼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오안은 녹색 완드에 얽힌 사연까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 어마어마한 마법이 숨겨져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놈의 성격상 완드에 담긴 마법을 완벽하게 익힐 때까지 꼭꼭 숨어서 절대 나오지 않을 거다.] [……그렇겠죠.]이자벨라가 한숨을 푹 쉬더니 뒤로 돌아누웠다. 하지만 금방 다시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각하, 뭐 좋은 방법 없을까요? 각하는 특이한 재주가 많잖아요. 아크리치를 제정신으로 돌려놓기도 하고.] [그건 여러 조건이 우연히 맞아떨어져서 가능했던 거야.] [어쨌든요. 뭐 기발한 생각 없어요? 머리 좀 굴려 봐요.] [이년이 나한테 방법을 맡겨 놓았나…….]슬쩍 손을 들자 이자벨라가 다시 돌아누웠다. 부풀린 그녀의 볼이 뒤에서도 보였다.
[우리끼리 의논해 봤자 가진 정보가 비슷하니 새로운 해법이 안 나와. 일단 나후타야를 잡자. 그 교활한 푸른 용을 제압하고 정보를 얻으면, 무언가 새로운 수가 나오겠지.] [나후타야를 잡자고요?]이자벨라가 다시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날 언데드로 만든 복수를 해 주려고요? 역시 각하는 날 좋아해. 나한테 푹 빠진 거야.] [복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구나. 생각해 봐라. 나후타야는 나에게 아크리치를 빼앗긴 꼴이니, 오히려 그쪽에서 보복에 나설 게다. 어차피 벌어질 싸움이니, 이쪽에서 선수(先手)를 잡아야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쳇.]이자벨라가 다시 돌아누웠다. 어딘가 실망한 기색이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 이자벨라는 내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보다 훨씬 강하고,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되어서.
사파에서 온 용사
깨어난 아우레오
아우레오는 하루가 더 지나서 정신을 차렸다.
이자벨라는 아우레오가 깨어나려는 기미를 보이자, 그때부터 눈을 꼭 감고 기절한 척을 했다.
“으음, 여기는……?”
“대교구로 가는 마차 안이다. 전투는 끝났어.”
“테온……?”
아우레오가 눈을 꿈뻑이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습관처럼 오른팔로 바닥을 짚으려다 벌러덩 누워 버렸다. 팔이 잘린 걸 잠시 잊은 모양이었다.
“하하,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
나직하게 웃으며 말하는 아우레오. 그의 얼굴에서 묘한 현기가 느껴졌다. 이전과 똑같은 앳된 얼굴이지만, 어딘가 격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팔을 잃고 깨달음을 얻은 건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우레오는 왼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나를 향해 물었다.
“테온…… 제가 마지막 순간 보았던 게 꿈은 아니겠지요?”
“헤일로를 말하는 게냐? 흐흐, 피를 철철 흘리면서 까무러친 주제에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아아, 역시……!”
아우레오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가 목도한 기적은 환상이 아니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던 천사의 강림을 결국 눈앞에서 본 것이다.
‘진짜 천사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느끼는 감동은 진짜일 테니,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아우레오는 한동안 나를 찬양하고, 아도나이의 은혜를 찬미했다.
“아크리치는 어떻게 되었나요? 다섯 천사의 힘이 테온의 몸을 빌려 현신했으니, 손짓 한 번에 재가 되어 버렸겠지요?”
“네 옆에 있잖아.”
“예? 악!”
옆을 돌아본 아우레오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아우레오는 허리를 삐끗했는지 다시 푹 주저앉았다.
“조심해. 넌 꼬박 이틀을 누워 있었어. 갑자기 움직이면 다친다.”
“으윽,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크리치가 왜 마차 안에 있어요?”
아우레오가 허리를 주무르며 물었고,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자벨라는 평범한 여인이었고, 그녀의 육신을 장악한 아크리치의 영혼만 소멸시켰다는 말에 아우레오가 감탄했다.
“언데드를 죽음이 아닌 방법으로 정화하다니, 과연 천사의 권능이군요! 천사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우레오는 내가 하는 거짓말에 일말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믿었다.
‘요 귀여운 놈.’
아우레오는 가끔 답답한 짓을 해서 문제지, 기본적으로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신분도 높은 녀석이 제 몸 사리지 않고 강아지처럼 나를 따르니, 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똑똑똑.
그때 밖에서 마부석에 달린 쪽창을 두드렸다. 마부와 나란히 앉아 가던 부제가 아우레오의 목소리를 들었나 보다.
“아우레오 사제님, 깨어나셨군요!”
부제가 쪽창으로 마차 내부를 들여다보더니,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아우레오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은 곧장 원정대 전체에 퍼졌다.
테오도르는 즉시 행군을 멈추고 우리 마차로 찾아왔다.
“빛에 찬미를! 아우레오 사제가 깨어나다니, 오늘은 행군을 멈추고 진중 연회를 열어야겠군!”
테오도르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제들도 같은 생각인 듯 말을 멈추고 식탁을 준비했다.
심지어 매사에 삐딱한 라니에르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아직 요한나가 깨어나지 못했는데, 행군을 멈추고 연회라니…….’
원정군 내에서 아우레오의 입지가 이 정도였던가?
내가 아우레오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과 달리, 다른 성직자들에게 아우레오의 존재감은 테오도르나 요한나에 비해 처지지 않았다.
특히, 이번 전투에서 아우레오는 자기 신앙을 입증했다.
그가 오른팔을 희생해 천사의 강림을 도왔다는 사실은 원정군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일각에서는 아우레오가 성인(聖人)의 칭호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대교구의 심사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만약 아우레오가 성인이 된다면 역사상 가장 어린 성인이 탄생하는 셈이다.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아우레오의 명성이 오르는 건 잘된 일이지. 모처럼 연회를 연다니 나도 술 한잔 마셔야겠다.’
연회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진중에 부상자가 많았고, 이제 막 깨어난 아우레오도 기름진 음식과 독주를 마실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정갈한 음식에 옅은 포도주를 곁들인 진중 연회는 원정군에게 달콤한 휴식이 되어 주었다.
사상자가 많은 탓에 전투가 끝난 뒤 승리를 만끽하지도 못했는데, 모처럼 원정군 진지에 하하호호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종종 맛있는 음식을 골라 들고 마차로 들어갔다.
[나 왔다.]